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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7. 2021

유배되고 파직되고 문초를 받아 병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꿔야만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북송시대 1037년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眉山市) 마을에서 태어났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57년에 송나라 도읍인 변경(:현재 카이펑, 開封)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한다. 과거 합격 당시, 야사에서는 차석으로 급제했다고 전한다.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장원이 못된 이유인즉, 당시 시험 위원장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구양수(歐陽修)가 그의 글을 보고 "이건 내 애제자의 글이 틀림없다. 훌륭하지만, 이걸 장원 줬다간 내 제자라 그렇게 되었다는 부정 의혹이 나올 수 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도 바로 모친상으로 고향 미산()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변경으로 돌아와 제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으며 동생 소철은 차석으로 급제했다. 그 직후엔 상경하고 얼마 안 되어 아내와 부친 상을 치러야 해서 다시 낙향하는 고난과 불운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봉상부(: 현재 산시성) 참판()으로 부임하여 첫 관직을 수행하게 된다. 봉상부에서 임기를 마치고 변경으로 돌아와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인 ‘신법()’이 실시되자 ‘구법당()’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어 항주()로 좌천되게 된다(1071년). 그곳에서 통판()이라는 한직()을 맡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현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자, 북송시대 제1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이야기이다.

자 자첨(子瞻), 호 동파 거사(東坡居士), 애칭() 파공() ·파선() 등으로 불린다.

이름은 식()이며, 동생 소철()과 대비하기 위해 대소()라고도 불리었다.

부친 소순()은 구양수(), 왕안석() 등과 교우하며 송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동파는 자타공인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대가이다.(당송팔대가에는 아버지 소순과 동생 소철이 들어가 있어, 8명 중에 3명이 소씨 부자이니 그 집안의 문학 수준을 짐작할만하다.)

당시(唐詩)가 지극히 서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문장가, 이규보는 "학자들이 과거(科擧) 공부할 때는 풍월에 눈 돌릴 틈이 없다가,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선 소동파의 시에 푹 빠져버린다"라고 극찬했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버지는 소순의 자식 작명을 그대로 따와 자신의 아들을 김부식과 김부철로 지어 소식과 소철처럼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항주로 좌천된 이후 4년 동안 수많은 시()를 남겼다. 특히, 항주의 서호(西)는 소동파의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참고로 그 유명한 동파육도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1074년에는 밀주()의 태수로 부임하였고, 1077년에는 서주()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소동파는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살피고 가까이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신법을 싫어하여 “책이 만 권에 달하여도 결코 율()은 읽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북송의 수도 변경으로 호송되어 어사대()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의 황주()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 등의 대관()을 역임하였다.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으로 유배된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1101년 상경하던 도중 장쑤성[]의 상주()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향년 예순여섯 살이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구양수에게 학문을 배워, 22살에 과거에 급제를 하고서도 연이은 부모님 상에, 아내의 상까지 시묘살이 하네 뭐네 하다가 10년을 훌쩍 넘겨버리고 33살이 되어서야 겨우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놈의 정치를 하는 이들로 인해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소식은 사실, 왕안석의 신법파를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 아니었다. 국가 정책의 개선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왕안석의 세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속된 민낯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왕안석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었고, 무엇보다 급격한 개혁은 오히려 국정에 혼란만을 가중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그의 당색을 말하자면, 구법당의 일파로 보는 기존의 견해는 무리가 있는 셈이다. 그는 구법당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찬성해주지 않는 소수파였다. 실제로 이후 구법당이 득세하고 나서 신법을 일괄적으로 폐지하려 하자, 그는 일부 법은 존속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일관된 주장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관직에 있다는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총동원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황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설득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정권다툼을 하던 이들에게 찍혀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배를 당해 외딴 지방에 가서도 그는 부임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해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다 1079년에 지방의 실태를 올린 상소가 신법당 일파의 눈에 거슬려(심지어 이때 당시 왕안석은 실각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파직당하고 문초까지 받았으나, '선비를 사화(士禍)로 해치지 마라.'라고 했던 조의 유훈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져 유배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유배 생활을 통해 그는 새로이 신선 사상 등에도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종이 죽고 구법당이 집권하면서 소식은 예부상서로 정계에 복귀하고나서도, 이미 신법의 유효성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권력쟁탈의 빌미로만 이용하는 조정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특히 당시 세를 불리려는 데 혈안이 되어있던 성리학자들과 사이가 나빠져 또 귀양을 당하고 만다.


소식이 죽은 지 26년이나 지나서야 그의 절개가 인정을 받아 복권되어, 고종은 소식을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소식의 손자인 소부(蘇符)를 예부상서로 삼았으며, 효종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학문의 깊이로는 당시의 대유이던 정이(程頤)와 다툴만한 수준이었고, 불로(佛老)를 좋아하였으며,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脩)와 더불어 복고를 주창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은 물론, 어느 한 분야에서도 상위 1%의 실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당신이 소동파였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소위, 잘 나가는 집안 출신에, 능력까지 출중하여 못하는 게 없던 그가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다 죽어 갔어야만 했을까?

정치권력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니,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그들 위에 서기 위해 정치에 투신한 사람이었다면 그나마 정치싸움에서 몸이 날아가는 일이야 감수해야 할 일이었으니 그렇다손 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으로 정치에 투신한 인물도 아니었다.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는 이들이 싫었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을 뿐이다. 자신이 정치를 하거나 자신에게 칼자루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절해고도의 하이난에 유배 갔을 때마저도 제자들을 키워 하이난 최초의 과거 급제자가 그 때문에 나왔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백성들을 일깨우고 도움을 주고자 실천했다.

그가 똑똑하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자신의 욱하는 천성을 다스리지 못해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가?

그는 그렇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부와 권력을 위해 아웅다웅거리며 붕당을 이루고 상대방의 허물을 만들어내서라도 유배를 시키는 그들과 다르기를 바랐고 사회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것을 꿈꾸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려고 직접 노력한 것뿐이다.

소동파는, 사회가 삐뚤어지고 있는데, 시나 짓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녔던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배우지 못해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가르쳐 일깨우려고 직접 움직였고, 배워서 제대로 된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황제에게 끊임없이 상소를 하여 황제가 깨달을 수 있도록 간하였던 인물이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상이 다 그렇지 뭐.

현실적으로 나만 똑바로 살겠다는 게 되나?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데, 튀어나오는 돌이 정 맞는다잖어.

이따위 같잖은 핑계를 대며 적당히 시류에 편승하여 살고 있진 않은가?

그래서 돈 좀 만지고 위로 올라갔는가?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어중간하게 사는 삶이 좋은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그것을 바꾸라고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 주는 것은

튀고자 하는 것이나, 나대는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저 튀고 싶어 하거나 나대고 싶어 하는 자들의 행동은 설명하지 않아도 보이고, 알 수 있다.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 앞에서

당신의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잘못된 것을 보고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면

그 사회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 사회를 그렇게 만든 당신들의 잘못이 가장 큰 것이다.


며칠째 물을 입에도 대지 못하다가 발견한 오아시스에

뛰어들어가 자신이 마실 물을 먼저 뜨겠다고

설레발을 치면 구정물이 되어

다른 사람도 마실 수 없게 되지만

당신도 마실 수 없게 되긴 매한가지란 말이다.

 

소동파의 삶을 조용히 관조해보고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 안에서 용솟음치는 그의 외침이 들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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