이중섭 1

미옥서원의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 최열의 '이중섭 평전'

by 양심냉장고


'이중섭'은 그 이름 자체가 브랜드이다. 다른 제목이 필요 없다.


옆 자리에 앉은 선생님이 미옥서원에 가자고 한다. 미옥서원은 보령의 오서산 산속에 있는 서점이다. 산속에 서점이라니 이상한 곳이다. 이곳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말할 기회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중섭 평전'을 가지고 북콘서트를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다. 집 떠나 먼 길 가는 부담도 싫고, 또한 난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 고향 청양도 지나고, 지나는 길에 어죽집인 진영분식도 들르고, 내가 살던 집 근처도 지나고, 집 근처 정약용이 일했던 금정역과 채제공 생가터를 답사하는 조건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그렇게 4명의 교사들이 모여 토요일 하루를 함께 하게 되었다.


미옥서원에서 진행하는 북콘서트는 최열의 '이중섭 평전'이었다.


책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무려 950페이지에 달한다. 그냥 천 페이지라고 하자. '벽돌책'이다. 최열선생의 강의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2시간! 이 시간 안에 이중섭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책 속의 몇 가지 내용만 훑어보고, 그 두꺼운 책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하루의 한낮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나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책 속의 내용이다.

하지만 책 속의 내용을 순서대로 다 정리하려면 끝이 없다. 굳이 내가 책 내용을 다 정리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읽으며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 이중섭의 삶과 그림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하자.


어차피 이중섭은 너무나 유명해서 자료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의 그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 한 점당 50억 정도는 기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으니, 관심만 있으면 얼마든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나도 숟가락 하나 얹은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이중섭


우선 이중섭은 빈센트 반 고흐를 닮았다.


외모가 아니라 그의 삶이 말이다. 미술을 향한 광기 같은 열정은 물론이고, 정신병으로 마감되는 그들의 삶이 닮았다. 그림을 두고 오가는 수많은 편지와 엽서가 닮았다. 고흐는 동생 테오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중섭은 그의 아내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 수많은 엽서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서간 속에는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스토리가 들어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가 남아 사람들은 고흐와 이중섭의 그림을 보며 쉽게 공감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그림을 유명하게 만드는 동역자들이 존재한다. 고흐에게는 테오의 부인인 '봉허'여사가 있었다면, 이중섭에게는 물론 그의 아내 '마사코'가 있었다. 그 외에도 그를 기리는 친구들은 물론, 이중섭의 사후에는 이중섭 그림을 가장 아꼈다는 이건희 회장이 있었다.


이를 통해 다시 알게 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이유로, 첫째는 타고난 예술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자질을 꽃피우는 광기와 같은 순수와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그 광기의 열정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스토리와 함께, 셋째로 그러한 스토리를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하는 메신저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열심히 글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기록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좋은 친구와 동역자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


이중섭의 모성이자 연인, 아내였던 마사코


이중섭은 아내가 되는 '마사코'를 일본 유학시절에 만났다. '문화학원' 1학년 후배였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는 부자였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재벌이었다. 하지만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연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사코도 유력한 집안의 잘 나가는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연인이 되었고 목숨을 건 사랑을 했다. 이중섭은 사랑하는 '마사코'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수많은 엽서를 보냈다. 이 그림엽서들이 남아 훌륭한 이야기와 작품들이 되었다.

엽서1 '소가 오리에게 '


엽서 2 '발 씻어주다'


이런 이중섭의 사랑을 받은 '마사코'는 이중섭과 헤어질 수 없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이중섭을 찾아 '마사코'는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 현해탄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이중섭의 형은 재벌 지주의 혐의로 처형당하고, 결국 이중섭은 6.25 동란 중에는 공산당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그리고 피난민으로 가득찬 부산을 떠나 다시 제주도로 옮겨갔다.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중섭은 피난을 가던 힘든 순간조차도 가족과 함께라면 즐거웠던 추억으로 승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쪽나라를 향하여'가는 이중섭의 가족은 마치 소풍을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제주도 피난생활은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으로 남았다. 지금도 서귀포에는 그가 살았던 단칸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그 좁은 방에서 네 가족은 헐벗은 몸으로도 마냥 행복한 추억이 많았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두 아들이 해변가에서 게를 잡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 보인다.

서귀포 게잡이

이들 가족은 힘들었지만,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마음이 있었다. 특히 '서귀포의 환상'과 같은 그림은 이러한 이중섭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명작으로 손꼽힌다.


서귀포의 환상



하지만, 아무리 긍정하려고 해도 피난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결국 마사코는 힘든 피난생활에 몸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때 마사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중섭은 그러나 이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마음이 겹쳤을 것이다. 병든 아내의 정신적인 충격을 염려했을 수도 있고, 아내가 일본으로 떠날 것을 두려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마사코는 1952년 6월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의 이별은 이후에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영원한 이별과 마찬가지였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이후 통영에 잠시 머물면서, 그의 인생 중 가장 열정적인 화가의 삶을 살게 된다. 가족에게 가기 위해 끝없는 그리움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족부양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가장 열심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고흐가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아를에서 그의 빛나는 예술을 완성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중섭은 이 통영의 시기를 지나면서 아래 그림 '도원'과 같은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중섭의 예술적 자질과 열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 아름다운 통영의 자연이 어우러져 최고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중섭 평전'을 쓴 최열 선생의 말이 그랬다.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누군가 소장하고 있다면 대박일 것 같다.


