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02.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11

성별평등위원회 조사위원회의 두 번째 조사 - 3

브런치에서 글을 쓰며 처음으로 만든 브런치 북으로, 10부까지 엮었던 소설입니다.

실화를 면밀히 취재한 총 3권 분량의 소설로, 초고까지는 탈고한 상태에서

글을 다듬으며 시험적으로 몇 달 전에 10부까지만 올려봤던 작품이었습니다.


10부까지의 분량도 300페이지 소설 기준, 60% 정도 되는 분량이었으니 적은 분량은 아니었습니다.


취재한 자료들의 리얼함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대만에서 사용하는 번체자 중국어도 그대로 들어가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약간 지루하거나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긴 했습니다. ^^;  


라이킷의 기준이 완독이라면 정말 꼼꼼하게 완독 하신 독자는 단 두 분뿐이었습니다.

그 두 분 중의 두 번째분이자, 멋진 소설을 꾸준히 쓰고 계신 Rudolf님이 그야말로 손에 쥐자마자 달리기 시작하여

브런치 북 10부를 그날 하루에 한달음에 다 읽으시고 왜 11부가 없느냐고 찾아봐도 안보이더라고 물어오셨습니다.


브런치의 특성상 장편 소설의 연재를 독자들이 별로 원하지 않았고,

리퀘스트가 없어 10부까지의 브런치 북으로 멈췄다고 알려드리긴 했으나, 마음이 개운치 않더군요.


구독자 100명도 채 되지 않는 비인기 작가이긴 하지만 한 분의 고급독자를 위해서라도

글을 다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초고를 다듬어 계속 올려보기로 하였습니다. ^^*

소리 없이 응원해주시는 문샷님을 비롯하여 다른 분들의 기대에 힘입어 한번 3권 분량의 장편소설 연재도 달려보겠습니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39


2017년 5월 28일 일요일에 발송된 이메일


츠리엔 양에게,

 

홍 조교에래와 같이 메일이 왔는데, 금요일에 얘들 데리고 바로 여행 가느라 메일을 이제야 체크했어.

그래서 원래 준비했던 강의 중에서... 아래 꺼를 하면 어떨까 싶은데...

강의 제목을 홍 조교가 제시하고 있는 것 중에서 골라서...

 

그리고 홍 조교의 뉘앙스가 어떤 건지 정확히 알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줄래?

 

科目名稱:韓語實用寫作練習

課程簡概:學習報告、論文、信件等生活中經常使用的韓語文體書寫理論,並透過直接寫作與修正,學習正確的韓語寫作。

課程目標與學習成果:

學習各種韓語文體的書寫方式與特有的慣用表現。

培養直接寫作韓語文書的實用能力。

 

추신. 연휴에 쉬는데 방해되면 나중에 돌아와서 얘기해도 괜찮아.

방해되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마.

 


 

“흐음.”

꼼짝 못 할 증거라고 생각하고 내밀었는데 박 교수의 반응이 별반 달라지지 않고 당당하게 반박하기 시작하는 모습에 남자 위원장이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녹음 내용은 전부가 아니라 편집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전화해서 공식적으로 학교 2학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통화를 마치려고 하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몇 시에 전화를 하셨지요?”

“5월 26일 금요일 전화 시간도 라인에 남아 있습니다. 그 대화 증거가 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니까 9시경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시간은 지금 확인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몇 통이나 하셨나요? 여러 번 하셨더라고요.”

“당신에게도 26일 대화 녹음이 있습니까?

“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어떻게 이 녹취내용이 편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남자 위원장이 뜬금없고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고 박 교수는 생각했다.

“내가 대화한 내용인데, 그걸 어떻게 모릅니까? 그리고 내가 그 대화를 녹음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 이 내용이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잖아요? 풋!”

남자 위원장을 비롯해 세 사람 모두가 가당치 않다는 듯이 박 교수를 비웃기 시작했다.

