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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3. 2021

당신이 진정으로 해야만 할 걱정은 무엇인가?

고작 돈을 더 벌 궁리만을 하는 딱한 인생들을 향한 일침.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닦아지지 않는 것, 학문이 탐구되지 않는 것과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운지를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 선하지 않은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술이(述而)편’의 머리에는, 이 편의 특징을 ‘공자께서 자신을 겸손히 하고 남을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제 공부한 장(章)에서, 자신의 인생을 세 가지 질문으로 나누어 배우는 자들을 한껏 주눅 들게 하더니 연이은 장에서 연타를 날려 아예 정신을 못 차리게 할 심산으로 하신 말씀이 나온다. 이번에는 공자가 평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걱정했었던 내용들을 네 가지로 더 세부적으로 정리하여 가슴이 뜨끔거릴 사람들에게는 아예 불로 지져주는 단계까지 끝장을 보겠다는 느낌이다.

 

먼저 윤씨(尹氏)가 이 장을 해설한 내용을 통해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에 대해 파악해보기로 하자.

 

“德은 반드시 닦은 뒤에야 이루어지고, 배움은 반드시 탐구된 뒤에야 분명해지며, 善을 보면 능히 옮길 수 있고,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는 것, 이 네 가지 일은 나날이 새롭게 하는 공부의 요체이다. 만일 이것에 능하지 못한다면 성인도 오히려 근심하였는데 하물며 배우는 자에 있어서랴!”

 

첫째, 德을 끊임없이 수양하여 완성을 이루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늘 부족한 것. 이것은 이미 하고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도 않고 부족하다고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이미 노력하고 끊임없이 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해이해질 수 있는 마음을 채찍질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둘째, 배운 것에 대해서는 배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복습해야 하고, 그것을 나에게 맞춰 소화시켜야 한다. 그것을 현대어로는 흔히 ‘탐구’ 혹은 ‘연구’라고 한다. 수업을 듣거나 강의를 듣는 것을 ‘공부’라고 부르며 힘들다고 투덜대는 열등생들에게는 평생 가야 이해할 수 없는 바로 진정한 공부.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혼자 공부하고 탐구하는 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善을 보면 능히 옮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더 고차원적이다. 선행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도 이미 보면 구분할 수 있다. 뉴스를 보면 그것이 선행이고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느끼고 옳은 것이라고 느끼더라도 내가 그것을 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선을 보고서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중간에 수많은 노력과 단련에 이은 수양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실천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 네 번째,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는 것. 많이 배우고 더 위로 올라갈수록 내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은 그나마 껍데기의 행위이니 내 자존심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 문구는 그렇게 단편적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냉정해야만 한다.


즉, 내가 잘못한 것을 명확하게 분석해내야 하고, 그것을 바로바로 고쳐나가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지극히 이기적인 일에 다름 아니다. 왜냐구? 잘못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 보완하면 다른 사람이 좋아지나? 결국 내가 더 고양되고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앞서 말한 내 표면적인 잘못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그것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단순한 출발조차도 하지 못하면서 더 궁극적으로 내 내면의 잘못과 부족한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수정 보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월요일 논어 공부를 하면서, '인(仁)을 도대체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토요일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을 빗대 권계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아침공부에, 한참 지각해서 읽은 발검 스쿨 반장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평론에 나온 그 시답잖은 부족한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수업에만 집중하고자 합니다. 인(仁)의 참뜻이 ‘수신(修身)’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지각하고 가끔 엄한 소리를 잘하긴 하지만, 역시 반장은 반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댓글이었다.


왜 쓸데없이 인맥까지 끌어들이며 자기 학교(발검 스쿨?) 반장을 칭찬하냐구?

그 장(章)이, 하필이면 ‘옹야편’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장이었고, 지금 ‘술이편’이 펼쳐지면서  머리부터 공자가 자신의 인생을 반성한다면서, 툭툭 무심하게 던지는 핵펀치를, 후대의 학자가 한 글자로 정리한 말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해서이다.

 

후대에 이 장에서 말하는 공자의 걱정거리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서 내민 단어가, 바로 ‘수신(修身)’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모두 펼쳐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요샛말로 그저 나만 잘하면,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먼저 잘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보고 파급되고 공감되며 공유되어 사회는 양화로 구축된다는 자연의 섭리가 이 장의 가르침이다.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걱정거리라고 내놓음과 동시에 이것만 해결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역설적으로 강조한 내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중국에서도 그랬겠지만, 현대인들에게는 걱정할 거리가 너무도 많다.

당장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려니 걱정이고, 적은 월급에 돈을 언제 모아 결혼을 할 것인지가 걱정이며, 아직 할부를 다 갚지도 않은 자동차가 사고라도 나게 되면 또 걱정이다. 아이를 키우면 아이가 혹여 삐뚤어질까 봐 걱정이며, 성적이 안 나오면 대학은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고, 부모님이 연로하시면 부모님을 어떻게 부양해야 할 것이 걱정이며, 온통 돌아보면, 삶에 어느 하나 걱정 아닌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건 걱정인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양과 깊이의 걱정들이 매일같이 쏟아진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내 호흡에 집중하며 5분만 생각해보자. 걱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걱정들의 근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세상 만물에는 뿌리가 있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도더히 답이 안나오나?

당연하다.

당신이 5분의 명상만에 그 해답을 찾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도를 하라는 것이지, 단번에 성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 없다.

약올리냐구? 아니.

당신이 방금 답안지를 스쳐 지나오고서도 바보 같은 짓을 또 하려 하니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수천 년 전에 어마어마한 공부와 단련과 수양을 통해 매일같이 명상하여 그 답을 얻어낸 聖人이 연일 당신에게 핵펀치를 달려가며 정신 차리라고 알려주는데도 아직도 못 알아먹는다면 그건 당신의 문해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맞다. 이 장에서 공자가 평생을 자신이 걱정했다고 정리한 그 내용이 바로 당신이 진정으로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저 네 가지를 끊임없이 노력해서 부족함을 채워나가면 다른 문제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따라서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고전을 읽는 까닭은, 당신이 평생을 공부하고 명상해도 얻기 어려운 과정을 먼저 어렵게 통과하고 나온 성현이 남겨놓은 지식과 경륜의 엑기스들이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고전이라 부르고 익히는 것이다.

 

그래서 원문에 나온 내용만 봐도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며 또 대강 넘기고 자기 방식대로 오독해버릴까 싶어 행간까지 밑에서부터 길어내어 현대어로 굳이 다시 하나하나 풀어 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제를 잊지 마라. 이것이 평생의 걱정거리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 공자라는 점이다.

 

공자께서 평생을 노력하였어도 스스로 ‘수신(修身)’, 즉 자신이 직접 궁행(躬行) 실천하는 것에 미흡함이 계속해서 느껴져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못할까 하여 걱정하였다는 것이 이 가르침의 무게와 깊이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걱정거리의 의미조차도 지금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 지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라 하겠다.

요즘 브런치의 ‘작가’라고 자기들끼리만 부르는 이들의 고민거리가, 내가 왜 글을 쓰는지, 그리고 내 글은 왜 늘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보인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저마다 모두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른 것 같아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상 만물의 이치는 결국 하나로 집약되고 그 근원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당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과연 이미 모든 것을 이뤘고 심지어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다고 칭송받던 공자가 걱정거리라고 정리해준 네 가지를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부터 생각해보면 당신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이 네 가지를 해결하는 순간, 이미 해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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