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항일투쟁열사기(抗日鬪爭烈士記) - 33

구술시험 - 1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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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은 이수해야 할 학점에 대한 의무가 없다.


수업을 들어야 하는 부담이 없다는 것은 논문을 준비할 시간이 많다는 배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일본 국립대학의 문학부에는 인재라고 하는 존재자체가 없어져버렸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을만한 학회지에 3편 이상의 논문이 게재가 될 경우에 한해서 정식으로 학위논문을 청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특별절차와는 상관없이 박사과정 1년 차와 2년 차에 걸쳐 1년에 한 번씩 논문의 진행상황을 제출하는 형식적인 과정이 또 하나 있었다.


동민은 통학금지기간에도 그것 때문에 학위논문을 제출하는 것에 시비가 걸릴까 싶어 사토 렌코쿠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써서 낼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모두 완성되어 오케이를 받은 논문들이 있었기에 그것을 그대로 제출하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더 자료를 보강하고 문장을 가다듬어 11월 말까지라는 기한에 늦지 않게 11월 20일에 정식 제출을 했다. 전년도 1차 논문중간 보고서를 내면서 곁에서 본 상황이 싫어서인 이유가 크기도 했다. 늘 기한의 마지막날의 오후 5시 마감시간까지 달달거리는 일본 학생들의 하는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같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뭔가 집중하고 매달릴 공부거리라도 없으면 미쳐 죽을 것만 같았으니 그로서는 오히려 그것을 준비하느라 집중하는 시간이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어서였다.


반면, 사토 렌코쿠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계획대로 그 어느 하나 진행되지 않은 것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9월에 처음 그 계획을 세웠을 때도 그랬지만 어지간한 학생이라면 지도교수가 그 정도 압력을 넣고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했을 정도라면 자살을 했어도 몇 번은 더 했을 텐데 밟아도 밟아도 돌아오는 정보라고는 동민이 아직도 버젓이 도서관을 매일같이 나오며 공부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조사위원회의 교수들을 만나 밥과 술을 대접하며 이것저것 압력을 넣어보라고 찔러댔지만 돌아오는 피드백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결론뿐이었다.


겨우 직접 연락을 할 기회가 생겨, 고심에 고심을 하고 작성한 협박장이 먹혀서 노트북까지 빼앗았을 때만 해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기대에 마지않았었는데 오히려 그 협박 때문에 긁어 부스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오오하타에게 쓴소리까지 듣고 나니 자존심은 고사하고 기분까지 확 잡쳐버렸다. 자신보다는 훨씬 권력세계의 중심에 더 가까이 서 있는 오오하타의 분석에 따르면, 동민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지도 몰랐지만 일단 협박을 했다는 공식적인 항의까지 받았으니 조용해질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상대를 지치게 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방법도 이젠 쓸 수 없다는 조언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귀찮은 것도 싫고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정도로 중국여자인 코를 챙기는 것도 바보 같아 보였다. 아내의 정치생활을 위해 현지 변호사라도 알고 지내려면 관계를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뚱뚱하고 짜리 몽땅하긴 했지만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중국 애인을 놓치는 것도 싫었지만 20여 년 억지로 앉아 편하게 버텨온 교수자리를 모두 내던져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렌코쿠는 그렇게 뜨거운 맛을 보고도 시간이 한두 달 지나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자기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와 또 다른 꿍꿍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11월이 지나고 12월 초에 뜬금없이 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동민이 2차 논문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연락이었다. 물론 이전까지의 관계라면 아무런 문제도 될 것 없이 싸인 하나만 하고 대강 넘어가면 그뿐인 과정이었지만, 잊고 있던 동민의 축출계획이 머릿속에서 다시 스멀거리며 그간 자신이 받았던 모멸감과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자존감이 다시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이거다, 하는 생각에 그는 쾌재를 불렀다. 결국 동민이 공부 하나밖에 모르던 인간이라는 점에 착안하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동민은 굳이 한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를 더 하겠다고 이 먼 일본까지 온 인물 아니던가? 결국 공부를 하기 위해 왔고, 가장 기본적으로는 박사학위를 따지 않으면 그가 이제까지 일본에서 고생한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거품을 물며 항변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때부터 렌코쿠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교무과의 시미즈에게 연락해서 동민에게 다음 주에 구술시험을 치를 테니 장소와 시간을 정해주는 대로 나오라고 통지했다. 그리고 문학전공의 스도우 교수와 자신의 밑에 있는 조교수 곤도에게 재빨리 연락을 취했다. 구술시험이라는 형태를 만들어 내서 동민의 수준이 논문을 제출하기에 결격사유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좌절감을 맛보게 하며 공식적으로 논문을 제출할 수 없도록 퇴출시켜 버리자는 계획이었다. 곤도를 불러 그 계획을 말하면서도 얼마나 신이 나는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스도우 교수에게는 지도교수인 자신이 보기에도 수준미달에 함량미달이라고 말하면 그뿐이었다.