“아니, 같이 들었으니까 알 거 아닙니까? 통화 시간이 12분에 28분까지 총 40분이나 된다는 것도 확인이 되고, 지금 녹음된 부분이 다짜고짜 맥락 없이 ‘응.’이라고 하는 부분부터 나오잖아요?”

“편집이라는 것은 중간에 자르거나 바꾸는 것이지요. 앞뒤를 자른 것은 편집이 아닙니다.”

이젠 편집의 새로운 정의까지 규정하며, 남자 위원장이 박 교수의 말을 무시하며 시비를 걸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츠리엔의 편집이 다 맞습니까?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에 대해서 통역 선생님이 말씀해주시지요.”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한국어에서 ‘아니오’라고 해당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혹은, ‘그렇지 않아요.’ 등의 미묘한 피해자 코스프레식으로 중국어 번역을 한 그녀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원래부터 한국어로 대화한 것을 굳이 중국어로만 넣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와 그녀의 악의적 의도를 박 교수가 환기시킨다고 해서 이들의 작정한 마음이 달라질 리 없었다. 경상도 통역이 쓰잘데기 없는 번역을 조금 바꾸는 정도에서 그쳤다.

‘너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니?’라고 박 교수가 황당하게 되묻는 부분도 여학생은 어슴푸레한 중국어 번역으로 범범하게 번역했는데 경상도 통역 여자가 보기에도 그 부분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다시 교정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남자 위원장이 그냥 평범한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우기며 넘어갔다.

“‘지금 너의 마음이 온 거 아니니?’라고 왜 물었습니까?”

남자 위원장이 재빨리 화제를 바꾸며 다시 시비 걸 듯 물었다.

“그녀가 25일 새벽에 저에게, 이제까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가 사랑 고백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하나는 자기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그런 거고, 두 번째는 부인이 계신데 제가 그러는 게 안 된다고 머리가 생각했었는데, 마음이 이미 다 간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 통화 녹취 바로 앞에 ‘머리가 아직도 인정을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이야기를 몰아가길래 ‘고백할 때, 니 마음이 다 왔다고 하지 않았냐? 왜 말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지 갑자기 머리가 다 오지 않았다는 둥 말장난을 하는 거냐고’ 짜증이 나서 확인하려고 물었습니다.”

“왜 화가 나셨죠?”

“제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밀당을 하겠다고 계속 나를 괴롭히며 간 보는 짓을 하지 않을 테고, 조금 달래서 안정시켜놓고 이제 방학하면 두 달반의 시간을 떨어질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구나 싶었는데, 다시 전화로 또 이런 말장난을 하며 밀당을 하는 건지 간을 보는 것인지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짜증스러웠습니다.”

“으음.”

단순히 교수가 학생을 협박하듯 압박한다고만 문맥상 이해했던 남자 위원장은 박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어쩌면 이 증거도 자칫 이상하게 가면 여학생의 이상한 행동만 입증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어 약간 불안감이 돌기 시작했다.

“‘왜 머리 어쩌구 하는 말을 또 하는 거지?’ 하고 새벽에 지치고 힘들게 겨우 그 학생을 안정시켰던 생각이 나서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화를 냈습니까?”

뭔가 방향을 정한 사람처럼 남자 위원장이 화를 냈다는 표현으로 좀 더 강하게 유도하듯 물었다.

“짜증이 났죠.”

“‘여기서 니가 한번 겪어볼래?’라고 하는 건 무슨 말이죠?”

남자 위원장이 흔들거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얼른 페미니즘 강사가 바통을 받고 나왔다.

“이런 식으로 또 반복하고 무슨 연애하듯이 사람을 지치게 하려는 행태를 보이니, ‘이제는 어루고 받아주지 않고 내가 원래대로 니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모른 척하고 알아주지 않기를 바라니?’라고 한 의미입니다.”

“‘니가 나중에 와서 울며불며 사정할 때까지 내가 모른척하는 게 좋겠니?’라는 표현은 본래 한국어에는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상대를 위협하는 뜻입니까?”

