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쓸모 : 문학 9 문학과 심리학
내가 살던 청양, 산골 시골집에서는 유난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 하늘을 쳐다보면서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도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를 다 외워보려고 노력했고, 그 시를 대입 면접 당시에 유창하게 낭송을 했다. 면접 당시 교수님이 환하게 웃어주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작문의 이론과 실제라는 수업에서는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교 현장에서도 윤동주의 시는 단골로 소개된다. '서시'와 '별 헤는 밤' 그리고 '십자가' '쉽게 쓰여진 시' '자화상'등이 자주 소개된다. 그리고 '또 다른 고향'도 자주 언급되는 시이다.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부끄럼'이라는 말이다. 윤동주는 거의 모든 시 안에 이 '부끄럼' 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을까?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면 윤동주는 유난히 '초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자아(superego)'란 무엇인가?
한편 '초자아'는 양심과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초자아의 원형은 자아에서 출발하지만 성장 과정 중에 학습과 경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어린 아이의 초자아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대개 양육을 담당하는 부모이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전달하는 수많은 메시지가 아이의 초자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초자아는 끊임없이 우리를 질책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르게 살 것을 독려한다.
유범희, 『다시 프로이트, 내 마음의 상처를 읽다 』p.32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는 초기의 '지형이론'에서, 점차 '구조이론'으로 변화된다. 위 그림은 그 변화 과정은 물론, 프로이트가 말하는 정신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지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자아인 '에고(ego)'와 원본능인 '이드(id)', 그리고 초자아인 '슈퍼에고(superego)'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인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드'와 '슈퍼에고'가 과잉 활성화되면 삶의 균형이 깨져서 비정상적인 신경증 상태인 '불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한 심리 상태가 되면, 이를 해소할 '방어기제'를 만들게 되는데, '회피'와 같은 좋지 않은 방어기제를 활성화하기도 하지만, 윤동주와 같이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 지점에서 예술작품을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비평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가 마련된다. 예술작품들은 예술가들의 심리들이 변형되어 표현된 것들로서,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텍스트)들이라는 것이다.
윤동주의 초자아와 부끄러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초자아(superego)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형성되는 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서 전능감을 느끼던 시절을 지나, 경쟁자인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와 금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칫 아버지의 미움을 받으면 거세되고 추방당할 수 있다는 불안때문에 권위에 복종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 형성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매우 엄격한 아버지를 만나면 누구보다 강한 초자아가 형성될 수 있다.
윤동주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철저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 지역의 유지이자 교회 장로였다. 외삼촌인 김약연은 명동 학교의 교장이었다. 윤동주는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영향 아래 몸가짐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어릴 적부터 절대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늘 의식하면서 경건한 삶의 자세를 갖도록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신주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는 경험과 함께 원죄에 대한 인식과 소명 의식을 드러낸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윤동주 '또 태초의 아침'
당시로서는 신기한 문명의 상징인 전신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그런 말씀 안에서 땀을 흘리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그가 흘리고 싶었던 땀은 일제 강점기에 문학을 통해서 '등불을 밝히고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아들이 문학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식인임에도 사회에서 무기력한 본인과 달리, 아들은 의학 공부를 해서 떳떳한 가장이 되기를 기대했다. 할아버지 윤하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주는 문학을 통해 시대정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꺽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한없이 순종적이었던 동주는,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서는 한치의 양보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에게는 이 당시의 고집이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말하는 '양가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두 가지 마음이 '보내주신 땀내 나는 학비봉투'에 잘 드러난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먼 일본 땅에서 철 지난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듣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또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학비를 보내주느라 고생하는 부모님, 그리고 빼앗긴 조국의 현실 속에서 너무나 안일하게 사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초자아가 강한 윤동주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촌이었던 송몽규와의 비교와 열등감도 '초자아'와 '부끄럼'을 형성하는 원인이었다. 송몽규는 천재였다. 너무나 쉽게 전교 1등을 하고, 금방 작성해 제출한 원고는 떡 하니 신춘문예에 당선되니, 더 열심히 노력해도 성과가 초라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 한편, 송몽규에 대한 질투와 미움의 감정이 들면서 그가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초자아'는 그런 감정을 질책하는 양심의 소리를 만들었다. 특히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그는 복잡한 양가감정으로 미안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동주의 시에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초자아'의 정체와 '부끄러움'의 원인이다.
'초자아'로 인한 불안이 위대한 시를 낳았다.
윤동주는 '초자아'를 지향하는 삶을 원했다. 하지만 그런 삶은 결코 편안한 삶은 아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원하지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는 다분히 과한 신경증적인 집착과 불안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과잉된 초자아와 불안은 위대한 작품을 낳는 원동력이 된 것이 분명하다.
윤동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정신의 구조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그가 프로이트에 대한 공부를 했다는 말은 찾을 수 없었지만, 시기적으로 윤동주가 프로이트 이론을 배웠을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다. 이는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에 가장 잘 드러난다.
고향에 돌아 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시의 화자는 '아름다운 고향'을 추구한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해석도 가능하고, 정신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그리고 역사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또 다른 고향'은 천국이자, 마음의 평안인 동시에 조국의 해방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위 시의 구조는 간단하다. '나'와 '백골'과 '아름다운 혼'의 갈등과 대립이다. 당연히 '백골'은 '이드(id)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혼'은 '슈퍼에고(superego)의 상장이다. '나'는 에고(ego)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시적 화자는 본능에 충실한 '이드(id)의 욕구들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지나친 '초자아'를 지향하는 자신의 삶에 지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과 함께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미움과 원망,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동주의 '초자아'는 이런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시 철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어둠을 짖는 개는 '초자아'의 변형된 상징이다.
이러한 강력한 '초자아'는 고향에 돌아와 혼자 있는 방 안에서조차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다.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부끄럼'이라는 말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고, 윤동주의 시를 정신분석적으로 비평을 하면, 시의 내용이 너무나 명백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