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항일투쟁열사기(抗日鬪爭烈士記) - 21

일본 국립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 2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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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중국학회의 주최자가 된 중국문화론 연구실은 이것저것 일로 바빴고 10월에 개강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딱 정해진 개강일도 없이 그저 10월 9일부터 3일간 이어지는 학회준비로 다들 이리저리 분주했다. 뭔가 돕고 싶다고 말을 꺼냈지만 오 영희나 다른 학생들이 일감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님입장으로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있어 학회일을 돕는 것은 아르바이트의 일환이었다. 일본대학의 방식이었다. 학생이라고 학교의 잡무나 일을 돕는 것은 철저하게 시간제로 계산하여 그들에게 일당 혹은 시간당으로 지급되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서른이 훌쩍 넘도록 학교에서만 있었던 동민의 눈에는 마치 밖에서 하는 아르바이트의 연장선상에서 학교의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본학생과 특히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한국과 중국 유학생들의 모습이 그다지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콘니치와(안녕하세요)”


어색하기 그지없이 뭉그러진 발음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굳이 발음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옷차림새와 헤어스타일을 보건대 그녀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중국인인가요?”


인사를 하면서도 내심 동민은 놀라는 마음에 표정에도 적잖이 당혹스러움이 배어 나왔을 것이라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었다.


“네. 중국 사람입니다. 당신이 S대학교에서 온 박상입니까?”


어색한 일본어가 자신도 모르게 거슬려서 동민이 바로 중국어로 물었다.


“여기 유학생인가요?”

“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동민의 유창한 중국어 발음에 오히려 중국 여학생이 놀랐다. ‘장따이’라는 중국이름을 ‘초다이’라고 어색한 일본어로 바꾸어 소개한 그녀는 동민의 중국어에 놀라며 마음이 편해졌는지 중국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정작 동민은 그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에 7개밖에 없다는 구 제국대학. 국립대학 중에서도 그 명성을 알아준다는 제국대학의 중국문화론 연구실에 중국인 유학생이 와 있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중국인 유학생이요? 꽤 돼요. 내가 싫어하는 대학 교수 딸이라는 애도 있고, 남편이 일본 변호사인 애도 있고···”


오 영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중국인이 중국문화론 연구실에 그렇게 많아요?”

“왜요? 이상해요?”


오히려 이상한 점이 뭐가 있냐고 되묻는 영희의 말에 동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북경의 이름 없는 대학교수의 딸이었던 초다이는 갓 돌이 지난 아기의 엄마였다. 박사과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석사과정부터 이 연구실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일본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기본적인 회화 말고는 조금만 복잡하거나 이야기가 길어지기만 하면 곤란한 얼굴을 하며 말문을 스스로 막아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아버지가 경기가 좋은 일본에 살고 싶어 하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결혼과 함께 일본에 가서 살 수 있도록 중국의 철학학회에서 만났던 사토 렌코쿠 교수에게 요청을 하여 겨우겨우 유학비자를 딸 수 있도록 부탁을 해준 것이 유학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 부탁에도 뒤로는 상당한 고액의 선물이 전달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을 때, 초다이는 물론이고 사토 렌코쿠라는 교수의 자질에 의구심이 가기 시작한 것은 동민에겐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의구심이 혐오감으로 바뀐 것은 초다이가 석사과정에 입학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고 학교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다가 중국에서 이미 나온 논문들을 짜깁기하여 그것도 일본어가 아닌 자신의 모국어인 중국어로 써서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S대학교 중문과에도 가끔 아주 가끔 중국인 유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만나본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중국의 명문대학 쪽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유학생이 한국 쪽과 비교문학을 전공한다거나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연구를 한다는 학술적인 핑계라도 갖춰 어려운 학계의 취업틈새를 노리겠다는 노림수라도 있는 경우였다. 그런데 이건 그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받는다는 핑계로 한국에 들어와 돈을 벌고 있다는 수많은 중국학생들의 경우, 지방의 전문대학에 한정된 사실이라는 것을 시사 프로그램의 보도를 통해 본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일본의 국립대학이자 7개밖에 되지 않는 구 제국대학의 하나가 아니던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동민은 자신이 혹시라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이한 점은 그런 이상한 루트로 입학하여 유학비자만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본에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참으로 신기하게 모두 여자만이 통과가 되었고 중국문화론 연구실의 8명이나 되는 교수 중에서 있는 유독 동민의 지도교수를 자청한 사토 렌코쿠 교수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다이뿐이 아니었다. 오 영희도 자신에게 있어 이곳의 박사과정생으로서의 입지는 자신이 S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동민과 그다지 차이가 있지 않다는 묘한 자부심을 수시로 뿜어대는 것이 느껴졌고, 다른 몇몇 중국여학생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의구심은 영희의 부풀려졌던 그곳의 설명과 전혀 다른 현실들을 확인하게 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거의가 동경대 출신이라던 연구실의 교수들은 정확히 3명뿐이었다.


