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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2. 2021

사람을 죽이면 내가 사형당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독립을 위해 가는 내 죽음이 뭐 한스럽겠는가?

1879년 바로 오늘(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진해 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고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했고, 사격의 명수로도 유명했는데, 화승총을 쏘아 20보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그를 '안 씨 집안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의 일원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이 좌절되자 7살의 아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이었던 그는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양곡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꼴라 빌렘(J. Wilhelem : ) 신부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며, 그의 아들도 사도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계몽 운동가이며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야기이다.

본래는 안중근은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활동했으며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고 그로 인해 뤼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형당하였다.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그의 호가 아니라, 세례명 토마스의 음차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의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 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이른바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렸다고 전한다. 안중근은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안중근은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유교 경전 등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든 뒤 손가락을 잘라 ‘단지 동맹’을 맺고 새로운 독립운동을 다짐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09년에 조선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 가슴 뛰던 바로 그날로 들어가 보자.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겠다는 생각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蔡家溝)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하게 된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돌아서며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라는 것을 확신하고 벨기에산 권총 FN M1900으로 3발을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을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소문난 저격수였던 만큼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 각각 1발씩을 맞췄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 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자결에 실패했다느니 하는 낭설은 그야말로 루머이다. 천주교에서 자살은 죄악으로 보거니와, 본인 자신이 자신은 당당히 잡혀 일본의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자신이 왜 죽였는지 그의 죄를 낱낱이 공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힌 뒤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3 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 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현재는 중국 따롄 지역)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한국인 안병찬은 물론, 러시아의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라스, 스페인 변호사,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 자체가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 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와 카마타 쇼지가 변론을 맡게 된다.

1910년 2월 14일에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수감 뒤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했다. 이후 3월 26일 오전 9시에 정근, 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가 10시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이때 나이 32세였으며, 유언은 아래와 같았다.

안중근 의사가 도대체 어떤 실패를 겪었길래 이 시리즈에 등장하였는지 묻는 바보 독자가 없길 바란다.

내가 당신에게 묻는다.

조선에는 땅 수천지기를 가지고 있던 지주이자 양반 집안이 많았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 모두 자산을 쏟아부어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호사와 기회를 저버리고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영화에서라도, 상상만으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전쟁을 하며 사람을 죽이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결행하기까지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는 양형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여야 하는 일이 없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총을 잘 쏘는 안중근 의사도 자신이 혹여 죄 없는 노인을 잘못 쏜 것은 아닌지, 죄 없는 사람을 쏘았다면 어쩌지 하는 심정으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고 토로하였다.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어떤 대의명분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당신에게 또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20대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이미 지나온 당신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20대를 어떻게 보내고 서른을 맞이하였던가?


맛집을 찾아다니며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 바쁘고,

국민투표를 하는 선거날이 휴일이니 어디를 놀러 가야 좋을지를 검색하고,

주식과 코인으로 어떻게 대박이 날 기회는 없는지 기웃거리며,

시험이 아니고서는 결코 책을 읽을 일이 없다고 유튜브를 보며 키득거리면서

보내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런 당신에게는 욕도 아깝다.

지금 나라가 위태로운 것도 아니고 일제 식민지하에 찾아야 할 나라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꼰대 같은 소리를 하냐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 지 하나 잘 살겠다고

일제에 빌붙어 시대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던 기회주의자 놈들의 대사와

어쩌면 그렇게 워딩 하나 다르지 않단 말인가?


청년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

청년은 그 나라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운명이고 평가의 기준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경험하며 그것을 올바른 정신으로 다져나가

작게는 자신을 정립하고 크게는 나라를 부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인지

굳이 내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금세 나이 먹고 돌아보면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당신은 깨닫게 된다.

내가 더 열심히 젊은 날을 노력하지 않았기에

지금 이렇게 늘 후회하는 삶을 사는구나,라고.

살아생전 양반으로서 고운 비단옷 한번 입고 그려진 초상이 없다며 상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을 보며, 그의 짧지만 누구보다 강렬했던 삶에 경의를 표한다.

32살의 짧은 생을 마친 안중근 의사의 삶이

물리적으로 짧지만 철학적으로 당신의 삶보다 훨씬 길고 빛나는 이유이다.


오늘 그의 탄생일을 맞아,

다른 외국의 어떤 위인의 탄생일을 기억하기보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독립과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강한 조국과 건실한 후손들에 대한 기대를

당신이 제대로 이행하며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를

내가 오늘,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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