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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8. 2021

어떻게 하면 군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

해답을 알면서도 군자가 탄생하지 않은 이유.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道에 뜻을 두며, 德을 굳게 지키며, 仁에 의지하며, 禮에 노닐어야 한다.”

이 장(章)은 공자가 제자들의 무엇을 위해 어떻게 수양할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뜻을 두어야 할 바는 반드시 도(道)이어야 하고,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반드시 덕(德)이어야 하며, 의지할 것은 반드시 인(仁)일 것이며, 노니는 마당은 마땅히 예(藝)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道), 덕(德), 인(仁), 예(藝)를 순서로 이해하며 설명하는 서적도 몇 개 보긴 했는데, 이것은 순서의 개념으로 나열한 것은 아니니 오독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 다만,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뜻을 두어야 할 바의 도(道)가 가장 근본적이고 높은 차원의 개념이라는 것은 주의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네 가지를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주석의 해설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도 네 부분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志는 마음이 지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 道는 곧 인륜과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알아서 마음이 반드시 거기에 가 있다면 가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딴 길로 향하는 미혹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지향해야 할 최종 지향점, 도(道)이다. 도(道)의 일반적 의미는 로(路)과 같은 말인데, 공자 이후에 성립된 <중용(中庸)>에서는 ‘성(性)’을 ‘천명(天命)’이라 보았고, ‘도(道)’를 ‘솔성(率性)’으로 보았고, ‘교(敎)’는 ‘도(道)를 수양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즉, 도(道)는 생명체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의 소명을 따르는 것, 즉 ‘본성에 이르는 길’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위 주석에 언급했던 것처럼 군자라면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도(道)를 따라가라고 설명한 것이다.

 

據는 꼭 잡아 지킨다는 뜻이요, 德은 곧 道를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이다. 마음에 道를 얻고 그것을 잘 지켜 잃지 않는다면, 끝과 처음이 한결같아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功效가 있을 것이다.

 

덕(德)을 왜 지켜야 할 것으로 보는가? 덕(德)의 고자(古字)는, 悳으로 곧음(直)과 마음(心)이 합해진 글자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字)의 ‘悳’條에서 ‘밖에서는 바람직한 것이고, 안에서는 나에게 얻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됨됨이’를 의미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방점은 행하고 난 뒤에 얻어진 결과물로 덕(德)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덕(德)을 ‘지(智), 인(仁), 용(勇)’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후대의 <맹자>는 ‘인(仁), 의(義), 예(禮), 지(知)’의 네 가지로 덕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依는 떠나지 않음을 이름이요, 仁은 사욕(私慾)이 모두 없어져 마음의 덕이 온전한 것이다. 공부가 여기에 이르면 밥 한 그릇 먹는 사이라도 仁을 떠나지 않는다면 存養이 익숙해져서 가는 곳마다 天理의 유행 아님이 없을 것이다.


仁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정적(靜的)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과 다양하게 인에 대해 설명한 특성 중에서도 ‘사욕(私慾)이 모두 없어져 마음의 德이 온전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 이 주석의 방점이다.


​ 인(仁)은 덕(德)을 이루는 한 요소인데, 뒤에 배우게 될 ‘헌문(憲問) 편’ 13장에서,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이 됨을 묻자, 장무중(臧武仲)의 지(知), 맹공작(孟公綽)의 불욕(不慾), 변장자(卞莊子)의 용(勇), 염구(冉求)의 예(藝)를 갖추고, 이를 예약(禮樂)으로 문식(文飾)할 수 있다면 성인(成人)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한다. 


또, 육언육폐(六言六弊)을 말해주면서 인(仁), 지(知), 신(信), 직(直), 용(勇), 강(剛)을 제시한 바 있다. 맹자는 인(仁)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기서 설명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게, 남의 아픔을 슬퍼하는 숨은 마음을 인(仁)의 본질로 본 것이다.

 

游는 사물을 玩賞(감상하는 것)하여 性情에 알맞게 하는 것을 이름이요, 藝는 곧 禮樂의 文과 射御書數의 법도이니, 모두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일상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육예에 노닐어 의리의 旨趣를 넓혀간다면, 事務를 대처함에 여유가 있어 마음도 방심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游를 편의상 ‘노닐다’라는 해석을 하였는데, 이것은 현대어의 단순한 ‘논다’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글자의 의미를 새길 때 유의해야 한다. 그것을 늘 함께 하며 수양을 위해 즐긴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큰 오독이 없을 듯하다.

‘예(藝)’는 큰 범주에서 재주를 통칭한다. 공자는 군자는 육예(六藝)에 노닌다고 했는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용(禮容), 음악, 궁술, 마술(馬術), 서예, 수학을 말합니다.

