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할 수 없는 관찰자

야한 소리나 하고 다닌다고 직장에서 잘렸는데도...

by 발검무적

프랑스의 남부지방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연히 돈이 부족하니 4살 때, 남동생이 태어나자

그나마 조금 사정이 괜찮은 할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졌다.

7살에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제대로 가지고 놀 장난감도 살 돈조차 없는 가난은 여전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객지로 나가

생활전선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철도 막노동 등을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학구열이 뛰어난 청년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19살에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근로 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였고,

졸업 후 초등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 후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중학교 화학교사가 되었고

다시 4년 후에는 고등학교 물리교사가 된다.


그렇게 그는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 관찰을 꾸준히 하면서

28년 동안의 긴 집필기간을 거쳐

<곤충기>라는 일생의 대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장 앙리 파브르(Jean Henri Fabre)

아무도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책이름만은 모두가 다 아는,

<곤충기>의 저자이다.


그가 그저 가난한 유년기를 극복하고 교사로서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면서도

노력을 기울여 위인이 되었다,

정도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다.


사실 파브르를 가장 괴롭혀 온 건

가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편견과 싸워야만 했다.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엄청난 실패의 연속을 의미한다.


내가 실패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이상한 눈으로 손가락질하는 주변의

수많은 이들의 시선과 비난을

견뎌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일해야 했던 동료 교사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이 관찰을 위해 고이고이 키운,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땅 주인이

모조리 베어버리는 일을 당했을 때도 그는 좌절하고 분노했다.


다 큰 어른이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만 보는 모습에,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도 했고,

벌의 귀소본능을 실험하기 위해 멀리 나간 뒤

벌을 어지럽게 해서 방향감각을 상실시키겠다고,

통에 넣어 빙글빙글 돌리는 걸 보고

미신에 빠져 굿을 지내는 사람이라는 욕을 듣기도 했다.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은 생계가 막막해진 일이었다.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곤충 연구를 지속해오던 그는 교회의 요청으로 시민을 상대로 식물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식물은 암술과 수술로 수분(꽃의 수정)한다'는 원리를 설명했더니,


"신성한 교회에서 어떻게 그런 부도덕한 말을 할 수 있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 일로 해고당한 그는 동네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쫓겨난 파브르는 1879년에 세리냥의 아르마스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집 앞은 넓은 벌판이었는데,

넓기만 하지 엉겅퀴와 수레국화 등 온갖 잡초만 무성했던 곳인지라 농사용으로는 쓸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파브르에겐 넓은 자기 땅에서 남들의 방해 없이 온갖 곤충 연구를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곳인지라,

단숨에 헐값으로 땅과 집을 사버리고 세리냥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 쓸모없는 땅에 아르마스(harmas: 황무지, 불모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1885년에 첫째 아내 세자린을 병으로 여의고 난 후, 집 근처에 무덤을 마련하여, 틈만 나면 아내 무덤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과 단절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28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거쳐 <곤충기>를 출판했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그 당시에 있던, '모든 곤충학의 정수'라고

불릴만할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세밀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파브르는 다시 급격히 인기를 얻게 되고, 1910년에는 파브르 후원회가 설립되며,

스톡홀름 학사원에서는 린네상을,

프랑스 정부에서는 레종 도뇌르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는 등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노벨상도 몇 번 후보에 오르지만 수상하진 못했다.

<곤충기>를 쓴 업적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장수했다.

그 시절 기준이 아닌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도 아흔이 훌쩍 넘는 나이까지 살았다.

그러나 그의 긴 인생을 생각해보면,

그는 어렵게 교사생활을 한 것도 부족해서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으며 직장에서 잘리고,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


자신이 속한 직장에서 잘리고 그 일이 파급되어 마을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생계를 이을 수도 없고

원래 살던 지역에서 살 수도 없었음을 뜻한다.


그가 뭘 잘못한 것인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외골수에 내성적인 성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에 자살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좌절하여 자신이 하던 일을 접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자신을 비난할 일이 없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사들여

그곳에 집을 짓고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연구와 집필로 보냈다.

아내가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고서도 아내의 무덤을 매일 찾아 중얼거리는 것으로 소일하며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작업이 인정받고

그가 세상에 인정받은 것이

그가 세상을 뜨기 20여 년 전이었으니

그야말로 말년의 말년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70이 넘어서야 자신의 연구를,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인정받게 된다.


당신이 한창 일하고 뭔가 나래를 펼쳐야 할 때

지독한 편견과 비난에 세상 끝으로 몰려

황무지를 구해 그곳에 집을 지어 세상과

자의 반 타의 반 격리된다면

당신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편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30년이나 하면서

묵묵히 10권의 책을 써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죽기 전 20여 년 동안

기어코 그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인정받고 칭송받았다.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빛을 본 예술가들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 솔직히 대놓고 묻자.

당신에게

70이 될 때까지

인정받지 못할 테니

그때까지 세상과 단절되어

당신만의 세계에서

당신만의 연구와 집필을 지속하라면

당신은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지금 느끼는 실패가

그 허망한 좌절감이

결코 70이 되도록 제대로 경제생활도 할 수 없었던

파브르만 하겠는가?


견뎌내라.

이겨내라.

당신의 그 삶의 끝이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줘라.

결코 그들에게 무릎 꿇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