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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8. 2021

못 생겼다고, 가난하다고 그림을 못 그리나?

이 천재를 과연 누가 죽였는가?

할아버지가 네덜란드의 개신교 목사였다.

아버지 역시 개신교 목사였다.

너무도 당연하게(?) 아들도 목회자를 꿈꿨다.

그런데 목회자의 유전자 이외에, 정신병력의 가족력도 그는 물려받았다.

태생적으로 마음이 너무 여렸고, 섬세하기 그지없어

다치기 쉬웠고

의지하고 싶어 금세 사랑에 빠지는 성향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린 지 19년 만이었던

1890년 7월 27일

그는 스스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했다.


그 자리에서 죽지 못했다.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아끼는 동생의 얼굴을 대하고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길게 길게 고스란히 느끼며

총상이 깊어 수술도 안된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였다.


"I want to touch people with my art. I want them to say: he feels deeply, he feels tenderly."
'난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그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미술을 아는 사람은 물론,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마저도 이름과 그림은 아는 불세출의 천재 화가.

살아 있을 때 팔았던 그림이라고는 단 한 점.

자살하기 5개월 전 포르투갈 출신의 여류화가가 산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 팔린 그림의 가격.

그의 죽고 난지 7년 만인 1897년 300프랑에 팔린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8250만 달러의 사상 초유의 가격으로 경매에 낙찰된다.

1899년 당대 최고의 그림이라던 밀레의 그림이 50만 프랑이었으니, 그 한 작품만으로도 고흐가 죽고 남긴 그림을 모두 사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밀레의 그림은 1995년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된 그 유명한 <이삭 줍기>도 341만 달러가 밀레의 작품 중 최고가였다.

물론 현재 최고가를 경신한 작품은 따로 있으나, 지금이라도 경매시장에 고흐의 작품이 나온다면 그 최고가는 당연히 경신될 것이라는 것이 미술계의 평가이다.


뜬금없이 위인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왜 돈 얘기를 꺼내느냐고?

정신착란에 자살로 37살에 생을 마감한 천재화가가,

피카소처럼 90이 넘는 생을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고흐가 피카소만큼 살았다면 1944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 수많은 세월 그의 농축된 경험과 스킬이 녹아있는 엄청난 대작들을

우리는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죽음이(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니 '죽음'이라 칭하자)

그의 작품이 갖는 가치를 높였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없길 바란다.

그저 요절이 예술가의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 없는 농담은

미술적 재능이 없는 이들이

술자리에서 하는 농담에서 끝나길 바란다.


매일같이 만나는 하숙집의 딸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된 그에게, 못생기고 가난하다며 그런 자가 무슨 그림을 그리냐며 비아냥거리고 멸시했던 상황은 그의 영혼에 큰 흠집을 남길 만큼 큰 충격이었을 게다.

늦깎이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어렵게 결심을 하고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목사의 딸에게 사랑을 느껴 고백하였으나 정신병력이 도지고 뒤죽박죽 엉킨 그는 다시 처절하게 거절을 당한다.

그렇게 그는 유전적인 정신병력과 조울증으로 힘겨워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의지를,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무급으로 전도사로 일하면서 탄광촌의 힘겨운 노동자들을 돌보며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에 자신이 사랑하는 서민들에 대한 관심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고작 9주였지만, 함께 살았던 고갱에게서 버림받는 것이 싫어 그를 따르고 그에게 의지하려고 했지만, 고흐의 동생인 테오에게 돈을 받고 고흐와 '노란 집'에서 작업을 하던 고갱이 떠나가자 또 한 번 극심한 조울증에 공항을 겪었다.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 역시 여러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고갱에게서 정신적으로 벗어나고 싶어 했던 돌발적인 그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연약한 이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고갱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2점이나 더 그려, 선물했다는 해바라기를 보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는 혼자되는 것이,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이 몸서리치게 힘겨웠을 것이고, 가난하고 돈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어 물감을 먹으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1년여의 정신병원 생활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림은 그가 유일하게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위로 행위이자 예술행위였기 때문이다.


네가 쏟아부은 돈만큼 내 그림이 돈을 벌어들일 날이 올 거야.


그의 예언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그가 비참한 생을 마감하고 난 이후였다는 것이 비극적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은

(최소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지 못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도 못했고,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여유 있는 생활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과 물감 가격을 걱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유명한 화가로서

유명세를 누리며

높은 가격에 그림을 팔지도 못했다.

주변의 동료 화가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뜻 맞는 이와 함께 작업하며

행복한 시간을 갖지도 못했다.


한 마디로,

그는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뼈에 가로새기며

죽음의 시간을 맞이했다.


그가 누리는 '천재'라는 말.

사상 최고 경매가액의 작품이라는 찬사.

인상파 최고의 화가라는 격찬


이 모든 것은

그가 죽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고 나서 어떤 대단한 영화를 누리는 것도

살아 있을 때

따뜻한 밥 한 끼만 못한 것이다.


그런 그는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영혼을 위로해준 유일한 출구로

그림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그저 아름답지 않고

처절하게 슬프고 슬프다.

"Ik voor mij verklaar dat ik er helemaal niets van afweet. Maar de aan blik van de sterren zet me altijd aan het dromen, even gemakkelijk als ik tot dromen word aangezet door de zwarte stippen die op een landkaart de steden en dorpen aangeven."
'내가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창작의 고통은 그것을 해본 사람만이 안다.

아마추어틱하게 글을 좀 깨작거리고

책 한두권 내보고

그림 그려서 개인전 몇 번 한다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고통과는 별개로

창작을 내 고통을 삭히는 과정을 위해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도 힘겨운 현실을 잊기 위해

완전 다른 세상을 그리는 경우도 있고

내 일상의 고통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겨

그것을 훗날 누군가에게 공유하고자

아로새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을 알아봐 주고

그 감정을 공유해주는 이들이 없다면

그 작업 자체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고흐가 그렇게 목마르며 그렸을

사람들의 공유와 인정

그의 예언처럼(거의 자기 암시에 가까웠지만)

그 절규는 훗날의 사람들에게

가 닿았고

그것은 큰 울림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죽기 전에

죽음으로 그 좌절의 문을 닫고

편안한 저 편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러지 마라.


살아라.

살아서 당신의 좌절이

그것을 당당하게 극복할 기회를 줘라.

그래서 그 좌절과 실패가

당신의 뒤에 선 자들에게

결코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을 앗아갈 정도의 것이

되지 못함을

보여줘라.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좌절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내게 덜어라.


내 기꺼이

당신의 삶을 위해

함께 그 짐을

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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