그리고 동민을 구술시험 장소로 불러냈을 때 그것은 모두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토 렌코쿠가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은 동민이 자신에게 늘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이던 이전의 동민일 것이라고 착각 이외에는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박군. 잠깐 밖에서 기다리겠나?”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귀찮아 학교에 나오는 길에 다른 박사논문 준비생인 가토의 논문지도 약속을 잡았던 렌코쿠는 자신이 준비하라고 했던 구술시험의 약속시간이 벌써 되었는지 몰랐다가 강의실로 들어서는 동민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 달 만에 보는 동민의 모습이 예상외로 건강한 것에 놀랐다. 꽤나 수척해지고 몸이 전에 비해 마르긴 했지만 병자의 모습이거나 하루하루 시름거리며 앓는, 이전에 자신의 압박에 내쫓기던 학생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자신의 계획대로 자퇴를 하고 연구실을 떠난 타무라를 생각해 봐도 동민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것만 제외하고는 당당한 그 얼굴 그대로였다. 반대로 동민은 렌코쿠의 피둥거리는 얼굴을 보고는 그간 규칙적으로 헬스클럽을 다니며 정신이 약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모습을 그에게 드러내 보이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박군?”


스도우 교수와 곤도 조교수가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동민에게 아는 척을 했다.


“우리끼리 회의할 게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부르면 들어오지.”


논문지도를 대강 끝낸 렌코쿠가 가토를 내보내고 스도우와 곤도, 셋이서 뭔가 할 말이 있다고 하며 동민이 바로 들어오는 것을 제지했다. 가토는 동민의 얼굴을 애써 피하며 황급히 반대쪽 복도로 사라졌다. 렌코쿠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움직이기는 했지만 함께 대만학회를 참석해서 동민에 대한 누명 증언을 조작하는데 동조했던 입장이라 마주 대하고 인사라도 나누는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자신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대강 함량미달이라고 주장하는 제 의견에 힘을 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차라리 미리 짜고 올 것이지, 렌코쿠의 목소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민의 귀에 쐬기처럼 박혀왔다.

‘역시 그런 의도였구나.’하고 예상했던 대로의 확증을 듣게 되자 동민은 부아가 났다. 어느 나라의 어느 대학에서도 과정 중인 학생을 상대로 시험을 다시 치르느냐고 따지며 ‘구술시험’이라는 말을 꺼냈던 교무과의 직원 시미즈에게도 언성을 높였었지만 시미즈 역시 이전엔 들어본 바 없다고 빠져나갔던 터였다.


“자아, 들어오십시오.”


66년생의 개중 가장 나이가 어린 조교수 곤도가 동민을 불렀다. 곤도는 동경대 출신으로 박사학위도 없는 상태에서 렌코쿠가 동경대 라벨이 있어야 한다는 미명하게 불러주어 어렵게 교수가 된 인물이었다. 불임으로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관계로 두 식구가 시골까지 와서 국립대 교수대접을 받으며 조용히 지내는 것에 만족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자폐적인 성격으로 먼저 지인의 소개로 들어갔던 SONY의 사업부에서 쫓겨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주고 교수로 만들어준 사토 렌코쿠에게 충성을 바치는 전형적인 소극적 성격의 일본 남자였다. 평상시 동민에게 ‘박군’이라는 하대를 하려고 하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마주 대하면 한층 긴장된 얼굴로 ‘박상’이라고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인물이었다.