도원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중섭은 집착에 가까운 모습으로 가족을 그리워한다. 그의 감정은 단지 애틋함을 넘어서기도 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를 ‘마더 콤플렉스’라는 심리학적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초등학생까지 어머니의 젖을 물었다는 일화가 있으며, 어머니와의 강한 유착은 성인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못한 채 아내 '마사코'에게 전이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따르면, 이중섭에게 마사코(이남덕)는 단지 아내이자 연인을 넘어서 모성의 대체물이자 심리적 안전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명확한 진단이 뒷받침된 것은 아니다.


나의 귀여운 남덕 군은 화공 대향에게는 안성맞춤의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아내라고, 이토록 들어맞는 귀엽고 참된 여인을 하늘은 대향에게 잘도 베풀어주었다고. 화공 대향은 실로 귀여운 남덕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만이 남덕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향의 애정이 가득히 넘칠는지 지금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오.
대향은 반드시 남덕을 행복하게 해 보이겠소.

'이중섭 평전'에서 인용


어쨌든, 이중섭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도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어 가족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은 최선을 다해 그림에 몰두하는 이유가 되었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

그리움과 좌절의 시간


그런 가운데 이중섭은 사흘에 한통씩 편지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이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노를 표출한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당시 마사코는 믿었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힘들어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중섭은 그런 아내를 향해 답장이 없다고 분노한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의존과 감정의 기복은 단지 그리움이라고만 보긴 어렵다. 이중섭의 사랑에서는 조금 지나침이 엿보이기도 한다. 내 생각이다.


그 소원하는 바를 이행치 못하는 여자를 -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요? 대향의 소원대로 못하겠으면 그만두시오. 분명한 답장이 없는 이상 불쾌하오. 남덕만이 살아가는 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오? 모든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거요.
내가 좀 신경질적인 내용을 써 보내더라도 기분 상하지 말아 주오. 오직 당신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까닭에 당신에게만 격렬한 요구를 하는 거요.

'이중섭 평전'에서 인용


달과 까마귀

위 그림 '닭'이나 '달과 까마귀'는 우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를 소재로 했다. 날 수 없는 닭조차도 훨훨 나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이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만남을 간절히 염원하는 동시에 멀리 떨어진 가족에게 날아가고 싶은 마음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그림의 소재인 '까마귀'와 그림이 그려진 시기 때문에 종종 고흐의 말년 작품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연상시킨다는 평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그림을 이중섭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달과 까마귀'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달 속에서 홀로 나는 까마귀는 이중섭을 형상화한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까마귀는 아내인 '마사코'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전선에 앉은 두 마리 까마귀는 두 아들을, 그리고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까마귀는 죽은 아들을 형상화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중섭에게 까마귀는 죽음을 상징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그에게 까마귀나 닭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주작'이나 '삼족오'와 같이 신성한 동물이었다고 한다. 실제 이중섭의 그림은 고구려 벽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이중섭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환상의 새를 통해 가족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많은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개인전, 대구에서의 개인전 모두 사람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받으며 그림을 팔기도 했지만, 제대로 수금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중섭은 이러한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심각한 우울과 상처 속에서 괴로워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자신의 그림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자존감이 무너지니 자기 파괴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 시인 구상의 집에서 요양차 머물며 그린 그림 한 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인 구상의 가족


이번에 아빠가 가면 틀림없이 근사한 자전거를 태성이와 태현이 형에게 하나씩 사줄 작정이다. 튼튼하게 엄마 말 잘 듣고, 태현이 형하고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이중섭 평전'에서 인용


이중섭은 친구의 구상시인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때 친구인 구상이 자기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 문득 이중섭도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이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이중섭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선이나 사물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인데, 이 그림에서도 자전거를 탄 구상의 아들과 이중섭의 손이 하나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 대하여 시인 구상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왜관 낙동강변에다 자그마한 집을 장만하고 피난 중 남의 곁방살이를 면하면서 아이들에게 세발자전거 하나를 사주던 날, 그가 그것을 스케치한 것이다. <가족사진>이라며 준 이 그림은 나의 가족 단란을 바라보는 그의 멀뚱한 표정이, 그의 축복이랄까, 부러움이랄까, 그날의 그의 표정이 바로 오늘날에도 나를 향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져 스스로 놀라곤 한다.

'이중섭 평전'에서 인용


이렇게 이중섭의 꿈은 하나 둘, 물거품 되고 그는 결국 자신의 그림을 불태우기도 하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 당시 그의 그림은 매우 지치고 병들고, 슬프고 외로워 보인다.


이중섭에게 '소' 그림은 자화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어쨌든 이중섭의 '피 흘리는 황소'는 가장 말년에 그린 그의 '소' 그림으로 이 그림에서야말로 진짜 이중섭의 죽음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피 흘리는 황소


그리고, 이중섭의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는 절절한 외로움의 마음이 느껴진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지만, 눈 오는 날 기다리다 지친 아이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이 묻어난다.


이러한 이중섭의 모습을 관찰한 김춘수는 다음과 같은 시로 이중섭의 외로움과 절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아래 시는 고등학교 문학 수업에도 자주 나오는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다시 읽으며 깊은 공감이 되었다.


돌아오지 않는 강


결국 이중섭은 이렇게 쓸쓸한 외로움으로, 서울적십자 병원의 한 병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무연고자의 신분으로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1956년 9월 6일 목요일 오후 11시 45분이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오방색, 색채어의 어원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