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함을 내 저으기 우리 노팽(老彭)에게 견주노라.”
그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술이(述而)편’의 첫 장이다. 하도 유명한 문구에 대해서는 저마다 안다고 설치고 출판물에 오역을 다 싸놓은 것들이 많아 더욱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예컨대, 이 내용에 대해서도 공자의 고전에 대한 애호와 그의 겸허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는 정도로 해석하면서 저술에 대한 겸양의 뜻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양 언급되고 있다.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상한 종교단체에만 쓰는 말이 아닌데 그쪽으로 전성된 것이다. 문구대로 해석하면 ‘비슷하지만 아니다.’라는 뜻이다. 뭐라 한 소리하는 것보다 제대로 한번 해석을 들어가 보자. 먼저 주자가 글자의 뜻을 풀어놓은 것부터 보자.
“述은 옛것을 전하는 것뿐이요, 作은 처음으로 창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作은 聖人이 아니면 불가능하지만, 述은 賢者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竊比은 그를 높이는 말이요 我는 그를 친근하게 여기는 말이다. 老彭은 商나라 어진 大夫로 <大戴禮>에 보이는데 아마도 옛것을 전술한 사람인 듯하다.”
‘作’은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창작함을 말한다. 요즘처럼 개나 소나 내는 출간의 의미가 아니라, 예전에는 책으로 엮어진다는 것 자체가 사상가로서의 데뷔를 의미했다. 즉,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책으로 엮어 다른 이들에게 설파하는 것은 현자도 안 되는 것이고 성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것을 통해 배우는 자들이 공부를 하게 되기 때문이고, 그 지식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교재로 삼으려면 아무것이나 그리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述’은 그렇게 성인의 뜻을 배워 그대로 전하는 것인데, 그대로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했던 것처럼 자신이 공부하며 자신의 의견을 주석으로 다는 것까지는 ‘述’이라고 본다. 성인의 뜻에 가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기본을 지켰기 때문이다.
공자 자신을 견주어 본 노팽(老彭)이라는 인물은 후한(後漢)의 학자 포함(包咸)의 견해에 따르면, 현존하지는 않지만 공자가 공부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재례(大載禮)>를 지은 상(商) 나라의 현대부(賢大夫)였다. 그가 했던 것처럼 감히 ‘作’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드러낸 대상이다.
공자가 사실 책을 저술한 것이 없는가 싶어 배우는 자들이 의문을 가질까 싶어 주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 장의 가르침이 말하는 내용에 공자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다시 설명해준다,
“공자께서 <시>,<서>를 산삭(刪削)하고, 예악을 정리하였으며 <주역>을 贊述(부연설명)하시고 <春秋>를 編修하여, 모두 선왕의 옛것을 전술하였고 일찍이 창작한 것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이는 창작을 하는 聖人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히 드러내 놓고 옛 현인에게도 스스로 붙이지 못한 것이니, 그 덕이 더욱 높아질수록 마음이 더욱 겸손해져서 자신도 그 말씀이 겸손한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창작은 대략 갖추어졌으니, 공자는 여러 성인을 집대성하여 절충하셨다. 그러하니 공자가 하신 일은 비록 전술에 불과하였으나 그 공은 창작보다 곱절이나 된다. 이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해설에서의 핵심문장은 ‘공자가 여러 성인을 집대성하여 절충하셨다.’라는 내용이다. 본문의 ‘信而好古(신이호고)’라는 말이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이어 바로 나온 것은 앞의 단어에 함몰되어 편향된 인식을 하게 될까 우려한 공자의 균형 화법이자 안전장치에 다름 아니다. 이 의미는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는 뜻으로 왜 ‘술이부작(述而不作)’을 하였는지에 대한 공자의 변명스러운 자기 창작관이다.
실제로 <예기(禮記)>의 내용이, 공자가 3대의 예를 찾아서 연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정리되어 기술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노(魯) 나라와 주변국의 역사기록인 <좌전(左傳)>이나 <춘추(春秋)>도, 공자가 좌구명(左丘明) 등과 교류하면서 연구하여 기록한 내용이 큰 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위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자는 성인들이 말씀과 기록들을 자신이 편집해서 정리하는 수준의 ‘述’을 하였지, 자신의 사상이나 자신의 의견을 기술하는 ‘作’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옛것을 믿고 옛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주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단순한 ‘述’이 아닌, ‘作’의 수준이었음을 강조한다. 편집자에 의해 기록이나 의견들이 집대성되는 과정에 편집자의 의도나 주석이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것을 엄밀하게 ‘作’이 아닌 ‘述’이라 하였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표현하였지만 정작 성인의 뜻을 드러내 배우는 자들에게 정리하여 집대성 한 공로가 창작보다 곱절이 된다고 극찬하며 그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의미가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 않은데 왜 ‘사이비(似而非)’라는 말까지 사용했는지 아직도 궁금함을 해소하지 못했다면 이 장에 숨겨져 있는 공자 화법의 무시무시함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자.
