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영국 해협의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에서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캐리커처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왼젠 부댕(EugèneBoudin)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외광 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다. 또 그림을 배우던 과정 중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JohanBartholdJongkind)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1859년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쉬스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이듬해 군대에 소집되어 1년간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했는데, 1862년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군에서 제대하게 된다. 그는 곧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CharlesGleyre) 밑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Renoir), 알프레드 시슬레(AlfredSisley),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Bazille) 등과 사귀며 공부했다. 이들의 우정은 새로운 생각과 열정이 반영된 미술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867년 그의 모델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CamilleDoncieux)가 그의 첫 아들 장(Jean)을 낳는다. 1869년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인기 있는 해수욕장 라 그루니에르에서 함께 작업했다. 1870년 연인이자 아이의 엄마였던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이어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MallordWilliamTurner), 존 컨스터블(JohnConstable)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을 접하고는, 그들의 명쾌한 색채 표현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는 자신의 커다란 기술적 향상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는, 그때까지도 그가미술계의 인정은 고사하고, 밥벌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연인이자 아내였던 카미유에게 기모노까지 입혀가며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돈을 벌려고 했던 점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유명해지고 난 후, 그는 둘째까지 낳고 32살에 요절해야 했던 자신의 첫사랑인 카미유에게 억지로 기모노를 입힌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회고한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1876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상파 화가.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빛에 따라 변하는 순간적인 인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본명,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의 이야기이다.
인상, 해돋이 (1872년)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예술가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해돋이>을 출품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Leroy)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렇게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 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인상파 리더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모네는 1876년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셰데(ErnestHoschedé)와 그의 아내 알리스(AliceHoschedé)를 만나 그들 부부의 집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받게 된다. 그런데 2년 뒤인 1878년, 후원자 오셰데가 경기 불황으로 은행 파산 선고를 받고 벨기에로 도망쳐버렸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알리스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베퇴유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에 이른다. 이듬해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사망했고, 알리스가 자연스럽게 모네와 연인이 된다.
1883년 모네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이사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1892년 에르네스트가 사망하자 결혼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베레모를 쓴 자화상>(1886년)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은 대표적인 연작 작품이다.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가장 잘 표현해낸 화가였다. 폴 세잔(Paul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평을 남기며 그를 극찬했다.
그가 연작을 그리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눈에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빛의 변화가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다.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그의 시력은 이후 크게 손상되고 만다.
모네는 1893년 지베르니에 정원을 넓힐 수 있는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연못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벽화작업에 착수했다. <수련> 연작은 모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이 그림들은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그림 그리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26년 86세를 일기로 지베르니에서 생을 마감했다.
파라솔을 든 여인 (1875년)
그는 고전 시대의 인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걸 지극히 싫어했다. 그래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을 표현하기 위해 밑그림 없이 바로 색을 칠하는 독특한 화법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이들은 그림이 마치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서툴다며 악평을 쏟아냈다.
인상파라는 말조차도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네의 작품 제목을 따서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고 놀리며 조롱하는 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들의 무리에 이름이 지어졌다며 좋아했다.
빛을 탐색하여 그림으로 그려내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1890년부터 모네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그렸다. 다양한 시간대에 사물을 관찰하면서 빛을 연구하는 방법에 몰입하게 되면서 연작이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특히, 자신의 집 정원에서 작업이 이루어진 <수련> 연작은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수련의 빛과 색채를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에 걸쳐 무려 300여 점의 작품으로 그린 것이다.
말년의 모네
자신의 화풍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시절에는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서 자살까지 시도한 적도 있었던 그였다. 나중에 인상파로서 자리를 잡고 상황은 나아졌지만, 자신의 모델로서 그 고생을 함께 했던 카미유는 32살에 일찍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녀의 임종까지 그림으로 그려냈다.
돈이 없던 시절 자신의 사랑에게 지베르니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내가 이다음에 큰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렇게 정원이 달린 큰 집을 샀을 때, 그의 사랑은 곁에 없었다.
또, 그렇게 좀 살만해졌는데 빛을 관찰하며 그림을 과도하게 몰입하여 작업하던 중 백내장이 심해져 거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듣게된다. 하지만 자신이 마련한 정원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그림으로 그려내겠다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임종 1년 전까지 그려냈다.
자화상 (1917년)
캐리커처로 시작한 그림 인생이,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미술계의 혹평을 들고난 후, 그는 실제로 자살까지 감행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가난과 무시 속에서도 결코 그의 화풍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사물과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담고 싶어 했다.
1초에 몇 컷이나 찍어내는 속사 카메라와 같은 기술이 나오기도 훨씬 전부터 그의 눈에는 그 변화를 캔버스에 담는 것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그림이라 여겼던 것이다.
미술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은 늘 경제적 빈곤함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그 사람의 천재성을 알아봐 줘서 작품이 수십억수백억에 턱턱 팔려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숙성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버티지 못한 이들은 적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통해 시류에 편승한다.
먹고살기 힘들고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가족이, 멸시당하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들 한다.
대학로에서 정극을 하던 이들이, 연봉 100만 원도 안 되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계로, TV로 진출했다는 스토리는 이젠 너무도 식상한 소재가 되어 버렸다. 굳이 그것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고난의 시절이 자신을 담금질하고 기본기를 쌓는 시간이었음에 결코 헛된 고통의 나날이 아니었다고, 지금의 자신이 먹고살 수 있는 모든 기본기는 배고프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말하며 그 시절에 감사해한다.
고생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배고픔과 멸시를 참아가며 젊음을 오롯이 불태웠다고 자부하나?
이렇게 하면 쉬우니까, 앞서 뜬 것들을 적당히 베끼고 따라 하면 돈 좀 만질 수 있으니까,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그렇게 하다가 적당히 힘들고 어렵다 싶으면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기든
당신이 당신만의 것이라는 완성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당연히 잘된 작품을 필사하고 모방하고 연습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습을 위한 것일 뿐 그것이 당신의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당신이 그렇게 해서 우연히 히트를 몇 번 쳤다고 해서 당신의 재능이 인정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당신만의 그 무언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더 숙성해야 하고 더 노력해서 어느 순간 당신 자신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도출되어 나오는 그때까지무던히 자신을 갈고닦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배가 고프다고 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쌀을 씻지도 않고 입안에 한 움큼 털어 넣는다고 저절로 밥이 되진 않는다.
그건 굶주림을 해결해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위장을 상하게 하고, 치아를 상하게 하며,
빈정을 상하게 할뿐이란 말이다.
그걸 알면서당신의 꿈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당신은 스타를 꿈꾸고 셀레브를 꿈꾼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