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돌풍>을 보고 나서...
한때 드라마를 만들며 방송국 밥을 먹었던 사람 입장에서, 그즈음에도 그렇지만 요즘의 작가들 중에서 드라마를 정말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구성하는 작가가 누가 있나 꼽으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한참을 생각하고서도 퍼뜩 거명할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실상이다.
그런 까칠한 내 평가기준에도 불구하고 내가 재미있다고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드라마 작가 중에서, 박 경수라는 작가가 있다.
2012년 <추적자; 더 체이서>로 대박이 난 뒤, 해를 이어가며 2013년 <황금의 제국>을, 2014년 <펀치>를 집필하여 이른바 마니아층들에게 권력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재미를 봤다.
이후 2016년 4월에 <진격>이라는 경찰물로 8월 편성하려다가 엎어지고, 다시 다듬고 다듬어 이보영이라는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법비(法匪)들의 지저분한 세계를 후벼 파는 드라마 <귓속말>을 히트시켰다. 당시 대법원장이라는 빌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가 감방에 가는 이야기를 쓰며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거짓말처럼 1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의 사법농단은 대대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고, 대법원장은 구속기소되었다.
물론 그가 천재적이면서도 타고난 이야기꾼과는 거리가 좀 있는, 매우 훌륭한 드라마 작가가 아니라는 뒷말은 관계자들을 통해서 여기저기서 들어온 터였다.
쪽대본이 심하다는 것이 가장 심한 뒷담화였는데, 쪽대본을 쓰는 대부분의 아줌마 작가들이 스토리 라인이 붕괴되고 부실한 서사에 이어 황급한 마무리로 이어지는 졸작으로 스스로 무덤을 판 것과는 대비되게 그는 쪽대본을 써서 욕을 먹긴 하지만, 그 와중에 이야기의 중심을 무너뜨리지 않고 서사를 완성시키려는 뚝심(?) 같은 것이 있어 일찌감치 내 눈에 들었던 터였다.
그리고 아무런 작품 활동 없던 7년.
그에게 무슨 부침이 있었는지 그 세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에 그는 넷플릭스 시리즈와의 계약으로 <돌풍>이라는 그만의 시그니처 향기를 풀풀 풍기며 설경구와 김희애라는 탄탄한 배우 둘을 앞세워 이야기 꾸러미를 꺼내놓았다.
그가 98년에 작가데뷔를 하고서도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서브작가로 <카이스트>나 <태왕사신기>에서 송지나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뺑이를 쳤다는 사실은 내부자들이나 알 법한 그의 흑역사일 뿐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결국 그가 멋들어진 데뷔를 했고 이제 자신만의 시그니처 드라마를 대차게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마니아층들도 잘 모른다.
정작 <돌풍> 이야기를 하겠다고 간판을 걸어놓고 쓸데없는 작가이야기를 왜 그렇게 길게 늘어놓느냐고 핀잔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돌풍>은 작가 박경수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온전히 그 소용돌이 안에 들어가 오랫동안 우린 진국의 진미를 바닥까지 깔끔하게 오롯이 느끼지 못한다.
카메오라고 보기엔 너무 등장씬도 많고 무게까지 잡아준 박근형이, 작가의 출세작 <체이서>에서 그 어마어마한 재벌 총수의 역할을 해온 것을 보더라도 드라마가 종영한 지 12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에서도, 한국 재벌가의 꼬락서니가 눈곱만치도 변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은유한다.
정치판이 아니라 대놓고 청와대를 무대로 하고, 아예 작은 서사는 처음부터 무시하겠다며, 주인공 박동호(설경구)의 가족사를 접어둔 것도 어지간했겠는가 하는 공감을 불러온다.
기존 박 경수의 드라마의 코어에는 아버지와 딸의 서사가 묘하게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번 신작 <돌풍>에서는 먼저 세상을 바로잡으려다가 죽은 친구를 위한다는 미명하게 그의 아내나 아들은 제대로 명함도 돌리지 못한 채 드라마는 내달린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희대의 법정농단을 부리고 구속기소된 대법원장의 실화가 터지기 1년 전 드라마에서는 법비들의 최고 수장자리라 할 수 있는 대법원장의 비리를 이야기 소재로 삼는다.
<돌풍>의 제작 인터뷰과정에서 작가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믿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현실에서 도저히 이런 초인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자기가 너무도 갈구한 나머지 초인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털어놓았더랬다.
박 경수 작가가 시그니처처럼 드라마에 알 박아두는 식의 습관 중에서 드라마가 끝나도 마니아들에게 남는 묘한 구절이 몇 개 있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 <돌풍>에서 가장 마음에 남아 씻겨 내려가지 않았던 앙금은 바로 "결국 거짓을 이기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더 큰 거짓이다."라는 대사였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못해 관련자들이 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그들의 폐부를 후벼 파고 그 행태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끄집어내는데 묘미가 있다.
