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인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가 중 하나였던 하동 가족(何東家族)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명문가 후손으로서의 인정도 꽤 있던 편이었다.
출생 이후 부모님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랐다. 배우 출신 아버지 덕분에 그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오기 시작하여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본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자신이라면 아들은 소룡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몸이 몹시 연약해서 잔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하여 무술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그의 아버지 역시 홍가권(洪家拳) 제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영향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면서 그의 무술 근간이 되는 영춘권(詠春拳)을 엽문(葉問)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워낙 당시 홍콩의 영춘권 계보가 엽문으로 귀결되어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실제 그에게 영춘권을 가르쳤던 이는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가지 무술을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배운 무술이 영춘권 정도였는데, 13세에 영춘권에 입문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약 4년간 배웠다.
위의 사진만으로도 한국인,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영화팬들이 기억하는 그 이름, 이소룡.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액션 영화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본명 이진번(李振藩), 브루스 리(Bruce Lee)의 이야기이다. 그의 영어 이름은 출생 당시 미국인 간호사가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학생이었으며,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서에까지 들락거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의 부모는 미국 시민권이 상실되기 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아들을 설득한다.
결국 그는 1959년에 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소룡은 1961년에 워싱턴 대학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쿵푸 교습이 본격적인 직업으로 발전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이소룡은 전통적인 쿵푸가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기 위해 여러 다른 무술을 비교 검토한 다음 장점만을 골라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꾸었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가난과 난항이 거듭되어 대학을 중퇴하고 무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1964년에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 초청된 이소룡은 유명한 ‘1인치 펀치’를 비롯해 자신이 개발한 신기술을 선보이며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은다. 곧이어 그는 린다 에머리와 결혼했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브랜든(1965~1993)과 딸 섀넌(1969년생)이 태어난다.
배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도장일에 전념한 이소룡의 뛰어난 쿵푸 실력은 금세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ABC의 액션 드라마 <그린 호넷>(1966~67)에서 이소룡은 동명의 주인공을 돕는 일본인 조수 카토로 출연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다. 1967년에는 LA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도장을 열었으며, 이때부터 영화배우와 극작가 등의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는다. 1969년에는 갑작스러운 허리 부상을 입고 1년 가까이 활동 불능 상태에 놓이지만,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무술 철학에 관해 서술한 원고는 그의 사후에 <절권도>라는 제목으로 간행된다.
ABC의 액션 드라마<롱스트리트>(1971~72)에서 이소룡은 동명의 주인공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중국인 골동품 상인으로 등장해 자신의 무술 철학을 짧게나마 서술하는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고향인 홍콩으로 향해 있었다.
쇼 브라더스라는 대형 영화사가 장악하던 홍콩 영화계에 맞수로 떠오른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의 대표 레이몬드 쵸(1929년생)가 그에게 처음으로 쿵푸 영화의 주연을 맡겼던 것이다. 이전까지의 쿵푸 영화에 비해 훨씬 사실적인 액션 장면이 돋보인 이소룡의 첫 주연작 <당산대형>(1971)은 이전까지의 기록을 깨트리며 홍콩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정무문
두 번째 주연작인 <정무문>(1972)은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중요한 소재로 삼아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호쾌한 액션뿐만 아니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울음소리 같은 기합, 복잡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 그리고 쌍절곤 액션을 처음 선보였다. 그의 첫 각본 및 감독 작품인 <맹룡과강>(1972)은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며, 가라테 고수 척 노리스(1940년생)가 등장해 이소룡과 대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홍콩에서 이소룡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이 소식에 할리우드도 쿵푸 영화의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쿵푸 고수가 미국 서부를 떠돌며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줄거리의 TV 시리즈를 만들자는 이소룡의 오랜 제안이 드디어 실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송사 측에서는 중국인 주인공을 원치 않았다. 결국 1972년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쿵푸>의 주인공으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쿵푸란 말을 거의 들어 본 적도 없다던 백인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1936~2009)이 낙점되었다.
