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군, 폐비윤씨의 남편, 연산군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이야기
성종도 형(월산대군) 못지않은 재주로 시조 한 수를 남겼는데, 그 시조가 바로 『이시렴 부디 갈다』이다. 학교에서는 시조의 작가층이 매우 넓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인데, 그와 함께 성종의 인재 사랑과 인간적인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다정다감한 성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신하들을 아끼는 군주로 유명했다. 경연을 되살린 후에 하루에도 수 차례씩 경연을 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며 정치를 고민했다고 한다. 조선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 그의 손에서 완성되었고, 훈구 중심의 정치 구조 속에서 새로운 사림 세력을 등용하는 정치적 전환을 시도한 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밝은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종실록』을 보면 뜻밖의 그림자들이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세간에서는 성종을 가리켜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걸주”라 했다는 평은 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낮에는 이상적인 유교 군주의 모습으로 경연을 즐기고 백성을 걱정했지만, 밤이 되면 후궁들과의 연회, 기생들과의 향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야사 특유의 과장이 섞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정황은 그가 일정 부분 방탕한 삶을 병행했던 임금이었음을 암시한다. 어쨌든 성종은 왕비만 3명에, 12명의 후궁, 그리고 그들에게서 35명의 자녀를 얻었다.
도대체 왜 성종은 이러한 삶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 살아야 했을까. 그 이유를 단순한 성격 문제로 돌리기에는, 그가 자란 환경이 너무나도 특별하다.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는 그에게 단지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치의 동반자이자, 도덕의 감시자였으며, 삶의 윤리를 가르친 통제자였다.
인수대비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강인한 여성이다. 세조가 죽은 뒤 두 아들과 딸을 사가에서 강하게 훈육했고, 나아가 『내훈』을 직접 편찬하며 여성 윤리의 모범을 세우고자 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수렴청정하는 시어머니를 대신해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왕과 대신들에게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병약했던 '공혜왕후'는 오래 살지 못했고, 두 번째 왕비 윤 씨도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갈등이 잦았다. 그래서 윤 씨는 왕이 될 아들(연산군)을 낳고도 폐비가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결정적으로, 왕으로서 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방식으로 정리했다는 점은, 성종의 유약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경들은 모두 다 나에게 대사(大事)를 가볍게 조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폐비(廢妃)를 내가 어찌 쉽게 했겠는가? 옛날 제왕(帝王)이 혹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후(后)를 폐(廢)한 자가 있었으나, 내가 어찌 이와 같이 했겠는가? 대비(大妃)께서도 말씀하기를, ‘내가 일찍이 화(禍)가 주상(主上)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하루도 안심(安心)을 하지 못했으므로, 드디어는 가슴앓이가 생겼는데, 이제는 점점 나아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비께서 폐비한 것으로 인하여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정유년에 윤 씨(尹氏)가 몰래 독약(毒藥)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乾柿)와 비상(砒礵)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은가? 혹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害)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성종 10년 6월 5일
명백하게 폐비 윤 씨의 사건의 배후에는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있는 것임은 실록에서도 위와 같이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종에게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더 콤플렉스(Mother Complex)’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마더 콤플렉스’는 어머니와의 과도한 정서적 유착 또는 반감으로 인해 개인의 인격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경향을 의미한다. 남성의 경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과도한 순응과 복종, 동시에 숭배와 두려움, 이성관계에서의 불안정한 집착, 그리고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는 단지 양육자가 아니라 도덕과 권위, 억제의 상징이다. 성종에게 인수대비는 그야말로 그런 존재였다. 그는 어머니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도덕적인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억눌린 감정과 욕망은 밤의 세계에서 은밀히 분출되곤 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동시에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는 그 내면에 깊은 갈등과 분열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어머니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독립적인 판단보다 모후의 판단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결국 자신의 아내이자, 아들의 어머니를 폐비하는 중대한 사건조차 어머니의 결정을 따르는 방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성종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학문을 사랑하며, 동물을 사랑하기도 한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 아래에서, 시대의 모범이 되기를 강요받은 아들이자, 도덕적 어머니 앞에서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 했던 인간이었다. 어쩌면 성종의 진짜 모습은, 바로 그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분열되고 갈등하는 내면의 인간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더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굴레를 짊어진 채, 조선이라는 이상 국가의 얼굴을 유지해야 했던 복잡한 존재였다.
이렇게 복잡한 가족 관계 안에서 희대의 폭군이자 광인이라 불리는 연산군이 자라고 있었다.
역사와 심리학을 좋아하는 나에게 매우 흥미있었던 책을 하나 소개한다.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심리학자인 강현식이 쓴 책으로 조선 역대왕들의 심리를 특히, 가족 안에서의 역학 관계에서 풀어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정통 역사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심리학 이론을 매우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이 책에서는 '예종, 성종, 연산군'의 이야기를 고부갈등이 낳은 비극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아들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며느리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적인 상태로 보자면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인이 경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수대비에게 성종은 아들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아들은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다른 여인들을 질투하는 것 이상으로 어머니는 며느리를 질투하는 것이다. 며느리의 질투는 기껏해야 음모와 투서, 남편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끝났지만, 어머니의 질투는 며느리에게서 자식을 빼앗고 궐 밖으로 쫓아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연산군은 정현왕후(성종의 세 번째 부인, 중종의 어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그러나 정현왕후는 폐비 윤씨와 비슷한 시기에 후궁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인수대비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연산군에게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한들 친어머니만큼 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무조건 폭군이며 패륜아라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면을 들어다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를 잃고 주변에서 차가운 시건을 받으면서 자란 연산군의 성품이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가 아닐까? 정말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연산군이 아니라 인수대비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p,106~108 에서
사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황후 입장에서도 자기의 아들이 아닌 연산군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솔직히 연산군이 죽어야 자기의 아들이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산군은 확실한 '모성의 결핍' 상태로 자랐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아버지 성종도 그리 정겨운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원년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은 세자의 양모라는 핑계로 항상 금내(禁內)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도 대비의 이어소(移御所)에 있으면서 자못 총행(寵幸)을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성묘(成廟)가 빈전(殯殿)에 있을 적에, 성묘(아버지 성종)가 길들여 기른 사슴을 손수 쏘아 삶거나 구워서 먹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9월 2일
성종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고 연산군을 더욱 혹독하게 가르치고 엄하게 굴었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그가 기르던 사슴을 쏘아버리는 것으로 앙갚음을 했다.
결국,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왕이 되었고, 그 왕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갈구하다가 폭군의 오명을 쓰고 영원히 역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