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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21. 2021

명문가 출신이 낙제생에, 우울증에 평생 시달리고도...

전 세계가 존경한 정치가로 우뚝 서다.

17~18세기의 영국의 명장이자 초대 말버러 공작이었던 존 처칠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굳이 그 집안의 계보까지 훑을 필요는 없겠으나

혈통과 귀족사회를 원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영국의 문화적 배경으로 본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유명 정치인이었다.

어머니는 월 가의 유명한 플레이어자

금융인이었던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이었다.

정치계와 재계의 전형적인 결합.


어머니는 그 당시의 귀족 부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남편을 정치적으로 보조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아들을 직접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동경했고 더 자주 만나고 싶어 했다.

아쉽게도 어머니의 거부 아닌 거부로 둘 사이의 교류는 주로 편지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모자관계라기보다

정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라고 꼽은 유일한 남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의 이야기이다.


미운 오리 새끼.

그의 유년기를 매우 잘 드러내는 적확한 표현이다.

처칠은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낙제생이었다.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으로,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자주 다투며,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야무지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소문난 낙제생에 문제아였다.

꽃미남이었던 처칠의 젊은 시절 사진.

성적도 하위권이었지만 역사 과목만은 뛰어났다.

해로우 학교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1893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보병이 아닌 기병을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병 지망생에게는 처칠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제 적성을 찾았던 탓인지,

150명 중 8등의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처칠은 쿠바와 인도 등의 임지를 전전했지만 별다른 전공을 세우거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처칠은 승진보다는 종군기자로서의

경력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고 책도 쓰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 특히 1899년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전쟁 영웅으로 각광받았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00년 보수당 후보로 출마, 25살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계에 뛰어들게 된다.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자유당으로 옮겼고, 1906년부터는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 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미운 오리 새끼'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처칠의 할머니조차 "윈스턴 같이 막돼먹은 놈에게 공작위를 줄 수는 없어!"를 외치며 그가 10대 말보로 공작이 되는 것을 막을 정도였다.


명문가에서 낙제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돈 없고 가난한 부모를 두고 생계에 몰린 다른 위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압력을 계속해서 받기 마련이다.


그런 탓이었을까?

그는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중에 처칠에 대한 연구를 한 연구자들의 결론에 의하면 그의 자식 중에 두 명이나 알코올 중독이나 우울증으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한 것을 근거로, 유전적인 요소가 컸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우울증에 시달렸던 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블랙독, black dog)'라 불렀으며, 이 우울증을 완화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국에 가서 첫 백만 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림은 그의 우울증을 덜어주는 데 기여를 했지만,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평생 발코니나 기차역의 철로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우울증이 심해 자기도 모르게 언제 뛰어내릴까 봐 몰라서 도저히 위험한 근처를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 좌절감과 죽다고 싶은 충동을 자신의 이성만으로 이겨냈다.


그런 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한 남긴 말이 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엄청난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크건 하찮건 상관 말고, 명예로움과 분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 경우들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마시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 — 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 —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면,

대부분은 평화상이나 정치분야를 생각한다.

아니다.

그는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배경이 또 기가 막히다.


처칠은 신문에 기고한 많은 에세이와 시사평론은 물론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 등을 집필한 정력적인 작가, 저술가였다.

대표작은 6권 분량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과 카이사르의 영국 침공 시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는 <영어 사용민의 역사>이다.


그런데, 스웨덴 한림원에서 문학상을 수여하면서 설명한 수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 준 탁월함과, 고양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훌륭한 연설’


당시 문학상 후보였던 헤밍웨이는 “처칠은 구어(口語)의 대가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의 취지와 맞지 않다”라고 지적하며 투덜거렸지만, 스웨덴 한림원 측은 처칠의 전시 연설도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설은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성적은 늘 바닥이었고, 중학교 입학시험에도 떨어질 뻔하였으며

제일 낮은 성적으로 턱걸이해서 열등반에 겨우 들어갔고 그 곳에서도 늘 꼴등만 하다가 4번이나 낙제하기도 했다.

그때 그가 국어수업만큼은 제대로 수행한 이유가 이랬다.


"적어도 문장 정도는 쓸 수 있도록 해야지"


당신이 지금 성적이 바닥이라 대학을 제대로

갈 수 없는 성적이라도 처칠처럼 될 수 있다는

헛된 꿈을 꾸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명문가에서 모든 것을 지원받으며

아쉬울 것 없이 큰 그였지만

제대로 된 성적을 받은 것도 성년이 훌쩍 지나서였고

정치인으로 잘 나가던 그 시기에도

늘 죽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라오는

우울증을 눌러야만 했다.


그런 그가 2차 세계대전에서 국민들의 불안을

날려버릴 연설문을 작성하고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성을 부여잡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걸고 격려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의 격려보다

자기 자신의 격려만큼 더 크고 효과적인 것은 없다.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좀 뒤처져있다고 해서

당신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절대로, 절대로 그 어느 한순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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