빨간당이 나라를 말아먹고 일본이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으며 일본 덕에 근대화를 했다는 어디 차이니즈 타이베이에서나 굴러다닐만한 똥덩어리 같은 사고방식이 버젓이 유튜브가 여기저기 횡횡할 수 있는 이유를 이 드라마는 파란당의 적폐에서 찾아 보여준다.
정의를 부르짖고 독재를 타도하겠다고 머리끈을 질끈 묶고 화염병을 투척했던 운동권이라는 이름을 훈장처럼 다고 감빵에 다녀온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들이, 정치판에 투신하여 과연 정말로 민주주의에 걸맞는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작가는 그들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후벼 파며 되묻는다.
빨간당의 쓰레기짓은 처음부터 의도했고 일관되게 그런 자들이라 그렇다 손 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응징할 수 없는, 적당히 같은 정치판에서 싸우는 척하면서 뒤돌아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동지 운운하는 그 썩은 자들이 젊은 날의 투사 어쩌고 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기만하려는 그 후안무치가 결국 빨간당의 행태보다 훨씬 더 더럽고 역겨울 수 있음을 그들의 현재를 통해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 절대 선은 없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설명된 바와 같이, 더 짙은 어둠과 조금 덜 짙은 어둠만이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빛은 비치지 않는다. 빛을 참칭 하는 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선이 분명하고 악이 분명한 스토리는 의지하기는 편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이제 그렇게 단순 명료하지 않다. 썩은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며 법무부장관에 올라 직접 칼을 휘두르겠다는 자가, 그렇게 깨끗하다고 떠들어댔던 SNS의 글귀들로 만신창이가 되고, 자기 자식들에게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조금씩 선을 넘었던 것들이 결국 썩은 검찰의 입장에서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더럽다고 하는 꼴이 아니냐며 물타기를 해버리기 일쑤가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임을 작가는 다시 환기시켜 준다.
주인공 설경구가 적극적으로 환영받을 선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가장 크고 유일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그 더러움들을 바로잡고 자신이 그 더러움을 안고 사라지겠다고 결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쉽고 부족했던 부분을 언급하자고치면 한도 끝도 없이 지적할 수도 있겠다.
제목을 억지로 끌어내며 독립투사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나 정작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면서 가족에 대해 한 한 번도 조명되지 않는 언밸런스가 그러했다.
그중에서 가장 거슬리고 덜 익어서 떫은맛이 우러나왔던 것은 어쭙잖은 성경의 인용이었다. 골고다의 언덕을 홀로 올라야 했던 예수를 언급하고, 그 새벽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결국 초대 교황이 되었던 베드로를 언급하는 부분은 겉도는 것을 뛰어넘어 오히려 반대편의 잘 익은 부분이 상한 것이었나 의심을 할 정도로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경수는 방송일정이 정해진 방송사의 드라마 방식에 쪽대본을 쓰지 않았던 대신 OTT의 사전 제작 방식을 충분히 활용하며 이번엔 몸살이 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시그니처 그대로를 <돌풍>에 녹여냈다. 아마도 운동권이랍시고 정치권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속이 쓰렸을지도 모르겠다. 전대협 회장이었다가 변변치 못하게 뒷돈이나 챙기는 남편을 자살로 몰고 가는 여성 정치가의 모습에서부터, 전노조의 협회장이랍시고 자기 자식 유학 비용으로 쓰겠다고 횡령을 해서 덜미를 잡은 자, 자기 배를 불리겠다며 검찰에서 선후배를 강조하고 뭉쳐야 한다는 개소리를 하고 칼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자, 대통령인 남편과 상관없이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자식이 싼 똥을 치우겠다며 스스럼없이 전 영부인이라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박경수의 드라마가 더 이상 드라마이지 않다는 점을 알만한 자들은 모두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오롯이 느끼며 봐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드라마는 뜨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박경수의 드라마는 또 '개돼지'라 불리는 이들의 사이사이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마니아층들에게 어필하며 그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더 매끄럽고 더 새롭고 더 날카로우며 그저 얼얼하기만 한 마라가 아니라 새콤달콤한 고추장의 감칠맛이 도는 수준으로 절차탁마해야 하는 것은 역시나 그의 몫이니 기다리는 즐거움을 남겨두기로 한다.
내 매거진 중에 <누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있는가>라는 꼭지가 있다.
드라마에서와 같이 그저 인력으로 동원되는 개돼지들이 광화문이나 서초동, 혹은 청와대 앞을 장악했답시고 언성을 높이고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그들이 왜 개돼지라 불리는지 그 개돼지를 누가 어떻게 부리는지 이 드라마에서는 아주 적나라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사회판의 상위 버전(자칭 상류층이라 짖어대는)의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되시겠다.
내 소개를 받고 권력 3부작에서부터 다시 정주행을 시작한 함께 침대를 쓰시는 분은, 이제 박 경수의 팬이 되어버렸다.
TV만 틀어도 이젠 짜증을 넘어 이 나라가 조만간 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금의 대한민국에 염증을 느낀다면 아주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기기엔 그만인 드라마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내가 한 달 여전에 드라마가 나오자마자 그렇게 멍하니 빠졌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