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Sep 03. 2021

엄마에게 버림받고 제대로 먹지 못해 '참새'라고 불려도

당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희망을, 사랑을 노래해요.

1915년 유독 추웠던 12월, 가난한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삭의 어머니가 병원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파리의 빈민가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부상병을 간호해주고 탈주시켰다는 죄로 그녀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독일군에게 총살된 영국 간호사 ‘에디트 카벨’의 이름에서 딸의 이름을 따왔다.


곡예사였던 아버지 루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당하면서 어린 그녀의 어둡고 외로운 인생은 시작된다. 엄마 아네트는 삼류 가수로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쌓기를 원해 어린 딸을 부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인 외할머니한테 맡겨졌다.


그 후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버린 것이 정식화되고 나서, 창녀촌의 포주였던 친할머니에게 맡겨지면서 창녀촌에서 유아 시절을 보낸다. 백내장과 각막염으로 3년간 시력을 잃었다가 7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은 회복했으나, 급격한 영양실조로 앙상한 뼈만 남았고, 제대로 영양을 취하지 못해 키가 142㎝에서 성장을 멈추었다. 학교 근처는 가본 적도 없다. 어렵게 아버지와 재회한 뒤 아버지가 속한 유랑극단과 전국을 떠돌았지만 그녀의 삶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결국 그렇게 그녀는 15세에 독립했다. 체계적인 훈련도, 타고난 미성도 얻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유랑생활이 다 그렇듯이 벌이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간혹 돈이 다 떨어질 때면 그녀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시절로 회귀해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꾸렸고, 17세 때 배달원이었던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마르셀(Marcelle)’을 낳았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에디트는 엄마로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본 적 없는 그녀는 미처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제대로 양육할 수 없었다. 아이는 2살의 생일을 맞아보지도 못한 채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가수이자, 샹송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 에디트 피아프(piaf; 작은 참새라는 프랑스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본명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Édith Giovanna Gassion)의 이야기이다.


에디트의 거리 가수 시절은 그녀의 단짝 친구였던 모몬(시몬 베르토)이 출간한 저서를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다. 모모는 경찰의 눈을 피해 자리 잡은 거리에서 에디트의 노래가 끝나면 바로 돈을 걷기 위해 항상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물도 나오지 않는 여인숙 3층 방에 살던 두 사람의 재산은 서랍장이 전부였다. 삶은 힘들었지만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는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1936년의 에디트의 모습이 담긴 희귀 사진

버스킹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제대로 된 음향 보조장비는 고사하고 마이크 하나 없던 그 시절, 오직 목소리 하나만에 의지해서 노래로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심지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로 돈을 꺼내게 한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에디트는 길거리 공연에 맞는 가창을 익혔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좋은 목소리를 멀리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입 안의 공명 공간을 최대한 사용해 밖으로 내뿜는, 거리의 가수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발성법을 사용했다. 에디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모음을 발음할 때는 온몸을 울리는 듯 최대의 공간을 열어서 사용하지만, 자음을 발음할 때는, 부러 거친 듯하면서 카랑카랑한 듯하게 발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특유의 발성법은 그의 허스키하고 강한 음색과 결합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이한 그녀만의 음색을 만들어냈다. 적지 않은 세월, 거리의 가수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터득해낸, 부단한 훈련의 결과였다.


거리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 에디트는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일정 금액을 상납하기도 했다. 이는 후일에 가수로 명성을 얻은 에디트에게는 부메랑이 되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에디트에게 클럽 '르 제르니'의 지배인 루이 루플레가 다가와 그녀에게 주급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무대를 제공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매료된 이 지배인은, 가녀린 체구에 맞는 ‘피아프(piaf)’라는 예명도 지어줬다. 이때부터 전설 ‘에디트 피아프’가 탄생하게 된다.

가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그녀의 노래는 이내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녀가 출연하는 무대는 항상 만석이었고, 그녀가 출연했던 클럽은 일약 명소로 탈바꿈했다. 상처 받은 작은 영혼이었던 21세의 ‘작은 참새’는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 어울리던 불량배들은 에디트가 벌어오는 금액의 상납금을 요구하다가 지배인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렀고, 에디트도 공범으로 몰려 안락한 무대 가수 생활을 1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이후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살인자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그녀는 술에 찌든 삶을 살았다.

그렇게 다시 변두리 무대를 전전하던 그녀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작가이자 작곡가, 가수인 레이몽 아소(Raymond Asso)를 만나면서 마침내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완성했다. 레이몽에게서 교양 교육을 받으면서 에디트는 자신의 곡을 작곡, 작사하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가난, 방황, 거리의 여자 같은 그동안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온화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된다. 레이몽은 그녀가 ‘온전한’ 가수가 되도록 무대 매너와 손동작을 교정해줬고, 거리에서 익숙해진 잘못된 발음과 ‘지르기 발성’을 입 안으로 품는 기술까지 가르쳤다. 에디트가 뱃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격하고도 애잔한 힘으로 분노와 행복,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전달하는 감동을 선사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오로지 노래 하나로 성공한 에디트 피아프였지만, 불행은 끊임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성공한 뒤에도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고, 평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다. 에디트의 연인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은 본래 알제리 출신의 권투선수로, 일용 노동자 출신 아버지에게서 나서 미들웨이트급 세계챔피언에 올라 프랑스의 유명인사가 된 인물이었다.

