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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7. 2021

망나니 부잣집 도련님, 거듭나다.

의대를 때려치우고 신학대를 간다는 아들이 이해가 되는가?

할아버지 때부터 의사였다.

왕이 주치의를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의 유명세를 갖추고 있던 의사였다.

할아버지는 자신과 정치색을 달리는 하는 당과 엮이기 싫다면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도 의사였다.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유명세가 높았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경제적인 성공까지 거두어서 집안에 돈이 넘쳐났다.

최상위 지식인에 해당하는 전문직 의사에 돈까지 아쉽지 않으니

늘 가정에는 여유로움과 최고의 것들을 향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아버지는 고집이 있긴 했지만 온화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아이들이 움직여주기를 바랐지만, 강요하거나 험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섬세하기까지 하여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교육에 더욱 신경을 썼다. 그는 저녁이면 아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하며 세상의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끊기면 아들은 자신이 관찰했던 새의 이야기들로 남은 부분을 채웠다.

엄마 역시 소위 재벌가의 여식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도자기 회사의 딸이었다.

이 정도 되면 

이 집안은 유럽의 몇 안 되는 명문가문의 재벌 가문에 해당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집안의 인물들 중에서 우리가 기억할만한 위인이 있었던가?

찰스 다윈의 가계도를 나무 그림으로 그려둔 원본을 처음 봤을 때, 종의 기원을 읽은 것보다 쬐금 더 놀랐던 것 기억이 있다.

내가 놀란 이유는, '이렇게 대단한 집안이었다니'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집안에서 이렇게 애를 이것저것 다 하라고 풀어놓을 수가 있었던 거지?'였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그렇게 목놓아 울부짖던 '서울대 의대'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던 이들이 바로 찰스 다윈 집안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국을 대표하는 의사 집안이었던 곳에서 그는 태어났다.

대부분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춘 이들이라면 좌절할 타이밍이 별로 없다.

좌절은 결국 결핍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은 결핍을 모르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그다지 경주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찰스 다윈 또한 그랬다.

7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미 그 이전부터 누나와 형들에 의해 키워진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에든버러 대학교의 의대에 진학한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아는 것처럼 그는 2년 만에 자퇴한다.

대개의 자료에서는, 그저 성격 문제였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가 자퇴를 하고 나서 보인 행보이다.

신학대를 가겠다고 한 것이다.

1827년 에든버러 대학을 자퇴한 그는 자신이 굳이 의사가 되어 생계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신학과로 입학하게 된다.

눈치챘겠지만, 사실 그가 엄청난 종교적인 깨달음이나 종교적인 의지가 있어 신부가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그 냄새나는 시체들을 뜯으며 배우는 해부학이 너무도 싫었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환자들을 보는 것이 두려운, 아쉬운 것 없는 소심한 부잣집 도련님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

찰스 다윈은 지극히 소심하기 그지없는 내향적인 인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암기 위주의 권위적인 교육 때문에 주눅이 들려 수업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고 대학에 필요한 라틴어나 고전 공부의 성적이 매우 낮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교사에게서 심한 욕을 듣기도 하고 너무 혼이 나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자질하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집안의 엄격한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거나 애를 더 심한 과외를 해서라도 엘리트로 만들었어야 맞을 것 같다는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유하고 부족할 것 없는 최상위 지식인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필두로 형제들 모두가 그런 다윈을 꾸짖지 않고 집에서 자유로운 복습과 예습을 권장하였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길 부끄러워하고 논쟁에 나서면서 무척 당황해한 버릇은 어릴 적에 잘못 받은 공 교육 여파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찰스의 형인 에라스뮈스 다윈은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그를 아껴주었다. 그래서 그 학교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아버지는 찰스를 에든버러로 보내준 것이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신학대를 마치고서 신부가 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의 기원>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된 비글호의 학자로 긴 여행에 합류하게 된다.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해인 1831년 12월 27일 영국 해군의 탐험선 HMS 비글함을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질학 탐사와 과학 표본 수집을 원하는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 함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위 지도는 그가 비글호를 타고 여행했던 여행지를 순서대로 표기한 것이다.

이전 함장이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나서 바통을 이어받은 피츠로이 함장은 뭔가 이 생을 담보할 수 없는 탐험에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다양성을 통해 우울함을 없앨 수 있는 방안으로 학술팀의 구성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의사나 생물학자들은 보수도 주지 않는, 바다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모험에 지원할리가 없었다.

먹고살 걱정이 없고, 호기심이 많으며, 특별히 아쉬움이나 결핍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모를까 제정신인 사람이 함께할 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는 저녁 산책에서 들었던 세계 곳곳의 이야기들로 유년기를 채웠던 찰스 다윈은 정식 생물학자도 아니면서 그 배에 올라 다양한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5년간의 탐험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다윈은 이미 엄청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가 탐험하며 기록한 것들을 전보를 통해 영국에 지속적으로 보내왔기 때문인데, 지질학, 광물학, 생물학에 걸친 자세하고 다양한 새로운 지식에 사람들은 어느새 다윈이 보내오는 다음 전보를 연재처럼 목놓아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다윈은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하였다.

5개 국어를 능통하게 번역해줬던 외사촌이자, 아내이자 조수였던 에마의 도움으로 그는 집필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무엇보다 <종의 기원>이 갖는 학술적인 기반이 된 연구논문 역시, 실제로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인도네시아에서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에게 보낸 논문과 편지에 담긴 학설이 그 바탕이 되었다.

그것이 우연히 같은 연구였는지 그 바탕을 월리스가 깔아주었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겠으나 다윈은 1858년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된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다고 화를 냈냐고?

천만에, 찰스는 돈 많은 유명 집안의 유명한 인물이었고 월리스는 그저 '한낮' 생물학자였다. 월리스는 이후에, 오히려 다윈과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의사이고 아버지도 의사이면 당연히 그 손녀도 의사가 되어야 한다며 '서울대 의대'를 무슨 수를 쓰던 들여보내려고 하는 현실이 공전의 히트 드라마가 된 데에는 '공감'과 '개연성'이라는 조건이 부합해서였다.


동양의 쬐끄만 세계 순위에도 들지 못하는 서울대 의대가 아니라 유럽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의사 집안은 달랐다.

만약 찰스 다윈이 그냥 에든버러 의대를 졸업하고 그저 그런 의사가 되어 가문의 대를 잇는 정도였다면, 지금의 찰스 다윈 가문의 가계도는 그리 대단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위대한 학자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할아버지 대에 명예를 끌어올려 쌓고,

아버지 대에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손자대에 아무런 걱정 없이 순수학문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맞지만 틀린 말이다.

위의 말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한 것뿐이고

정작 그 알맹이는

손주대의 학자가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있는

자유로움과 깜냥,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유수의 대학 의대를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고

풀어줄 수 있는

DNA가 필요한 것이다.


의대를 때려치웠던 찰스 다윈이

과연 그것을 실패라고 느꼈을까?


'실패'에 대한 정의부터

여러분들은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저 그런 서민으로

늙어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아이가

그저 그런 회사원으로

아등바등

서울에 아파트 하나 장만하는 것에

목숨을 걸며 살길 바라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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