 

정리해 보면, 수양하고 큰 목표로 지향해야 할 바로 도(道)를 정하고, 행동은 덕(德)에 근거하고, 베풂과 정치는 인(仁)의 정신으로 구현하고, 일상생활에서 쉬면서도 육예(六藝)를 통해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 주석에서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장은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배움은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道에 뜻을 두면 마음이 올바름에 있어서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요, 德을 굳게 지키면 道가 마음에 얻어져서 떠나지 않을 것이요, 仁에 의지하면 덕성이 늘 쓰여져서 물욕(物慾)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요, 예(禮)에 노닐면 작은 일도 빠뜨리지 않아 움직이거나 쉬거나 끊임없이 수양이 있을 것이다.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그 선후의 순서와 경중의 비중(倫)을 잃지 않는다면 本末이 겸비되고 안팎이 서로 수양되어,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조금의 간극도 없어 늘 이곳에 빠져 있고 종용하여, 어느덧 자신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감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스승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이렇게 상세히 가르쳐주었음에도 왜 제자들을 통해 그 사회는 바뀌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제자 중에서는 스승 공자의 수준에 근접했던 성인의 흐름과 그 맥을 이었다고 할만한 이가 또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말이 쉽지, 어디 성취해내기가 쉬운 일이냐고 반문한다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 않고, 그것을 이미 이룬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라면 따르는 것만으로도 변화하고 오를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0여 년 전에 한 분야에 일가를 이뤘다고 한 교수와 우연히 식사를 하며 한심한 학생들에 대해 서로 토로를 하던 일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요즘,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위치가 될 수 있냐고 묻는 대학원생들을 보면 한심하기가 그지없어요.”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뭘 그리 답답해하십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냐고 묻는 녀석들 중에 내 논문을 읽고서 질문하겠다고 들고 오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럴 정도의 녀석들이었다면 굳이 묻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얘들 수준이 이러면 이제 연대나 고대 애들은 또 얼마나 더 수준이 바닥이겠습니까? 그 머리 그 성적순으로 줄 세워 들어온 것일 텐데...”

“그러면 모르는 척 넌지시 좀 일러주시지 그랬습니까? 하하.”

“우리 때 대학원생 하면서 방지기를 하면 선생님의 도서관 책 반납 심부름을 하면서도, 선생님이 어떤 책을 읽는지 리스트를 보며 그 책을 다시 빌려 읽곤 했습니다. 그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방식이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 대학에서 대학원 중심이니 도제(徒弟) 방식을 고집했던 의도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저 심부름하는 정도이거나 공부하는 공간을 얻어서 쓰는 느낌이에요.”

“그렇다고 제자로 들였는데 그 정도밖에 안된다고 내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하.”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시간이다. 더 나아지고 문제점이 개선되고 아이들은 훌륭해졌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자식을 지금 경성제대에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의 영혼도 팔 요량으로 마음이 안절부절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의 자녀가 그곳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가서 석사, 박사를 할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행복해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곳에서 박사 하던 아이들을 두고 이런 대화가 20여 년 전에 오갔다.


물론 그들은 역시나 번호표를 받아 저마다 이미 사회지도층 입네 하면서 한 자리씩들을 하고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장 총기가 있던 그 당시에도 그렇지 못했던 이들이 갑자기 일취월장(日就月將) 실력이 늘었을까?

그곳에서 법을 공부하고 법비(法匪)가 된 자들은 그곳의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콘체른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벌인 일이나 벌이려 하는 일을 보라. 그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도에 두는가? 돈에 두는가? 돈 잘 벌고 사업능력이 있으니 나라도 그렇게 운영해보라고 맡겼더니 자기 주머니를 더 채우겠다고 장사꾼 밑바닥을 보이고 감방에 간 각하라고 불렸던 자도 있다. 


지금도 자신들이 이제까지 그렇게 배를 채우고 기어올라갔던 것처럼 나라를 자신들의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정신 나간 것들이 벌써부터 누가 총리를 하네마네 건방을 떨고 있다.

 

뽕 중에도 으뜸이 대선 뽕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취해도 너무 취해서 너무 멀리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지향해야 할 것은 이미 道가 아니며, 굳게 지켜야 할 德이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며, 의지할만한 仁이라는 기준자도 없는 상황에 禮는커녕 룸살롱 술판에서 놀다가 정치를 하겠다고 설치는 지경이니 위의 가르침이 수천 년 전 공자왈 맹자왈이라며 헛웃음을 터트릴 것이 눈에 선하다.

 

당신은? 당신은 다른가?

멋져 보이고, 다 옳은 소리고, 그래도 마흔 가까이 혹은 마흔이 훌쩍 넘었으니 새삼 한자로 된 <논어> 정도를 읽으면서 인생을 반추하고 뭔가 수양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만으로 이 글을 공부하는 것은 아닌가? 대개 옳다 하는 가르침은 부러 어렵게 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정작 어려운 것의 요체는, 그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자가 실천에 옮기는 데서 발생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론도 알고 실제로 할 수도 있는데, 막상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인욕(人慾)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참 신기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려 들 때는 조금 낫다. 사람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상식을 언급하며 상대방을 끄집어 내린다. 끄집어내린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식이 그 잘못된 방법을 통해 올라가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반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식이 그것을 하려고 했거나 그렇게 위로 올라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의 육두문자를 날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비난받고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어나 목적어가 바뀐다고 하여 그 행위가 정당화되거나 덮여줘야 하는 사회일수록 부패가 심하고 부정이 날뛰는 곳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단 말이다.

앞서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물었던, 당신이 너무도 당연히 어렵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던 것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늘 문제의 해답은 당신의 가슴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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