박 교수의 감정이 폭발이라도 해서 뭔가 이슈를 만들려는 듯 페미니즘 강사가 눈치를 보며 살살 다시 그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저를 화나게 하려고 하는 의도가 보여서, ‘나를 짜증 나게 하려는 거냐?’라고 물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그 학생이 대화를 녹음하는 것도 몰랐지 않습니까? 여기의 대화를 들어보면 모두 교수님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는, 남자 위원장이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황당한 표정으로 그와 통역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통역한 내용을 다시 들어봐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였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박 교수는, 자신이 다시 한번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이들에게 명확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묻겠습니다. 이 친구는 증거를 만들려고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대화를 하는 저의 태도나 뉘앙스를 들어보면 학생의 갑작스러운 이상한 행동에 굉장히 의문을 갖고 있어요.”


그가 다시 차분하게 설명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의 논리에 설득당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에 남자 위원장이 시비를 걸 듯 물었다.

“이 학생이 전화를 녹음하긴 했지만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할지 어떻게 예상합니까?”

“그렇다면 앞의 내용이나 뒤의 부분은 왜 지웁니까? 라인의 대화는 녹음 기능이 없습니다. 녹음을 하려면 녹음 어플을 따로 깔아야 하고 녹음을 시작할 때 버튼을 눌러야 하고 녹음이 끝나고 다시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뒷부분조차 제대로 대화가 끝나지 않고 소리가 자연스럽게 죽어 있습니다. 이게 편집이 아닙니까?”

박 교수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그래요. 녹음 내용이 전부는 아니니까, 완전하지 않았다 칩시다. 그렇지만 대화 자체는 교수님이 주도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대화를 내가 주도했다면,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겠습니까?”

“왜지요?”

“앞에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행동을 갑자기 보이니까, 말을 바꿔서 화를 내는 거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그렇게 화가 나고 짜증 났다면 당신은 그녀를 조교로 써서도 안 되는 거였고, 아내와의 언어교환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거 아닙니까?”

박 교수의 인내심이 다시 바닥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도대체 성희롱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뜬금없는 논리의 비약이 이루어졌다고 느낀 것은 박 교수만이 아니었다. 얼른 남자 위원장의 실수를 덮겠다고 엄호에 나선 것은 여권운동가 여교수였다.

“학생들로 하여금 무섭다고 느끼게 한 거 아닙니까?”

“방금 들으신 내용 그대로 제가, ‘느닷없이 협박당하는 느낌인데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히려 내가 협박을 당한다는 느낌이 왜 들까요?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어제까지 웃고 떠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애가 이런 식으로 어쭙잖은 유도신문 같은 걸 하니까 그 악의적인 의도가 빤히 보여서 화가 난 겁니다. 대화 내용 그대로 제가, ‘그러면 너에게 예쁘다고도 하지 말까?’라고 한 부분도 고백하던 날도, 그 여학생이 저에게, ‘왜 교수님은 저에게 한 번도 예쁘다고 안 해주세요?’라고 얘기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거기에 대해 이 학생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하지 않습니까?”

마치 현장에서 그녀를 보호라도 하듯 남자 위원장이 반박했다.

“녹음 중이니까 자기가 어떻게 말할지를 가려가면서 하고 있는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박 교수가 흥분해서 언성이 높아지자 이번에는 페미니즘 강사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여기서 왜 갑자기 협박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남자 위원장이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아 공격에 가세했다.

“여기 보세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 머리가 알면 얘기해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화를 내면 너는 다 감당할 수 있겠니?’라고 하는 말은 학생을 협박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말했지 않습니까?”

“여기 말한 걸 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게 협박이 아니고 뭡니까?”

그제야 박 교수는 이들이 왜 이 녹음자료가 그들의 회심의 일격이라고 믿고 있는지, 그리고 츠리엔이 왜 이런 누구도 속지 않을 뻔한 자료를 증거라고 만들어 이들을 속일 수 있었는지 한꺼번에 이해가 됐다. 이들은 박 교수가 여학생에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강요하고 협박했다는 츠리엔의 프레임에 확실하게 넘어가서 동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 정도의 어설픈 주작에 넘어갈 정도로 머리가 나쁜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협박을 합니까?”

