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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1. 2021

미국인도 아닌데 남북전쟁에 참전?

당신에게 눈이 보이지 않아도 신문을 만들겠다는 고집이 있는가?

매년 4월 발표되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문학·음악에 대한 상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퓰리처상'이 바로 그것이다.

퓰리처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주목된다. 퓰리처상은 컬럼비아 대학의 퓰리처상 위원회가 저널리즘 14개 부문, 문학 6개 부문, 그리고 음악 1개 부문에서 그 해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추천받아 수여한다. 수상자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이 지급되는데, 상금의 액수를 떠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평생의 꿈이자 목표이며, 수상자들에게는 엄청난 영예와 권위가 주어진다.  

그런데 정작 그 상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 상의 이름으로 나와 있는 이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드물다.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그의 풀네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설명을 한 줄로,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라고 적혀있다.


일반인들이 알면 경악할만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장 황당한 그에 관한 진실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이였다.

실제 그의 본명은 '풀리체르 요제프(Pulitzer József)'이다.

책 읽는 것을 유독 좋아하던 마르고 왜소한 소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집안을 장악한(?) 새아버지는 공장을 경영하는 전형적인 공돌이였다. 퓰리처가 책만 읽고 있는 꼴을 보지 못해서 공장에 나와 일하라고 들볶았고 사춘기의 퓰리처는 그에 대항하기보다 그를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17세에 헝가리를 벗어나기 위해 있는 돈 전부를 투자해서 미국으로 떠나겠다며 길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돈을 다 버리고 목숨을 걸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하게 된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결국 돈도 없고 영어도 하지 못해서, 남북전쟁에 참전군인이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남북전쟁의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한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자 다시 백수가 되었고, 거리를 전전하게 된다. 일단 영어를 배우기 위해 도서관을 다니면서 꾸준히 영어를 익히겠다고 노력하게 된다.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사탕수수 농장에 일거리를 찾아 나서 중개업자에게 전재산 5달러를 내고 루이지애나로 가기로 하지만 그것도 사기를 당하게 되고 억울한 마음에 신문기자에게 독일어로 기사를 적어서 '투고'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베스툴리헤 포스트'에 실리게 되면서 편집국장에게 발탁이 되어 기사를 쓰게 된다.


“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싸워라.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 항상 모든 당파의 선동가들과 싸워라.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 항상 특권 계층과 공공재산의 약탈에 항거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항상 대중의 복지에 헌신하라.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항상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에 의한 것이건 약탈적인 빈곤에 의한 것이건,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걸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가 위에서 한 말처럼 그는 정의의 사회부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다가 실천력을 키우기 위해 변호사 시험까지 준비해서 변호사 자격까지 얻게 되고 약자를 돕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정계에까지 진출한다.


위 사진처럼 퓰리처상 중에도 가장 유명세를 탄 것은 아마도 이 사진 분야가 아닐까 싶다.

사진 분야의 상이 보여준 그의 언론 정신처럼 그는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도 잘못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신문기사에 펼쳤다.


본래 시력이 안 좋았던 그는 결국 시력이 떨어져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도, 그즈음 신경병이 악화되어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지경에도 신문기사를 다듬고 고치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1911년 10월 29일 눈을 감는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콜럼비아대학교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언론대학원을 설립하게 한다.

그것이 콜럼비아 대학 신문학과의 창설이며, 그 유명한 퓰리처상의 시작이 된 것이다.


간략하게 적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사람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가 기자로 잘 풀려 기자를 하며 돈을 벌어 변호사 시험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

기자로 승진하고 승승장구하여 공동대표직까지 제안받게 되자

경영진에서 그를 견제하고 억눌러 내쫓게 되자

마지못해 시험을 차선으로 택하게 된 것이고

당시 썩은 법조계에서 자신의 일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기자직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금의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한국인이 고등학교 때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태로

미국에 가서 언론인이 되고 언론사주가 되었다고 치자.

쉬운 일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만한 일이다.

유학 가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먹고 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돈 받고 군인이 되고

영어를 정식 과정이 아닌 독학으로 배워야 했던

그가 다음과 같이 기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짧게 써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
명료하게 써라. 그러면 이해할 것이다.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무엇보다 정확하게 써라. 독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언론사 사주가 되어,

자신이 어려울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신문팔이 소년들에게 이익을 갈취하려고 했다는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그가 기득권층이 되는 순간

자신의 어려웠을 올챙이 시기를 망각하고

변했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뮤지컬 작품 '뉴시즈'를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그가 눈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서도

신문을 제대로 만들겠다고 신문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나

더 큰 사회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대학에 기부하여

제대로 된 언론인을 키우고, 퓰리처상을 제정하여 살아있는 언론인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돈 없고 삐쩍 고른 몸으로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수성가가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6,70년대 이야기이지

부가 부를 계승하는 현재엔 맞는 않는 이야기라며

라떼 이야기쯤으로 튕겨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다.

로스차일드가가 있어온 이래

우리보다 더 오래된 자본주의 사회를 구가하는 서구사회를 포함하여

더 오래된 중국의 그 옛날에도

부를 계승하는 이들은 늘 있어왔고

개천표 용도 늘 있어왔다.


당신이 지금 돈이 없고

사기를 당해 좌절감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고

코로나 사태로 인해 실직하였거나

겨우 차린 가게가 파리를 날리며

매일같이 손해가 발생하여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엄두가 안나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로 향하는 배를 탔는데

막 사기당해서 팔려온 것을 알았을 때의

퓰리처만 했을까?

겨우 모은 전재산을 사탕수수 농장에 가겠다고 중개업자를 줬는데

다 털려 뭘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퓰리처만 했을까?


그는 그 상황에 당당히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를 헤엄쳐 미국에 상륙했고

자신의 억울함은 어눌한 영어가 아니라

능숙한 독일어로 작성하여

알리고자 하였다.


결코 그가 기자가 되겠다고

기사를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살기 위해

자신의 억울함에 도저히 견디지 못해

글을 쓴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언론사주가 된

시발점이었다.


당신의 지금 어느 한 행동이

당신의 미래를 있게 할

큰 첫걸음일 수 있다.


내딛어라.

크게 내딛어라.

당신의 걸음은 결코

어느 위인의 그것보다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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