그나마 사토 렌코쿠는 동경 외국어 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교에 편입을 했던 학력세탁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 지방 국립대학의 교수가 된 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사토 렌코쿠는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 학력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학계의 다른 교수들이나 사토 렌코쿠의 입을 통해서도 간혹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토 렌코쿠가 동경대에 편입할 때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부러 편입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경쟁률 자체가 없었다는 점과,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내내 지도교수가 그의 학업태도와 실력을 인정하지 않아 그를 자신의 라인에서 배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영희가 동경대학이라고 했던 많은 교수들은 이 지방대학 출신 이외에 동경에 소재하고 있는 대학을 나와 저마다 정치적인 끈으로 결탁되어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연히 소개를 받게 된 문재성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다.


“영희 누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문재성이라고 합니다.”


그 연구실에 있는 두 사람의 한국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학부에 재학하고 있던 재성이었다. 재성은 학부 2학년이었다. 부산 출신의 유독 몸이 건장해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동민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의 첫 대사는 바로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담배는 끊었습니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담배를 배웠습니다.’는 들어봤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라니, 그런 말을 버젓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동민에겐 의아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문제아로 공고를 졸업하고 터프한 멋에 복싱을 하겠다고 내내 운동만 하다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부산인근의 요트수리를 배우게 된 재성은 요트를 고쳐서 일본에 직접 타고 배달해 주는 일을 맡았었다.


일본에는 요트가 그다지 상류층 부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했지만, 그런 일본문화에서도 일본인들에게 고가에 해당하는 요트의 수리비용은 상당한 경제적인 부담요소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일본과 비교할 때 터무니없는 낮은 가격에 고칠 수 있는 한국, 부산의 영세한 수리공들이 그들에게는 가장 만만하면서도 효과적인 절약 방법이었다. 그렇게 일본과 인연이 된 그는 주워들은 생존 일본어로 몇 마디를 알아듣고 대답하는 생활을 연명하다가 자신의 무지와 가방끈에 한계를 느껴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어 졌고 그렇게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다가 동경이나 오사카 등의 대도시의 근사한 국립대학은 자신정도의 실력으로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영희와 비슷한 생각의 전철을 밟아 이 먼 지방의 국립대학을 노려서 대학시험을 치른 것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일본의 국립대학은 아예 외국인 정원을 따로 두고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지방 국립대의 경우는 외국인 정원은 터무니없는 지원미달이 되는 경우도 나올 정도였다. 오 영희 같은 인물이 제대로 된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대강 받은 일본의 편입대 학사학위로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치였다.


“괜찮으시면 저한테 공부 좀 가르쳐주세요.”


그래도 재성은 운동을 했던 탓인지, 같은 남자라서 편했던 것인지 아니면 S대 출신의 연구실 선배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민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 좋았던지 동민을 잘 따르는 듯했다.


“언제라도 괜찮아요. 난 특별히 지금 하는 것이 없고 연구생의 입장이니까 시간정하고 공부하죠 뭐.”

“아, 형.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 형이라니.’


동민의 얼굴이 약간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나이가 8살이나 차이나는 그것도 한국에서는 학부생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했던 터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형이라니.


“그래요. 다음에 보면 그때부터 말 편하게 하도록 하죠 뭐.”


그렇게 재성까지 만나고 나니 대강 이곳으로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나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실력을 알만했다. 그래서 동민이 다음 단계로 찾은 것이 이 대학에 와 있던 교환교수와 현직 한국인 교수였다. 정보도 필요하긴 했지만 이곳에서 3년 이상을 지내기 위해서 인사를 해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학부에는 유일한 한국인 교수가 있었다. 대강 그의 프로필을 인터넷의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했다.


이름 권 영석.

나이는 40대 중반. 한국의 한 지방 듣보잡 시립대학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으로 와서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1998년에 임용된 인물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주 전공이 한국의 식민지시대 연구라는 점이었다. 그에 대한 학술적인 정보가 워낙 없어 이것저것 긁어모아 살펴보니 ‘일본과 한국의 역사비교연구’라던가 문학 전반 등등 일본과 한국의 비교할만한 것은 모두 주워 모아 닥치는 대로 식민지사관에 대해서 한국인 전문가인 양 행세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역사학이나 사회학에서 제대로 된 식민사관을 밝혀내는 학자는 본 적이 있어도 한국 사람이 식민사관의 긍정적인 측면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연구랍시고 내놓고 그 태도로 교수까지 된 경우는 처음 접하는 터라 조금은 놀라웠다.