“당신이 왜 협박하는 지야 우리가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협박받는 감정을 받는 것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박 교수는 헛웃음이 나오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협박을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자신이 피해자인 코스프레를 하면서 녹음을 했어도 정작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에 대한 가장 강한 동기 부여의 프레임을 예비해놓지 않은 그녀의 허술함은 이미 복잡한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그저 그녀의 최면에 빠지고 싶어 하는 조사위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부터 논리로 그 허술함을 박살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박 교수는 강하게 느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저는 자살 경험도 있구요. 우울증 약도 오랜 기간 먹었었고요.’라고 말한 것은 기억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이 학생이 이 대화에서 협박을 받았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유치원생의 말싸움을 보는 듯 페미니즘 강사가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이 학생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 다시 살펴보죠. 참 어리석게도 그녀는 이 대화에서도 빠져나가지 못할 자가당착의 증거를 남겼습니다.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그녀가 ‘머리는 아직’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합니다. ‘아직’이라는 것은 와야 하는데 안 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반대 대상으로 설명하는 ‘마음’은 이전에 다 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을 설명하면서 ‘어느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말은 다른 하나는 이미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나마 미국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자신이 인텔리라고 자부하는 여권운동가 여교수가 금세 박 교수의 논리를 이해했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논리 전개를 흩트려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말을 막았다.

“그건 교수님의 생각이지, 실제로 그런 거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여기서 학생에게 묻는 게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유도해서 나오는 거냐?’라구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얘기에 대해, 내가 그렇게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 아닙니까?”

박 교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남자 위원장이 일관된 무대포로 막을 막았다.

“학생은, ‘머리가 먼저’라고 합니다.”

‘마음이 먼저 오고 머리가 나중이라고 해놓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자는 거야?’

아까부터 남자 위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박 교수가 다시 어이없는 얼굴로 그와 통역을 번갈아 봤다. 자신의 임무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민망했는지 주섬주섬 움직이며 통역하는 여자가 나섰다.

“학생이 ‘머리가 먼저다.’라고 했으니까 마음이 나중이라고 순서를 얘기하는 거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어이가 없어하는 박 교수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통역 역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이해 방식으로는 ‘머리가 먼저’라는 말은 순서상 머리가 먼저이고 마음이 나중이기 때문에 마음은 아직 가지고 않았다고 하는 논리인 듯했다. 그들이 저차원적인 사고를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왜 그런 오독이 가능한지, 그리고 소위 대학 교수라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이해도 제대로 못하는지 박 교수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너희들의 이해가 맞다면 마음은 굳이 비교 대상이나 대화에 나올 필요가 없지 않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논쟁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만약 교수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학생이 당신을 사랑했다면 왜 머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합니까?”

이제는 그들이 바보인 것인지 아니면 바보인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논리가 맞는데, 자신이 자꾸만 아니라고 우기는 지조차도 모든 것이 불명확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논쟁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제 스물넷밖에 안된 정말 수준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설픈 거짓말에 이 야심한 시각까지 이렇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이라는 생각이 박 교수에게는 문득 들었다.

“교수님을 사랑했다면 왜 그렇게 쉽게 마음이 변했을까요?”

헤헤거리는 웃음기 띤 얼굴로 페미니즘 강사가 박 교수의 심란한 모습에 창을 날렸다. 그녀의 어설픈 도발에 발끈하기보다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박 교수가 차분히 일어나며 말했다.

“자, 내가 너무 흥분했으니까 그림을 그리면서 그 아이의 심리 변화를 정리해봅시다.”

