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가다 가라사대

인문학의 쓸모 : 학교 일상의 기록 1

by 양심냉장고

제자에게 전화가 왔다.

주홍이는 속칭, ‘노가대’를 하면서 책까지 쓰는 좀 독특한 이력의 제자이다. 최근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 「노가다 칸타빌레」와 「노가다 가라사대」와 같은 책을 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 책을 드리고 싶다는 거였다. 반갑기도 하고 제자가 쓴 책 내용이 궁금하기도 해서, 차 한잔 마시면서 바로 책을 받아왔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중략)
그 시절 나를 견디게 해준 건 습작노트였다. 야자가 시작되면 공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나는 한쪽 귀에 몰래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 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앉아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에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글을 써 내려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글자 나열해놓은 수준이었지만, 그때는 제법 진지했다.
어느 날, 너무 집중했던 탓인지 야자 감독 선생님이 곁에 있는지도 몰랐다. 덜컥 걸려버렸다. 내 습작 노트는 담임 선생님에게 전달됐다. ‘아 난 죽었구나’ 싶은 생각뿐었다. 다음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꿈이 작가라고 했지? 이런 걸 요즘은 뭐라고 부르나? 우리 땐 하이틴 소설이라고 했는데, 하하하. 재밌게 잘 읽었어. 어쨌든 지금은 고3이고, 수능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니까 ···, 너무 대놓고 쓰진 말어! 선생님 체면도 좀만 생각해주라. 알았지?
담임 선생님이 돌려준 습작 노트엔 빨간 펜으로 맞춤법이 고쳐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간단한 감상평과 함께.

송주홍, 노가다 칸타빌레. p.121


책을 읽다가, 그날의 일들이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고 3 담임의 가장 큰 목표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다. 체벌과 거친 말도 목표를 위해서는 정당화되는 시절도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6시까지 강제적인 자율학습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강제적인 자율학습’이라는 모순된 표현에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 글만 보면, 나도 꽤나 좋은 선생님이다. 실제로 주홍이가 이를 계기로 글 쓰는 작가가 되었다니 뿌듯하긴 하다. 하지만, 난 철학도 소신도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교사일 뿐이었다. 그건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런 교사였기에 훈훈한 일화도 남겼지만 마음의 상처도 남겼다.

반장 선거에 출마한 주홍이를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선을 그었던 것이다. 학년부 방침이라며 변명을 하긴 했지만, 그 사건도 주홍이에게는 사회의 부조리를 경험하게 한 잊지 못할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런 상처보다는 고마움이 컸기에, 직접 찾아와 책을 건네주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주홍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작년에는 3학년 부장이었다. 나는 진학 실적에 연연하며 또 한 해를 보냈다.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학교 현실 안에서 입시라는 현실에 휩쓸려 다녔다. 그게 나에게 닥친 엄연한 현실이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 하며 그 어느 해보다 좋은 실적을 내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남는 건 잠시 동안의 휴식과 함께 찾아 온 뻥 뚤린 허무감이다. 그래서 남는 짬을 이용해 글을 쓰면서 허무감을 채워나가고 있다.

주홍이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내가 주홍이에게 배워서 '브런치 글쓰기'에 글을 쓴다. 일단은 100개의 글은 채우는 게 목표다.


꿈찾아 칸타빌레


학교는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중 하나이다.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느린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곳으로 평가받는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이러한 현실을 피부로 느낀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사회 주요 기관들의 변화 속도를 자동차의 속도에 비유했다.


“기업은 시속 100마일,
시민단체는 시속 90마일,
가정은 시속 60마일로 변화하지만,
노동조합은 시속 30마일,
정부 관료조직과 규제 기관은 시속 25마일,
학교는 시속 10마일로 가장 느린 변화를 보인다.”


그는 학교를 대량 생산 체제에 맞춰 설계된 공장에 비유하며, 이러한 낡은 교육 체계가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적응할 인재를 길러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요구하는 인재상도 계속 바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 변화하지 못하는 한국교육에 대한 일침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또한 앨빈 토플러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목소리는 점점 커질 것으로 믿는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의 시선도 바뀌고 있으며, 교육의 본질에 대한 고민도 더 늘어난 듯 하다. 여전히 대학 입시라는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교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으니 다행이다.


여전히 아이들은 수많은 수행평가로 허덕이고, 내일 모레 있을 중간고사 시험 때문에 초긴장 상태이고, 학교수업만으로도 부족해 학원도 또 가야하지만, 또 자습 시간이면 꾸벅꾸벅 졸면서 꿈을 꾸지만 말이다.


'칸타빌레'는 '노래하듯이 부드럽다'는 뜻이다.

힘들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또 다른 꿈들'을 잘 찾아가면 좋겠다.


송주홍의 책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23화'구지가'의 재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