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실 적에 그 모습은 활짝 편(申申) 것 같으며 온화한(夭夭) 듯하셨다.
이번 장에서는 스승 공자가 공무가 없을 때, 그러니까 아무런 일이 없을 때, 혼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찍은 듯이 묘사하는 내용이 전부인 장이다. 그저 묘사이고, 내용도 짧다. 짧고 단순명료하면 어떻게 새기라고 하였는지 이제 반사적으로 느낌이 오는가?
맞다. 이 장의 내용이 담고 있는 행간의 내용이 깊다는 의미이다. 현대에 와서 이 장을 해석한 서적들을 보면, 크게 해석이랄 것을 붙인 내용도 없다.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할 말이 없다고 공자가 휴식을 하는데,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쉬고 있으니 휴식을 할 때도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망발을 하는 해석서들도 적지 않다.
이제 욕할 기운도 없다.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할 때는 얼른 그런 책을 불소시개로 쓰라고 했을 텐데, 이제 모두 보일러를 때니 그런 말도 얼른 와닿지 않는다. 그 옛날처럼 화장실에 뒤를 닦는 용으로 쓰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으니.
먼저 이상하거나 자신이 없을 때는 선대(先代) 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라 하였다. 주자는 너무도 당연하여 형용사에 대한 정확한 해석만을 꼭 짚어주었다. 그 말인즉은 형용사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는 것이 이 장을 해석하는 관건이라는 것인데, 그렇게만 하면 어려울까 싶어 정자(程子)가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서 해설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자.
“이것은 제자가 聖人(공자)을 잘 형용한 부분이다. ‘申申’이라는 글자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므로 다시 ‘夭夭’라는 글자를 놓은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한가로이 지낼 때에는 게으르거나 방사(放肆) 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나치게 엄하다. 지나치게 엄할 때에는 ‘申申夭夭’라는 네 글자를 놓을 수 없으며, 게으르거나 방사(放肆)할 적에도 이 네 글자를 놓을 수 없으니, 오직 聖人이라야 저절로 中和의 기운이 있는 것이다.”
위의 원문에서 ‘한가로이 계시다.’라는 표현으로 해석한 ‘燕居’란 정확하게 말하면 공식 업무를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아무런 일이 없을 때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장을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용어이다. 상태를 묘사하는 ‘申申夭夭’라는 의미는 그다지 어려운 표현은 아니다.
‘申申’은, 몸을 편하게 늘리고 늘려서 요즘 말로 그저 늘어져 있는 상태, 즉, 지극히 편하게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적으면 마치 너무 게으르거나 지나치게 퍼져있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夭夭’라는 표현을 더했다고 정자는 말한다. ‘夭夭’는, ‘마음이 즐거워 얼굴에 화색을 띄는 모양새’를 의미한다고 주석에 나온다.
자아, 왜 '공식 업무를 하지 않는 시기'라는 표현이 이 장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지 살펴보자. 앞서 우리가 공부할 때, 공자가 그 사람을 관찰함에 있어 ‘그 사람이 평상시에 하는 행동거지를 보라.’라고 했던 내용을 확인한 바 있다. 공부할 때나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저 흡수하고 배우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여겨 그가 공부하지 않을 때, 혼자서 처소에 돌아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가 공부한 것을 실천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정말로 공부를 완성하고 이해했는지를 확인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업무할 때도 물론 마찬가지이긴 하다. 어떤 목적을 가진 행위를 할 때도 그의 행동거지를 알 수는 있지만, 공자가 관찰할 시기의 포인트로 ‘평상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진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특히 다른 사람이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길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정자의 위의 해설에서 지금(그러니까 당시의 중국)의 사람들이 아무런 일이 없이 편하게 지낼 때, 게으르거나 방사(放肆)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나치게 엄격한 분위기를 유지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방사(放肆)’라는 단어의 의미는,‘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것’을 의미한다. 중간이 없이 너무 원칙이 없이 행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엄격하게 업무를 할 때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며 중간이 없다는 지적을 한다.
그래서 이 해설의 방점은 ‘中和’에 있다. 오직 聖人만이 ‘申申夭夭’라는 네 글자로 놓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공자의 제자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듯이 형용한 모습을 극찬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가 스승의 ‘평상시’ 모습을 묘사하고 형용한 것이 과연 <논어>에 들어갈 내용이던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논어>를 마치고 배우겠지만, 유학에서 수양을 함에 있어 꽤나 중요한 개념 용어로 등장하는 ‘신독(愼獨)’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대학>과 <중용>에서 처음 언급된다. 용어가 처음 언급될 뿐, 이미 그 가르침에 대한 지침은 <논어>에서 다 나온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이 그 증거이다.