그의 연구실로 처음 동민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한번 자신의 연구실로 찾아오는 일본인들에게 배운 말뿐인 격식은 잊지 않고 챙겼다. 하지만, 천상 한국인이던 동민이 당장 ‘언제 찾아뵈면 좋을지 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더욱 놀라는 눈치였다. 결국 억지 약속이긴 했지만 동민은 그가 알려준 연구실로 찾아갔다. 연구실이라고는 했지만 강사들의 대기실 같은 공간에 그가 앉아 있다고 동민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S대에서 온 박동민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권영석입니다. 지금 학생... 신분이십니까?”

일본인만 동민의 신분이 궁금한 것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예. 한국에서는 강의하다가 이곳에서 새로운 분야로 더 공부하면서 박사학위로 하나 더 딸까 싶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동민의 자신감 차 있는 표정이 영석에게는 영 마뜩지 않았다. 전혀 학생 같아 보이지 않아서 물었던 것이었는데 자신이 한국에서 이름도 없는 지방 사립대 출신이라는 것을 굳이 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이 묻어났다.


“그래서···나한테 뭘 물어보실 게 있나요?”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인사도 드리고 제가 아직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어로 2년 이내에 박사학위 논문도 쓰려니까 여러 가지로 도움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다짜고짜 자신에게 뭘 원하냐고 묻는 영석의 표정을 보면서 첫인상에서도 느꼈지만 동민은 실망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현지의 일본인 교수들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까지도 실망의 연속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곳까지 와서 공부하고 학위를 따고 교수까지 된 사람이라면(물론 정교수가 아닌 조교수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실력도 그렇고 인정할만한 부분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 내가 뭐 그런 쪽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리고 쥬타제도가 있으니까 혹시 연구실에서 지도교수가 쥬타를 설명해주지 않던가요?”

“쥬타요?”


동민은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일본어로 논문을 쓴다던가 생활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는 제도인데, 혹시 연구실의 지도교수가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 내가 우리 연구실에서 한국어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을 소개해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르바이트 비도 나오거든요. 그런데 지도교수가 누구신가?”

“사토 렌코쿠 교수입니다만, 여기 온 지 열흘이 지나도록 아직 강의도 시작 안 하시고 공부도 아직 정식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어서 연구생 입장으로 어떻게 공부하고 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연구실의 학생들이 잘 나오지도 않고 여러 가지로···”

“아아··, 사토 렌코쿠 교수. 잘 알아요. 무슨 한국 드라마만 매일 보고, 드라마 볼 시간도 없다고 구시렁거린다고 같은 연구실의 유하즈 교수가 나한테 그러던데···, 어떻게 그런 교수한테 배정이 되셨나. 뭐! 하긴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니까, 여기서 지내면서 하소연하고 같이 술이나 마시고 할 만한 친구라면 내가 소개해 줄 수도 있는데 우리 연구실에 청강생으로 온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S대 출신이라고 하던데···, 강의도 하다가 왔다고 그러고.”

“예? 실례지만 그분은 누구신지···”


물론 대학 동문이라고 해서 이름만 들어도 모두 알 수는 있을 리가 없었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학교의 라인을 통해서 혹시라도 동문 중에서 여기 나와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다 알아보고 수소문을 해본 터라 처음 듣는 사람이 와 있다는 것이 동민에게는 의아했다.


“내가 연락하라고 일러두리다.”

“그러면 선생님 연락처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수첩과 볼펜을 내밀자 영석이 차분히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나갔다.


“그러면 언제 한번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수첩을 받으며 동민이 예의를 갖추자, 영석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내가 워낙 바빠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어색한 인사를 끝내고 강사대기실을 빠져나오며 수첩에 적인 연락처를 보며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권영석 자택.


‘자신의 연락처를 적으며 ‘자택’이라니, 어째 이런 수준의 것들밖에 없는 거냐, 여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S대에서 이 대학에 온 다른 교환교수를 통해서 들었지만 권 영석은 S대 출신이라고 하면 절대로 두 번 다시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3년이 지나도록 동민은 영석에게 매번 인사치레 겸 메일이나 전화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언제나 짧은 형식적인 인사와 핑계뿐이었다. 결국 2년 반의 시간 동안 그와의 식사는커녕 얼굴을 마주쳐도 인사를 제대로 하기가 어렵게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표지사진 설명 :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반한세력들의 앞잡이로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일명 '살아있는 친일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오선화(실제로 그녀는 제대로 된 학위나 그 과정을 밟은 사실 조차 없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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