낙심한이소룡은 할리우드와의 최초 합작 영화인 <용쟁호투>의 제작으로 또 다른 기회를 잡았지만, 영화를 다 찍어 놓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사망을 맞이한다.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소룡의 사망은 그 직전에 앓았던 뇌 관련 질환과 연관이 있으며, 사망 당일에 복용한 진통제 에콰제직에 대한 과민반응이 직접적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너무 반가워 몰입해서 읽느라 잠시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연재 시리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소룡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가 어떤 좌절과 실패를 겪었고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전해주려고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수차례 오디션을 보며 배우를 꿈꿨던 그는 단 한 번도 주연으로 캐스팅되지 못했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 발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전부 기획하고 만들고자 했던 서부시대의 소림승의 방랑기 TV 시리즈물은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그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며 제작에 들어갔지만, 결국 주인공 역할은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가게 된다.
<킬빌>로 요즘 세대에게도 친숙한 데이빗 캐러딘
그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그 이전에도 그렇게 오디션에 매달리고 언젠가 주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획했던 작품이었다. 다 차린 밥상을 고스란히 빼앗긴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에도 무술도장의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전부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이 이소룡에게 충고한다. 홍콩으로 돌아가서 여기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찍어보라고.
그렇게 그는 원대했던 아메리칸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었고, 히트했고 전설을 만들기 시작하여 역으로 그렇게 원하던 할리우드 스카우트 제의까지 당당히 받아내며 성공한다.
다짜고짜 주인공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어가 깽판을 치는 동양인 깡패 역으로 인상을 남기기 시작해서 뜬금없이 주인공을 보좌하는 무술 고수 일본인 조수 역할에 이르기까지 그의 의도에 맞게 그가 하고자 했던 배역을 맡아 멋지게 성공한 모습은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
대학에 연기전공으로 입학하여 숱하게 오디션을 보고 노력했지만 5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어, 다시 대학을 중퇴하고 무술도장을 열었다. 무술지도자로 투신하겠다고 연 무술도장을 찾은 영화 관계자들과 인연이 되어 다시 할리우드 영화계에 데뷔한다. 그러나 변변찮은 조연과 찬조출연 정도로만 여겨져 그렇게 지속되는 생활 끝에 또 좌절하고 미국 생활 자체를 접고 홍콩으로 귀국한다.
홍콩에서 그가 다시 2편의 영화를 찍어 대히트를 기록하고, 자신의 영화사를 세워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로 신기록을 갈아 채우기까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당신은 알겠는가?
그가 적어둔 기록들을 가지고 사후에 출판된 <절권도>를 읽은 인문학 전공자들은 모두 그의 깊이 있는 철학을 인정한다.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것을 자기화하여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성립한 철학가로 인정한다. 싸움만 하고 말썽만 피우던 10대를 지나 그는 소문난 독서광으로 변신하고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정립해나갔다.
좌절은 그에게 연속되었지만,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준비와 노력은 그렇게 차곡차곡 실패를 밟고 한 단계 한 단계 그 위로 올라갔다.
만일 그가 실패하고 좌절하여 그다음의 준비를 더 착실하게 하지 않았다면 32살의 짧은 나이에 그렇게 정점에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32살의 짧은 생을 살면서도, 그는 하루하루를 결코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의 32년 인생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것이라고 착각하며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의 인생이 우연히 미국이라는 큰 물에서 놀다가 시대의 흐름에 맞아 홍콩의 액션 영화에 부합해서 성공한 것이라고 우기며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그가 그의 그 짧은 인생을 단순히 실패와 좌절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것에서 얻은 경험과 배움을 토대로 끊임없이 노력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성공을 움켜쥐었다는 점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이 겪은 실패와 좌절이그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탓이라고 투덜거리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다시 주먹을 쥐고 다음 계획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성향의 차이일 수 있다고 당신이 착각할 수 있겠으나,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 어마어마한 인생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당신이 이소룡을 그저 하늘에 있는 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다른 별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이제까지 이 연재 시리즈를 허투루 읽은 셈이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실패가 인정되지 않는
그 상태의 당신이라면
짧고 굵은 1인치 펀치를 당신의 명치에 날려줄
그의 조언을 그가 남긴 특유의 괴성과 함께 들려주마.
“세상에는 한계라는 게 없어요. 꼭대기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고 꼭대기에 머물라는 말은 아니에요. 분명히 그것을 넘어서서 나가야죠. 그게 혹여 당신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