‘신독(愼獨)’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 장에서의 가르침처럼 특별한 공무나 공부를 하는 목적 행위를 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고 혼자서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수양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 앞의 장에서 우리는 공자가 강조에 마지않던 걱정거리, 즉. ‘수신(修身)’이 가장 중요한 수양의 방법이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내용을 공부한 바 있다.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이 ‘신독(愼獨)’이 나온 것은, 뜬금없는 내용으로 비약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수신(修身)’을 강조했던 聖人, 공자는 ‘수신(修身)’을 하였는지, 그렇게 ‘수신(修身)’을 강조한 분께서는 과연 ‘평상시’에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의구심을 가지고 보았던 제자가 감탄하여 그 모습에 대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수신(修身)’의 완성을 이룬 성인의 경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그 감동과 감탄을 읽는 이들도 직접 해석하라고 던져준 내용인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즉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야 말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수양하여 행실을 삼가야 한다는 ‘신독(愼獨)’은 ‘수신(修身)’의 기본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때문에 퇴계 이황과 백범 김구는 이 두 글자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흐트러지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데 평생 집중하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다른 사람이 있을 때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워낙에 음주운전이 많아 피해가 폭주하자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것은 살인자라며 목소리를 높여 인지도를 높이겠다고 떠들던 전라도의 의원이 당장 자신이 발의하고 지지한 그 법안에 통과되기도 전에 음주운전으로 뉴스에 나오는 따위의 행위가 그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럴싸하게 성인군자, 좋은 이웃,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려는 아빠 엄마를 행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치를 업으로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사회지도층이라는 이름으로 부와 명예의 정점을 차지하는 이상한 나라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국민들의. 아니 정확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확고하게 결정해줄 수 있는 유권자들의 앞에서 떠들어대고, 카메라의 앞에서 떠드는 것과 카메라가 돌지 않는 뒤에서 하는 행동이 같으려면 굉장한 수행과 ‘신독(愼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선하고 착실한 이미지에 정의를 수호하는 멋진 히어로, 연약한 연상의 이혼녀를 신데렐라처럼 구출해주는 실장님 연기를 했던 연기자가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한편, 깜찍하기 그지없이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뇌쇄적인 댄스로 팬들을 확보한 아이돌이 술 먹고 담배 피우며 학교의 약한 친구들에게 침 좀 뱉으며 삥을 뜯고 다니는 행동을 하고 다녔던 것이 그녀의 덜미를 잡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굉장히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들이 TV에서 보여준 선하고 깜찍하고 착한 이미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욕하고 그들을 끌어내리고 퇴출시키자고 댓글을 다는 당신들은 어떠한가?
당신들의 기준에는 이제 더 이상 야구선수나 축구선수가 운동만 잘하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들이 도박을 하고 음주운전을 하거나 혼인을 빙자하여 여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당신들은 여지없이 그들을 조리돌림하고 인민재판을 통해 죽이지 못하여 으르렁거리는 하이에나 코스프레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런 당신들은 과연어떠한가 말이다.
회사를 다니며 브런치를 한답다고, 다른 사람들이 내 평상시 행동을 보는 것도 아니라며 버젓이 겉보기엔 그럴싸한 글을 써가며 어디서 인터넷의 내용들을 적당히 짜깁기해서,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야 한다며 선량한 아버지를 코스프레하지는 않는가? 정작 그 공대 짜깁기 리포트같은 글로 브런치 작가의 인지도를 쌓아 그놈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구독자가 늘어가는 인기 작가라며 회사와 주변에 은근히 카톡을 통해 노출시키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까지,'나는 글을 쓰는 브런치 작가야' 하면서 전문직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직업을 내세우며 그것으로 혹해하는 구독자들을 현혹시키며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뻔한 내용을 적당히 편집하여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공무원의 신분이라는 것을 버젓이 밝히고, 공무원사회의 썩은 부분에 대해 감사업무를 하며 자신이 그 시절 동안 느꼈던 감사의 기준을 멋지게 브런치의 글로 옮겨놓고서는 정작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에 대해 도움을 청하는 구독자의 요청을 아무런 피드백 없이 씹으며, '내가 이러려고 브런치 한 거 아니다.'라고 '나는공무원이면서 사진도 잘 찍고 멋진 글을 써서 올리는 작가'라며 적당히 멋있어 보이는 다른 책들의 내용을 짜깁기하며 홀로 폼을 잡는 당신은 과연 앞서 말했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수신(修身)을 제대로 못한 국회의원이나 공직자, 심지어 연예인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말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그저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즐거운 화색을 띄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 편안함을 즐겼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배운 것과 일치된 수신을 하여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시선이 없는 장소에서도 편안하기 그지없고 아무런 거리낌이랄 것이 없이 기쁜 기색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실천하기는 정말로 어렵다. 아이들을 전담하는 정신과 의사도 돈을 받고 다른 집 아이들의 지랄발광을 웃으며 넘기는 '일'은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에 돌아가 아이가 칭얼거리고 귀찮게 굴면 얼굴을 구기며 언성을 높인다.
아직 말도 잘 못하고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 줄 아는 또래의 아이를 키우며 육아 지옥에서 헤매이는 엄마는, 내가 낳은 자식이 너무도 사랑스럽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의 똥기저귀를 하루에도 몇 번씩 치우고, 그 똥기저귀 옆에서 밥을 먹이고, 또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서 달래주다가 주저앉아 울게 되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화색을 띄우며 밝은 모습으로 있기가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허나, 그것이 쉬우면 아무나 하지, 성인이 그것을 당신의 수양이 지향해야 할 점이라고 수신(修身)하라고 하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손가락질하고 키보드 몇 번 두들겨서 세상에 몹쓸 인간이라며 쓰레기로 만들기는 쉬우면서 자신을 포장하고 괴리된 모습을 보이며 괴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들과 당신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어렵지만, 힘들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구독자를 늘리거나 유권자에게 표를 얻기 위함이나, 시청자들에게 예쁘고 착하게 보여 부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 무엇보다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 당신에게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당신의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당신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당신이 이 뜻을 다시 헤아리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산타할아버지의 큰 선물이라고 여겨 지금 바로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에게 깨달음이 도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