그가 벽 쪽의 화이트보드로 가서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24일부터 밤부터 이 대화가 녹취된 26일 밤까지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한 시까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고, 나는 ‘쩐주’라고 놀린다고 하면서 고백 사태를 가볍게 만들려고까지 했습니다. 연구실에서 나오면서 내가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다른 여학생들이 나를 좋아하면 너 화낼 꺼니?’ 뭔가 선을 긋고 마지노선을 잡아둬야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그렇게 넌지시 떠봤습니다. 그전까지는 몰라도 이제 대놓고 사랑한다고까지 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녀가 남은 2주 동안에 어떻게 행동하고 나올지 무서웠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어른스럽게 한다는 말이, ‘교수님만 그 아이를 안 좋아하면 되죠.’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의외의 차분한 반응에 안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수업 중에도 ‘쩐주’라고 놀렸습니다. 만약 끈적한 애칭같이 들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애칭 아니면 그게 뭡니까?”

그 틈을 놓칠세라 페미니즘 강사가 핀잔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이제 그녀의 도발쯤은 무시하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결국 25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한국 요리 파티를 하고 잘 놀았습니다. 그런데 26일에 연휴에 타이중에 있는 집으로 안 간다던 여학생이...”

거기까지 듣던 남자 위원장이 다시 말을 막았다.

“교수님의 말은 ‘쩐주’라는 말을 가지고 많은 장소에서 부른 이유가 상황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만든 거지요? 그런데 당신은 앞서 물었을 때 별명을 만들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가 지금은 말을 바꾸는 거지요?”

새삼 생각났다는 듯이 박 교수를 비아냥거리듯 그가 비웃었다.

“앞의 말이 맞는 겁니까? 뒤에 말이 맞는 겁니까?”

“그게 별명입니까?”

박 교수의 날카로운 반응이 페미니즘 강사가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대들었다.

“그럼 그게 뭡니까?”

“놀린 거지요.”

“무엇으로 놀린 거지요? 그게 별명 아니면 뭡니까?”

페미니즘 강사가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응대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면 뭔지 설명해주세요.”

뭐라 박 교수가 본격적으로 응전하려 들자 다시 남자 위원장이 말을 막았다.

“별명에 대해서 얘기 좀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성희롱이 주관적인 감정기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그녀를 ‘쩐주’라고 부른 것에 대해 그 학생의 주관적 감정이 이것을 성희롱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별명을 부른 것이 성희롱에 해당하냐는 핀잔을 들은 것에 대해 벼르고 벼르던 남자 위원장의 나름 소심한 복수였다. 그러나 박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이 녹음 바로 앞의 대화에 제가 직접 물어보는 부분이 나옵니다. ‘내가 쩐주라고 부르는 것이 싫으니?’라고 물은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자 남자 위원장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리듯 의자 뒤로 몸을 빼면서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당신이 가지고 오세요.”

박 교수는, 조각난 일부를 찔끔 내밀고서 증거랍시고 우기는 츠리엔보다 그것이 절대적인 증거라고 인정하며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조사위원들이 더 미워졌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당하는 사람이 괜찮으면 어떤 행위를 하던 성희롱이 아닌 것이고, 괜찮지 않다고 하면 정상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 성희롱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앞에서 괜찮냐고 물어본 부분을 증거로 가지고 올 수 있다면 그걸로 증명해보세요.”

“나는 녹음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나에게 통화 녹음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귀결될 것을 유도했다는 듯 남자 위원장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박 교수를 내려보며 말했다.

“결국 증거가 없는 거군요?”

“그러면 내가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와 통화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미리 녹음을 합니까?”

“네.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없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25일 2학년 수업에서도 그렇고 집에서 파티하던 저녁에도 내가 그녀를 ‘쩐주’라고 놀리듯 부르는 것을 우리 가족과 모든 학생들이 다 들었습니다.”

박 교수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남자 위원장은 증거 논리에 흠뻑 빠져 박 교수를 비꼬듯이 말했다.

“당신의 아내나 아이들이 이 자리에 와서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그의 말투에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박 교수가 되물었다.

“그 사람이 얘기한 것에 대해 놀리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면 그것을 성희롱이라고 합니까?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성희롱은 최소한의 객관적인 성적인 냄새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즉, 성적으로 불편한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그녀가 저에게 그렇다고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요?”

“하참! 교수님에게 말할 필요가 없지요. 뭐 하러 그럴 필요가 있지요? 당신은 여학생이 보낸 이메일을 받았고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12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3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