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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2. 2021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

당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세 가지 질문.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고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이 장은, 공자가 자신의 인생을 구체적인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성찰하며 스스로를 평가하는 내용으로, 첫째, 인생을 살면서 좋은 생각을 가만히 가슴속에 간직하며 나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가? 둘째, 배움에 싫증을 내지 않으며 배우는 것에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셋째, 남을 가르침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데, 세 가지에 맞춰 돌이켜 보건대, 자신에게 그 어느 한 분야 하나 자신 있게 자처할만한 것이 없다고 겸양하게 평가하는 부분이다.

세상에. 공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밑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하물며 이 글을 공부하는 후대의 어리석기 그지없고, 노력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발검 무적을 비롯한 우매한 중생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주자가 이 가르침을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지)는 기억함이니, 묵묵히 기억한다 함은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간직함을 말한다. 일설에 識(식)은 앎이니,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이해되는 것이라 하는데, 앞의 설이 옳은 듯하다. 何有於我는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세 가지의 일은 성인의 지극한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자처하지 않았으니 겸손하고 또 겸손한 말씀이다.

 

이것은 공자의 화법으로 역시 제자들에게, 그리고 배우는 후학들에게 이런 부분에 대해 스스로를 반성해보라고 던져준 말씀에 다름 아니다. 성인이었던 공자마저도 스스로 하기 힘든 것들. 방점은, ‘나도 못했는데, 너희가 감히?’가 아니라, ‘이 부분에 맞추어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공자의 평상시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평생을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데 힘을 써보고 싶었지만, 중용되지 못하고 대신 제자들을 끊임없이 양성하고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공자가 자신이 공부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인생 전체를 성찰할 때 사용했던 잣대로 사용한 항목들에 다름 아니다.

굳이 주석에 세 가지 중에서 뒤의 두 가지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앞의 ‘묵이지지(默而識之)’에 대한 부분만을 주석한 것을 보면, 그 부분이 배우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여지가 크다고 여겨 그 뜻을 자세히 풀어준 것으로 보인다.

주석에서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간직함을 말한다.’라고 풀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게 되면, 입이 가벼워진다. 내가 알게 된 것을 떠들고 싶어지고,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 아는 척하고 싶어지고, 잘못 알고 있거나 틀리게 말하는 자를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른 말해서 그를 누르고 타고 오르고 싶어진다. 그렇게 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 광고하고 떠들어댐으로써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기에 그저 잘못되었다고 꾸짖을만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이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나오면 손을 들고 말하지 못해 몸을 비비 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그런 본성을 가진 아이들일 공부를 통해 더 배우고 더 익히게 되면 누가 겸손을 강조하고 겸양을 강조하지 않아도 스스로 입이 무거워지게 된다. 이것 또한 개인차가 아닌, 자연의 섭리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고,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운 이들이 세상에 널려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알량한 것인가를 더 큰, 지속적인 배움을 통해 익혔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떼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배움을 통해 진리를 습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리저리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공부를 수련과 단련을 통해 수양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


내 생각을 정리하면서 끊임없이 입을 떠벌이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며 그것을 곱씹어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첫 번째, ‘묵이지지(默而識之)’에 해당한다.

두 번째, ‘배우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는 것’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스승에게 이미 배운 것이라며, 아는 것이라며 말하는 이들이 혹 있다. 그럴 수 있다. 이미 배운 것을 또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스승이 묻는다. 그러면 네가 이미 배워 안다는 것을 설명해보라고.


능숙하게 설명할 것 같던 이들이 입을 다문다. 배운 것을 곱씹어 회상하느라 입을 다문 것인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이전 공부에서 끊임없이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배웠던 ‘배움(學)’과 ‘안다는 것(知)’은 함부로 자처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움이 거듭된 단계를 거친 자는 안다.


요즘같이 복잡다단해지는 삶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한 가지 단편적인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다 보면, 저것이 필요하고, 저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에 왜 또 새로운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연쇄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공부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많아졌다.


우리가 공부하는 <논어>에서 언급되었던 ‘배움(學)’과 ‘안다는 것(知)’만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달랐고, 사람에 따라 달랐으며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그 색과 모양이 전혀 달랐다. 그런데, 내가 단 한번 우연히 얻어 들은 것을 가지고 나는 다 배운 것이라 감히 말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남을 가르침에 있어 내가 게으르지 않았는가? 이 부분은 앞서 두 행위와 무관한 것이 아닌, 세 가지가 맞물려 있는 하나의 행위임을 일러주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 내가 단순히 아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박사까지 공부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부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또 새로이 강의 준비를 하고 새로운 학설이 나온 것이 없는지, 최근에 연구된 논문들에 새로운 내용으로 업데이트된 것이 없는지 그것들을 끊임없이 체크하고 자신의 정보를 최신의 것으로 채워 넣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남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저 가르친다는 허명만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고문을 처음 배우는 초심자들에게 ‘묵이지지(默而識之)’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 수도 있다. 예컨대, ‘묵이지지(默而識之)’는 다음과 같이 심오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마음에 담을만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일본에는 ‘심수관(沈壽官) 가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온 심당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안을 말하는데, 이들은 규슈(九州) 미야마(美山)에 자리를 잡고 대대손손 도자기를 빚었다. 메이지유신 때 가업을 빛낸 12대 심수관의 업적을 기려 자손들이 그때부터 그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역사소설로 유명한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그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9년)에서 이런 심수관가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낸 바 있다.

