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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1. 2021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제도 교육을 4년만 받고

지금의 스웨덴을 세운 국부(國父)로 추앙받다.

그는 1885년 스웨덴 쿨라달(Kulladal)이라는 곳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도 교육이라고는 고작 4년밖에 받지 못하였고, 워낙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먹고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사환, 점원 등으로 일하며 최하층 노동자로서 성장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이었던 1903년에 청년 사회민주당의 창설에 관여했고 사민당 청년조직인 SSU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으며, 사민당의 각종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그리고 1908년과 1909년에는 젊은 나이에 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당시는 스웨덴은 보수적인 총리 아르비드 린드만의 집권기로, 모든 스웨덴 남성에 대한 보편 선거권과 비례대표제가 확산되어가던 시기였다. 카를 카우츠키의 사회 개량주의적인 비전을 내세운 그는, 얄마르 브란팅의 뒤를 이어 신문 '사회 민주주의(Social-Demokraten)'의 편집자가 되었고, 이후 1920년 스웨덴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브란팅 내각 세 번에 모두 참여했고(1920~25년), 군비 예산을 지속적으로 삭감했다. 브란팅 사후, 사회민주당의 리더로 떠올랐고 정통성 문제에 공격을 당하긴 했지만 곧 제압하고 1928년에 당대표가 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밀리게 되자 그는 사민당을 계속 다수당으로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1928년 선거를 치렀다. (이후 2010년까지 사민당은 좌익과 결코 연대하지 않았다.) 보수당과 실용주의와 나치 반대는 함께했지만 그 외의 강한 국가보다는 복지 확대를 지향했다. 그는 이 시기 국민의 집(Folkhemmet) 구호를 주창했다. 나라는 모든 국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이 은유는 엄청난 대중적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얻은 압도적 지지를 통해 그는 마침내 1932년 스웨덴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로, 1932년부터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인 1946년까지 세계 2차 대전 중 만들어진 거국 연립내각을 포함해 네 개의 정부에서 총리를 지내며, 스웨덴을 현재 북유럽 최고의 복지국가의 초석을 다져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의 이야기이다.


지난 세기 스웨덴 정치의 원숙한 유산인 사회민주주의를 더 강력하게 확립하기 위해 한손은, 법제화를 통한 중립 정책과 복지정책 양쪽의 확산을 시도했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보다는 협동 조합주의를 선택했다.

총리 재임 중 업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한손은 1925년에 사민당 당수직을 맡게 되었고, 28년에 의회에서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다. 이 유명한 연설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정의 기초는 공동성과 공동의 감정이다. 좋은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특권을 인정받지 않으며 소외되지도 않는다. 또 편애받는 사람도 없고 따돌림받는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득을 보고자 하지 않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거나 수탈하지 않는다. 좋은 가정에서는 평등, 배려, 협력, 도움주기가 지배한다. 커다란 인민의 그리고 국민의 가정에 적용한다면 이는 현재 국민을 특권층과 소외층, 지배자와 신민(臣民), 수탈자와 피수탈자로 나누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장벽의 철폐를 의미한다.”

사민당이 지향하는 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좋은 가정의 이미지와 결합시킨 이 연설 이후 ‘인민의 가정(folkhemmet)'이란 용어는, 이후 사민당의 평등주의적, 개혁주의적 노선을 대표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고 사랑받았다.


1932년 말 사민당 단독 소수 내각이 출범하고 그가 총리로 취임했던 시기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스웨덴에도 강하게 불어닥친 시기였다. 30년대에 사민당은 세계 최초로 케인스주의적 수요 부양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공공근로사업의 규모 증대와 공공근로인력의 임금 인상, 실업보험의 도입, 영세 농민들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스웨덴은 비교적 순조롭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케인스주의적 수요 부양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핵심 인물은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였다. 또 사민당은 농민과 농업에 대한 지원정책을 고리로 삼아 1933년부터 농민당과 정책연합을 결성하였으며 1936년부터는 아예 사민당-농민당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를 통해 안정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에 기반하여 1976년까지 중단 없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다.


또 1930년대에는 가족정책 등 사회복지정책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1938년에는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간에 찰줴바덴 협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개입 없이 노사 간 협의를 통해 노동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가는 관행이 정착됐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손은 전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민당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 연립내각을 구성하였으며 스웨덴은 비동맹 중립노선을 표방하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한손은 많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친근하고 서민적인 언어로 국민을 위로하고 격려했고, 점차 정파를 초월해 스웨덴의 국부(國父)로서 추앙받게 됐다.

한손이 총리로 재직했던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에 사회복지정책, 노동정책 영역에서 노동자·서민의 이익을 증진하는 개혁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었으나 한손은 자본가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가들이 투자와 생산에 매진하는 것이 스웨덴에 좋은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한손은 사민당이 반항심 많은 차남 이미지보다는 책임감 있고 유능한 장남, 특히 가족 구성원 중 취약한 구성원을 무엇보다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장남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를 원했고 이러한 한손의 의도는 대체로 실현됐다.


한손이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사랑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그의 서민적 풍모였다. 학력이 매우 낮은 최하층 노동자로서 살았던 삶의 이력,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방식과 언행이 정파를 초월하여 대중에게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총리가 되고 나서도 출퇴근용으로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늘 대중교통수단인 전차(電車)를 이용했다.


