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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20. 2021

돈 없는 집 아들이, 학벌도 없고, 파산까지 해놓고는.

전 세계 어린이들의 가장 친근한 아저씨가 되다

190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캐나다에서 이민 온 아일랜드계 빈농이었다.

10세 때는 생계 문제 때문에 가족이

미주리 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사 실패로 다시 농장을 팔아 캔자스시티로 이주했다.

돈 문제로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진 못했으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림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그림으로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는 트럭 운전수로 일하기까지 하였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창업자이며 애니메이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장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

전 세계 대중문화의 상징 중 한 명이자 미국 문화의 전설로 평가받는 바로 월터 일라이어스 디즈니 (Walter Elias Disney)의 스무 살 이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최근 개봉한 '블랙 위도우'를 포함한 어벤저스 시리즈를 만든 영화사가 디즈니다.

그가 영화 업계와 세계 오락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현재도 방대하게 남아있다.

<새러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를,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평가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 지는

"아마도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대를 맞으며 그는 컷 아웃 애니 제작으로 애니메이션계에

뛰어들게 된다. 이 시기 친구이자 천재 애니메이터 어브 아이웍스와 인연을 맺어

1922년 '래프 오 그램(Laugh-O-Gram)' 사를 세워 <신데렐라>나 <잭과 콩나무> 같은 명작동화 단편 애니 6개를 제작하고 혼자 뉴욕에 가서 1만 1천 달러를 조건으로 배급업체에 팔았으나, 계약금 100달러를 받은 채 회사가 도산하고 만다.

이후 그는 어브와 헤어져 뉴스영화 카메라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실사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진출했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애니메이션 하나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세웠고,

실사-애니 합성 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해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 시기부터 월트는 사업 및 제작에 전념하고

어브를 총 작화 감독으로 다시 불러서 작화를 맡기도록 했다.


이제 잘 나가기 시작하는가 싶었다.

1927년 대형 영화사 유니버설 픽쳐스의 발주로 만든 오스왈드 래빗이 예상외로 인기를 끌게 되자,

배급사였던 유니버설 픽쳐스는 그 캐릭터를 빼앗아버리고 만다.

이에 월트는 '두 번 다시 딴 회사 하청 안 맡겠다!'라고 다짐하고는 어브와 함께 오스왈드를 손봐 미키마우스라는 캐릭터를 만들게 된다.

이미 워낙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던 그였지만,

그 정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디즈니랜드'의 건설 비화에서 터진다.

 

월트 디즈니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건설에 필요한 돈을 빌리러 은행을 찾았지만 그만한 거액을 꿔줄 리 만무했다.

그는 건설자금의 투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무려 302번이나 거절당했다.

어느 정도 애니메이션으로 자신의 입지를 갖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꿈을 이루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목표를 전달하기 위해 '디즈니랜드'라는TV프로까지 만들어서 열정적으로 알렸다.

구상을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303번째 투자 요청에 도전했고, 드디어 자금 조달에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놀이동산의 대명사, '디즈니랜드'가 캘리포니아에 만들어졌다.


그림을 10년 넘게 담당해주던 어브와도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별하게 되고

수많은 부침과 실패를 계속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배급사와 갈등이 생기면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여 더 나은 조건에서 배급사를 옮겨가며 중편에서 장편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시장을 넓혀갔다.


1934년 장편 영화의 제작에 뛰어들어 1937년까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제작에

올인을 하는 도박을 감행한다.

제작 당시 주위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고 실제로 빚더미까지 올랐으나,

개봉 후 흥행성적이 8백만 불에 달해 한 방에 빚더미를 말끔히 청산하고

직원들에게 체불되었던 임금도 모두 해소하게 되고

무엇보다 디즈니 프로덕션 역시 우량기업으로 등극했다.

이후 버뱅크로 스튜디오를 옮기고

기어이 1940년 '브에나 비스타'란 자신의 배급사를 세운다.


'정글북'을 제작하던 도중, 폐암이 발병해 병원에 입원해 폐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의 성격 때문인지 불철주야로 일한 탓에 회복이 더뎠다.

그렇게 1966년 자신의 생일을 지나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65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유언으로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기억하기 위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 달라"라고 하여,

시신은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누군가 개척해놓은 시장을 파고드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시작해보지도 않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시장을 개척함에 있어 미래를 내다보는 눈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월트 디즈니는 TV 시장을 미리 내다본 인물로 유명하다.

아이들의 동화를 애니메이션화 하는 것과 더불어

아이들과 어른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함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방향의 놀이문화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집의 자식도 아니었으며

좋은 대학을 다녀 학벌로 인맥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문화의 정점에 섰다.


가난해도 몸을 굴려야 먹고 살 수 있을 지경이었고

파산을 당했었으며,

조금 잘 나갈만했는데, 자신의 캐릭터를 빼앗겼고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영화 제작에

빚까지 내가며 올인하여 3,4년을 준비만 했다.

그가 겪은 실패와 고난은 일반인들이라면

하나도 겪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는 '미친놈'소리를 들었지만 자신의 고집을

자신의 꿈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꿈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근거 있는, 혹은 주변의 지원자가 많은 경우

확신하는 것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리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노력을 쏟아붓는 것은

'도박'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엄연히 본래의 의미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도박'은, 피와 땀을 쏟아붓지 않는다.

월트 디즈니가 했던 것은,

'도박'이 아닌 '꿈에 대한 투자'였다.

혹여 그가 정말로 끝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가 후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주변에서 모두 아니라고 하니까

이제까지 제대로 된 성공을 이룬 적이 없으니까

당신이 포기하기 위한 핑계는 너무도 많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마라.

당신이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거품처럼 꿈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당신의 강한 의지를 놓지않고

끝까지 정진하는 순간,

결과와 상관없이 당신의 노력과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이들에게

존중받을 만한 가치를 갖게 된다.

성공이라는 결과는 그에 따른 너무도 당연한

부산물이자 보너스일 뿐이다.


월트 디즈니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그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던 사람이라면

그가 실패를 그렇게 쉽게 극복하고

자신만의 꿈을 이루겠다고

정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모든 것을 잃었던

그도 해냈다.

당신이 못해낼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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