자식이 셋인 유부남이었으나 1948년 여름부터 에디트 피아프와 연인관계가 되었다. 뉴욕에 있는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1949년 10월 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는 바로 이 사고를 계기로 발표한 노래이다.

에디트와 마르셀 세르당의 행복해하던 모습

에디트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그리스계 가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 본명은 Theophanis Lamboukas). 1936년생으로 에디트 피아프와는 21살 차이였다. 에디트 피아프의 두 번째 남편이었으며 에디트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1962년 결혼하고, 바로 다음 해인 1963년에 에디트가 사망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게다가 에디트가 사망한 뒤 약 700만 프랑의 채무를 지게 되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테오 사라포는 197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며 에디트의 무덤 옆에 장례를 치렀다.

한 때 사랑하는 연인이었지만 슬프게 끝이 난 이브 몽땅과 행복해하던 에디트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수년간 다량의 약물과 알코올을 남용하여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있었다. 1951년에 교통사고로 팔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후 모르핀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그 중독 때문에 또 한참을 고생하였다. 이후에도 심한 자동차 사고를 몇 번 더 겪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재활치료를 길게 했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1959년에는 위궤양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 간이 급격히 나빠졌고 수혈도 필요했다. 체중도 심각히 줄어 1963년에는 30kg밖에 되지 않았다. 수개월간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결국 1963년 10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Grasse)에 있는 그녀의 빌라에서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류로 47세에 사망하여,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기구했던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새삼스레 그녀가 뭔가 실패를 얻은 것이 아니라 너무도 힘겹고 버거운 삶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재하는 이 시리즈는, 그저 불쌍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연민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그녀가 이 시리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인생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노래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어설픈 정보가 많아 바로잡자면, 그녀는 술과 마약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거나 좌절에 못 이겨 힘겹게 살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에 호소했고,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갖지 못했던 사랑에 목말라하던 작은 참새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희망에 대해 노래했다.


영화 <인셉션>의 삽입곡으로 요즘 세대들에게도 유명한 그녀의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후회하지 않습니다)는 1960년에 발표된 노래이다. 잘 모르는 혹자들이, 1949년에 사망했던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담아 부른 노래라고 잘못 인용하곤 하는데, 그 노래는 같은 해에 발표한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이다. 그리고 그 노래마저도 애절한 음색으로 가득차 있는 듯 하지만 가사내용만큼은 희망에 가득 차있다.

맞다.

그녀는 사랑의 애절함이나 슬픔을 노래하기보다는 사랑의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 부르며 그렇게 원하고 또 원했다.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내가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태어나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버림을 받은 이에게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맛인지도 모를 미지의 것이고, 하찮은 것이며, 자신이 속한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일쑤이다.

실제, 빈민가를 벗어나지 못했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낳은 자신의 아기는

그 생명을 제대로 꽃피워보이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이 정도 되면 실패니 좌절이니를 떠나

비관을 넘어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만이 가득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닌 지경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닌,

자신이 손으로 곡을 쓰고 곡을 해석하는 능력을 얻게 되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간절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사랑을 갈구하였고

희망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 것으로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생각하는 사치를 부릴 양이라면,

눈을 감고 가만히 그녀의 치열하고 강렬했던 삶이 담긴 목소리를 들어보라.

프랑스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이어도

그녀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갈망했던 간절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가치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세상에 내놓고

조금이라도 다칠세라 아플세라 키워놓은

소중한 희망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고개 푹 숙이고

세상이 곧 멸망할 것처럼 좌절하고 있을 텐가?

고개 들고 다시 시작해라.

그녀가 못내 불태운 그 정열의 삶을 기억하며.



어제 감사하게도 제 글에 '심취해 있다'는 표현을 써주신 사십춘기를 겪고 있는, 동안의 아이 엄마가 에디트에 대한 음악을 올린 을 보고, 언젠가 한번 다루겠다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냈습니다.


그 노래와 글을 보고 멀리 마드리드에서 역시나 사십춘기를 겪으며 눈물을 잘 보이는, 불어 전공의 아이 아빠가 쓴 댓글을 보면서, 댓글을 달까 하다가 이 글로 대신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 끄적거려봤습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넘어

작은 일에도 욱하기 쉽고, 조그만 일임에도 무심하게 눈물이 툭 떨어지곤 하는 사십춘기들에게, 

마흔일곱 해, 그 강렬하고도 농도 짙은 삶을 살다 간 피아트의 이야기를 살포시 곁에 놓아 둡니다.


모두가 이 글을 읽으며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내 삶에, 그녀가 전해주는 사랑과 희망을 가득 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