사망하던 날도 밤늦게 일하고 수행원 없이 전차로 퇴근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니 그것은 정치인의 표를 얻기 위한 쇼가 아니었음의 반증이기도 하다.


정작 "국가는, 모든 국민들을 위한 좋은 집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한손 총리에게 여생을 보낼 자기 집 한 채가 없었다는 사실도 그의 청빈했던 삶을 오롯이 증명해준다.


한손은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무엇보다도 이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서민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집행해야 사회통합과 경제위기 극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려는 정치세력은 급진적 수사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정책 내용을 통해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국민에게 따뜻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전업 정치가.

이 말은 정치를 업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는 스웨덴의 전업 정치가 1세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대개 정치를 하는 이들은 본캐가 정치가 아니고 정치를 부캐의 개념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이익단체를 대변하기 위해, 혹은 궁극의 부와 명예를 움켜쥐기 위해 검사, 판사, 변호사나 의사, 심지어는 아줌마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아나운서나 기자에 이르기까지 개나 소나 부캐로의 변신을 위해 정치인으로 데뷔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본캐를 통해 정치에 데뷔하는데 드는 엄청난 실탄을 준비해서 자신이 국회로 입성할 수 있는 카펫을 만들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문제는 그렇게 그들이 돈을 들이는 이유가, 자신이 들인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뽑아내려는 심산에 있다는 것이고 실제 그런 자들이 정치를 궁극의 돈벌이로 여긴다는 것이다.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을 압박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할 수 있는 정보를 독점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캐 때 하던 짓을 더 확장하고 더 업그레이드하여 나라가 망하든 사회가 썩어가든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스웨덴의 한손은 달랐다.

이미 20대가 되기 전부터 자신이 목도한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정치에 발을 들였고, 전업 정치가 1세대로 국가를 일구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심지어 일을 하다 쓰러졌다. 그가 뒤로 빼돌린 재산은 고사하고, 자식들에게 물려줄만한 변변한 재산조차 없었다.

대개 당시 유럽의 정치인들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집안의 자식들이 대를 물려받아 세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정치가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가난한 노동자의 자식으로 빈민가에 준하는 동네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며 성장한 뼛속 깊이 ‘근로 대중’이었던 한손은, 못 배우고 차별당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절망을 깊이 호흡하고 공감할 줄 알았다.


위에서 베푸는 자가 아닌, 자신이 직접 그 위치였기에 가능한 눈높이 정치를 폈다.

그렇다고 그가 많이 배운 것도 아니었다. 제도권 교육의 혜택이라고는 고작 4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그가 찾아서 읽은 신문, 누가 버리거나 가져다준 책,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 빼고 잠잘 시간을 쪼개 그런 것들을 읽어가며 혼자서 공부한 것이 다였다.


부모의 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부모의 재산이 손주의 학력을 보장하는 시대라고 한다.

당신에게 돈 많은 조부모와 그 재산으로 전문직을 차지한 부모가 있어, 강남에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학원을 오가고 고액과외 선생에게 교육을 받으며 원하는 대학에 가고 부모의 전문직을 그대로 이어받는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게 부러웠나?

내 조부모는 뭘 했길래 우리 부모를 그렇게밖에 못 키웠고, 우리 부모는 뭘 했길래 고작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가며 강남은 고사하고 서울 한복판에 그 수많은 아파트들 중에서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했는지, 억울하고 분통해서 왜 난 금수저를 갖지 못했냐며 서운했는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냥 살던 인생 짧게 복권이나 긁으며 소주잔 기울이고 그렇게 소시민으로 살다 죽어라.

근본부터 썩어 있는 자는, 애써 가르치기보다 다음 생을 기대하는 것이 낫다.


사법고시가 있었을 때는 그나마 동아줄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머리 안 좋고 돈 많은 것들이 로스쿨을 만들고 치전원을 만들어 부를 어떤 식으로든 계승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당신의 찌질한 인생이 그나마 좀 펼쳐볼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개천용이 나오던 시대가 아니라구?

이젠 빈부 격차가 너무 커져서 뭘 해볼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구?

아니다.

니 머리가 그것밖에 안되어서 생각이 그렇게 미친 것뿐이다.


세상이 변해서 인터넷만 가지고서도 강남의 일타 강사 강의를 들을 수 있고,

고액과외를 하지 않아도 그들이 가진 정보만큼 따라갈 수 있으며,

재료들이 일반화되어 무언가를 만들어보거나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다양해졌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금의 아이디어만 가지고서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널리고 뻗쳤단 말이다.

정신상태가 썩어 눈까지 썩어 들어간 네 눈에만 안 보일 뿐이다.


한손이 태어난 시대가 현재였다면 그가 스웨덴 총리가 못되었을 것 같다고?

개풀 뜯어먹는 소리는 너 혼자 화장실 가서 입에 휴지나 물고 해라.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영웅은 있어왔고

온갖 역경과 운명의 방해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이는 시대와 지역에 무관하게 탄생해왔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

반드시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것만이 인간을, 아무런 약물이나 기술 없이도

총알이 빗겨나가는 아이언맨으로 만들고

최강무적의 슈퍼맨으로 만들어 낸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의학이 발전하여 약물로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키고 더 나아간 인류의 형태를 보좌할 수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의지가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만 못하다.


그것은 이전에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당신이 지금 그렇게 포기하기 전에,

당신에겐 최소한 당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당신이 초인이 되어 거듭날 것인지,

그저 초라한 찌질이로 살아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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