 

그런 심수관 가에 1964∼1972년에 일본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74년에 규슈(九州) 미야마(美山)에 있는 지금은 역시 작고한 14대 심수관을 찾아왔을 때 한국과의 ‘인연’을 언급했다는 일화가 있어 이후 굉장한 충격이 된 일이 있었다.

사토 전 총리가 인사를 나누며 14대 심수관에게 물었다.


“당신네는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400년 가까이 됐습니다.”

“우리 가문은 그 후에 건너온 집안입니다.”

 

당시 심수관은 사토 전 총리가 조선의 어느 고장에서 언제 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선조가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사토 전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조선 시대에도 활발하게 한일 간의 교류했던 지역이었다.


사토 전 총리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보다 앞서 1957∼1960년에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두 형제의 성이 다른 것은 기시 전 총리가 양자로 들어가면서 ‘사토’에서 ‘기시’로 성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 꼴통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이다.

 

즉, 지금 위 사연에 등장하는 사토 전 총리는 꼴통 아베의 작은 외할아버지이자, 일본의 총리를 지낸 인물이니, 사토 전 총리가 한국에서 건너왔다면 꼴통 아베 역시 뿌리를 한국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토 전 총리는 당시 심수관에게 붓과 벼루를 청했다고 한다. 그러곤 즉석에서 휘호를 썼다. 맞다. 그때 쓴 휘호가 바로 오늘 당신이 배운 ‘묵이지지(默而識之)’라는 글씨였다. 글자 아래, 당연히 ‘심수관 선생에게, 갑인년(1974년) 봄 에이사쿠’라는 서명까지 남겼다.

여기서 ‘묵이지지(默而識之)’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것은 모두 알아듣고 뜻이 통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논어>를 이렇게 아침마다 한 장씩 읽으면서, 수천 년 전에 발간된 <논어>를 읽고 공부했던 수백수천의 선배 학자들부터 최근의 한국에서 끊임없이 인쇄되어 자신이 제대로 <논어>를 이해했다며 해석한 허접한 이들의 생각까지 모두 섭렵하게 된다.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인식한 사람들의 수준을 보면 현대로 올수록이 아니라 공자의 세대로 올라갈수록 정돈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 제대로 행간을 읽어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가르친 성인의 세대와 가깝다고 하여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세대가 벌어지면서 오해가 벌어진다는 단순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몇백 몇천 년이 지난 조선이지만,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씹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한 발 더 나아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시대가 바뀌었고, 정보가 홍수가 되어 쏟아져 그 정보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첨단을 달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혹자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이 수많은 정보의 바다를 모두 들이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나? 제대로 배울 필요가 없나? 그런 자들은 뷔페식당에 가면 먹을 것이 너무 많으니 배고파 쓰러질 지경인데도 먹는 것을 포기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뷔페 레스토랑에 가게 되면 오히려 사람은 신중해진다. 가벼운 음식, 싸구려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며 더욱 신중하게 어떤 것이 맛있고, 어떤 것이 이 식당에서 추천할만한 음식인지를 따져보고, 조금 먹어보고 그것이 내 입맛에 맞는지 좋은지를 구분하고 따진다. 먹는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맛없고 늘 먹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자신이 거액의 식사비용을 낸 것이 아깝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간단한 한 끼 식사를 함에도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신중해지는 당신이, 평생을 두고두고 사용하고, 당신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공부와 지식과 그것을 통해 수양하는 삶에 어찌 그리 가볍고 게으르며 허술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눈에 보이고 배가 고파 위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맛과 향과 그 깊이를 음식에서조차 음미하려 들면서 더 크고 더 심오한 지식과 배움의 세계에 어찌 그리 망령되이 가볍게 행동하고 스스로를 가볍게 만드느냔 말이다.

 

한 해가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한 해를 정리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한 해를 성찰하는 시간은 아주 의미 있다. 한 해도 그러한데, 자신의 인생을 조용히 관조하며 성찰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죽기 직전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나를 성찰하여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성찰이 아니던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워나가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내가 부족했던 부분들을 겸양스럽게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찰되어 나온 것들을 내일을 위해 보완하고 배워나가며 수양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내가 더 강조하지 않아도 오늘의 가르침을 통해 당신이 깨달았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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