그런 곤도도 오늘은 단단히 자기 암시를 하고 나와야만 했다. 렌코쿠로부터 자기를 대신해서 동민을 축출하는데 돌격대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제출된 동민의 논문을 렌코쿠의 메모에 따라 이것저것 몇 번이나 읽고 조사하고 트집거리를 잡아 공격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구술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렌코쿠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름 격식을 갖추려 들었다.


“대학원 박사 과정 중인 학생에게 구술시험이라는 것을 치른 예가 있습니까?”


렌코쿠를 비롯한 두 명도 갑작스러운 동민의 도발 같은 질문에 놀라 선뜻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이 구술시험이 형식과 모양새를 갖춰 동민을 내쫓기 위한 빌미를 만들어내자는 사실은 세 사람이나 동민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확인과정일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만, 현재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박군이 연락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차 논문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내가 논문을 지도할 겨를도 없었고, 정식으로 논문을 제출하게 될 경우, 원래 이 세 사람이 심사위원회를 맡기 때문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사위원회에는 정식으로 이 사안에 대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원래는 지금 박군과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되는 입장입니다, 나는.”


렌코쿠의 말도 안 되는 이죽거림을 한참 참고 있던 동민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의 말을 막았다.


“조사위원회의 사안과 본 사안은 상관이 없을뿐더러 이번에 제출한 논문중간 보고서는 이미 올봄에 사토 렌코쿠 선생이 훌륭하다고 교수와 학생들 모두가 있는 곳에서 칭찬까지 했던 그 논문을 보완해서 낸 것입니다.”


렌코쿠는 동민의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보고 딱히 다음 반격할 말을 잊고 말았다. 말을 계속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기에 얼른 자신이 마련한 시나리오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화제를 바꾸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얘기는 여기서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료로 어떤 판본을 썼는지 여기 책을 가지고 왔으니 직접 하나하나 지적해 가면서 설명해 주기 바랍니다.”


동민은 어이없는 렌코쿠의 지적에 할 말이 없었다. 중국 판본 원본이 6권이 넘는데 인용된 출처의 대목을 지적하라는 것은 지금 그 자리에서 책을 한 번에 확인하되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 무조건 그것을 빌미로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건 어차피 원판을 찾으면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 이후 제출하겠습니다.”

“여기 책이 있는데 왜 못 찾는다는 거지?”


아이처럼 좋아라 이죽거리는 렌코쿠 다음으로 바로 렌코쿠의 눈짓싸인에 곤도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기 보면 인용출전의 의미를 저는 잘 모르겠는데 다시 한번 해석해 주시겠습니까? 일본의 해석방식대로?”


동민이 가만히 있다가 원문을 읽고 다시 그의 요청대로 일본의 고전 읽기 방식으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한 줄을 해석하고는 곤도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냐고 다시 묻자 곤도는 당황해서 벌게진 얼굴로 다시 전체를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동민이 전체를 하나하나 해석하고 나자, 곤도가 다시 트집을 잡았다는 듯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왜 지금 한 해석과 여기 박군이 논문에 인용한 해석이 다릅니까? 여긴 조금 애매한 일본어로 적혀 있는데요?”


동민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번역한 것과 왜 적은 것이 다른지 제대로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제 스타일로 먼저 원문해석을 하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후 사토 렌코쿠 교수에게 논문지도라는 것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논문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교정받은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곤도가 좋은 빌미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찌른 질문에 도리어 반격을 당하고는 렌코쿠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며 다음 공격을 선뜻하지 못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기 논문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겁니다. 박상처럼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겼다면 그것을 바로 잡고 최종 교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동민도 그의 궤변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러면 자기 지도교수가 교정을 해 준 것에 대해 일일이 다시 고치면 다시 교수도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됐습니다. 그 문제는 됐고. 다음 질문인데요. 선행연구에 대한 부분인데요. 왜 중국 논문은 이렇게 많은데 일본학자의 연구는 안 보이는 겁니까?”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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