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실조로 말랐고, 외모 콤플렉스까지 있었는데,

전 세계를 대표하는 만인의 연인이 되다.

by 발검무적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 트라 여남작(Ella barones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재혼이었고, 심지어 어머니에게는 먼저 태어난 아들 두 명이 있었다. 이 이혼 커플은 영국 회사의 벨기에 지사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그녀를 낳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에 정식으로 이혼한다.


별거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로 이주한다.

이 시골에서 그녀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중간에서 큰 피해 없이 넘어갔던 네덜란드였지만, 독일군이 그 중립을 무시하고 프랑스 침공을 결정하게 되면서 네덜란드는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 판무관은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그녀의 외가 역시 귀족 가문의 체통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이 버텼다. 그녀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 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은 그녀의 외가가 갖추고 있던 부와 명예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종전 후 그녀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발레 학교에 다니며 수석 발레리나를 꿈꾸던 어느 날, 그녀는 발레 선생님에게 "키가 크고 몸에 근육량이 너무 적어 발레리나로는 어울리지 않아."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그 말에 그녀는 발레리나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연극 무대와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연기를 시작하게 된다.

전설적인 할리우드 배우이면서 에미상 ∙ 그래미 어워드 ∙ 아카데미상 ∙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이며,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여배우였던,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오드리 헵번,

본명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의 이야기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녀의 부모는 한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이혼 커플에, 결국 그녀가 10살에 또 이혼을 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었지만, 아이의 가정교육만큼은 제대로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은행가로 켈트족의 고집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물론, 계속 함께 살았던 어머니 엘라 판 헤임 스트라는 네덜란드 귀족 출신으로 근면, 자기 수양, 이해심을 핵심으로 하는 캘빈주의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크리스천 사이언스(1866년에 설립된 미국의 종교단체)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그저 선생님의 한 마디에 발레리나의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분석하고 고민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발레를 그만두면서 자신이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는 길로 연기를 선택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마르셀 달리오가 한 말을 평생 자기 삶의 철학으로 삼았다고 한다.

“너의 본능을 따라라. 옳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다”


이 말은 그녀에게 자신감과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였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핵심가치를 위해 자신이 소유한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그녀는 세기의 스타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그녀의 끝없는 도전은 여느 스타들처럼 어느 정점을 찍고 사그라드는 별똥별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인물 포토그래퍼의 거장, 유서프 카쉬의 사진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었다가, 좌초되고 나서 조지 스티븐슨에게 한번 프로젝트가 넘어간다. 그런데 스티븐슨마저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을 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연극배우로까지 캐스팅 등급이 떨어지게 된다.

처음 헵번을 만난 와일러는 그녀의 체형이 곱게 자라온 공주이자,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에 딱 어울린다며 주연을 바로 제안한다. 연극배우로서 어느 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작을 만나게 된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배우 상영회를 마친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고는,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한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대스타로서 급부상하며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정작 그렇게 만인의 연인으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는 평생 20번의 배역에서 주연만을 연기하다는 기염을 통하고 은퇴작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Always'에서 천사 역을 마지막으로 은막에서 은퇴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 2막을 아주 독특하게 시작한다.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며, 유니세프 기부금을 기존의 몇 배나 증액시키는 등 자선사업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은 세계적인 찬사를 받게 된다. 그녀는 경련성 고통으로 배를 움켜잡고서도 쉬지 않고 활동했다. 제3세계의 전쟁과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고통의 현장에서 삶을 함께 한 그녀의 선행은 전 세계인들에게 큰 의미를 남겨주었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새삼스레 그녀와 같은 세계적인 스타에게 무슨 실패가 있었느냐는 우문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갖춘 귀족 가문의 손녀딸이었고, 재정적으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렸어야만 했고, 그 후유증은 그녀의 몸에 평생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이었던 어머니가 가정부일까지 해가면서 레슨비를 댔던 발레의 꿈을 과감히 스스로 접게 된다.

그렇게 선택한 연기자로서의 꿈은, 그저 우연히 그녀를 길거리 캐스팅으로 스타로 만들어주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드리 헵번이 연극무대에서 주목을 받게 된 첫 작품, '지지(Gigi)'는 프랑스 소설가 콜레트의 소설이다.

그 작품의 주인공의 대사 중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일류 보석이 될 때까지 기다려라.
너의 이상을 계속 꿈꿔라”
중년의 오드리 헵번

그녀는 꾸준히 준비했다.

수석 발레리나를 꿈꾸던 그녀가, "근육도 없고, 키만 삐쭉하게 크고 말라서 발레리나로서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선생님의 말이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발레를 과감히 접었다.

글래머가 대세였던 당시 여배우계의 풍토역시 발레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국어였던 네덜란드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세계적인 배우로서도 그러했지만, 유니세프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의 다국어 구사능력은, 유니세프의 기부금을 기록적으로 증액시키는 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작인 영화 '로마의 휴일'에 캐스팅된 이유는, 앤 공주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귀족적이면서도 마르고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감독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녀의 체형은 발레를 할 때도, 그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될 때도 심지어 그녀가 늙어서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녀만의 체형이었다.


이전에 그 이유 때문에 안되었던 것이,

그 이유라서 되는 경우가 분명히 생긴다.


당신이 느끼고 있을 콤플렉스가

당신만을 돋보이게 할 그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물론 당신이 전혀 동의할 수 없겠지만

세상은, 현실은

늘 당신의 불만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세상의 기준과 잣대는 그때는 틀리지만 나중에 맞게 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변하는 것과 무관하게

변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당신이 노력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그 콤플렉스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갖추기 시작한 것들은 결국 당신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타이밍에서라도 튀어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당신의 삶을 더 윤택하고 고상하게

고양시키는데 한몫을 하게 될 것이다.


1993년 오드리의 사망 관련 기사들이 신문 지면을 메웠을 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는 이렇게 그녀를 기렸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매력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이 있었다. 모든 역할을 통해 그녀는 연약함과 자유분방함, 그리고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혜를 결합해 우울과 일상성을 초월했다.”


당신의 삶의 저 마지막 끝에,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삶을

존경하는 삶으로 기억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지금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경주하는

당신의 땀이고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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