‘作’을 창작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不作’이라고 한 단어로 묶여 있다. 부정어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감히 새롭게 쓰지 않는다는 겸양의 의미가 표면적인 것이라면, 그 단어의 속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쓰는 자들에 대한 일격으로 날리는 10톤짜리 철퇴가 들어 있다.
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설파하며 위정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저마다 저술을 남발해댔다. 당연히 공자는 그것이 얼마나 참람된 행위인가에 대해 경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니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배우는 자들이 잘못된 것들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고전과 현대의 연결고리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역시 수천 년 전 중국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읽고 있는 듯 하지만,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그 사이에 ‘집주(集註)’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선배 학자들이 자신의 공부 노트에 정리한 내용들을 묶어서 공부하였다. 그렇게 계승되고 계승된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자들의 전술(傳述) 방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정리하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것을 통해 배운 것을 현대에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외람된 표현을 쓰자면, 이 <논어 읽기>에서 가르침의 내용에 부합되는 수천 년 지난 한국땅에서의 상황을 평론에 녹여 쓰는 것이 바로 그러한 형태라는 말이다. 이것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즉, '제대로' 이전에 벌어진 일들을 성인의 저술을 통해 공부하게 된다면 그것을 통해 현재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들을 조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겸양의 의미이기보다 경고의 의미이고 권계의 의미를 내면에 담고 있는 무서운 말이다. 함부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 떠들어대지 말 것이며,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나서서 혹세무민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인 것이다.
<논어> 20편 중에서 이제 7편에 막 들어왔는데, 매일 하루 한 장씩 공부하는데, 유명한 문구일수록 짧은 문구일수록 오독(誤讀)하고 제멋대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많았음을 수차례 지적하고 교정한 바 있다.
대체적으로 무언가를 알게 되면, 겸양해지기보다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과는 또 다른, 아무것도 모를 때는 두려움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조금이라도 뭔가 알게 되면 두려워서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처음 복싱이나 다른 격투기를 배우면, 큰 두려움 같은 것이 없다. 그저 초심자로서 맞는 것이 겁나는 정도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본기를 떼고 스파링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게 되면, 초심자였을 때 그렇게 넓어 보이던 링이 좁아 보이고, 내가 도망갈 공간이 없다는 압박감을 받게 된다. 게다가 초심자일 때는 상대의 레벨이 보이지 않아 뭐 어떻게 하든 나만 잘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배우고 나면 상대의 자세나 호흡, 스텝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해 기술을 연마했는지 눈에 보인다.
눈길을 걸어갈 때, 저 멀리 앞서 가는 상대의 발자국이 보이는 것이나, 암벽 등반을 할 때, 내가 처음 올라왔다고 착각하는 듯하다가 누군가 코스를 다 잡아두어 내가 편하게 올라왔다는 것을 중급 이상이 되어서야 감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먼저 공부하고 배운 선배들이 반드시 후배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성인의 저작을 가지고 배울 때, 그것을 먼저 제대로 이해한 글들을 보면서,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행간을 파악한 수천 년 사이의 수많은 선배들의 공부 흔적을 보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해 그 경지에 올랐는지 그리고 누구는 어느 정도였고, 누가 더 깊이 있게 핵심까지 도달하였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조금씩 갖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함부로 내 의견이랍시고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되는 것도 그나마 어렵다는 내용까지 이 장의 가르침에는 담겨 있다.
왜냐하면 공자가 했다는 그 편집의 과정은 성인의 저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적확하게 취합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보가 비대하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터넷 이후의 정보 바다의 상황에서는 더 심각하다. 어마어마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기계이고 인터넷이지만, 정작 쓸모 있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옥석을 가리는 안목은 사람이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너튜브라는 매체가 정보를 접하기에 너무 편하고 책처럼 읽지 않아도 된다며 그 편의성에 익숙해져 가는 중장년층이 급격히 늘어났다. 수익창출이라는 미끼가 있었기에 그 부분은 인터넷의 쓰레기 정보 바다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방향으로 진화해갔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쓰레기 정보와 가짜 뉴스를 구분해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공부가 뒤따라야 한다.
자신이 본 너튜브의 정보가 어려서 공중파만 있던 오후 5시 30분에 정규방송을 시작하던 것으로 알던 세대들은 공인된 정보라고 혼동하여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들의 영향으로 그렇게 얻은 가짜 뉴스가 동년배의 정보공유를 통해 2차 가공까지 되는 경우는 이제 허다해져 버렸다.
소문도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건너면 변질되고 악용되기 일쑤인데, 수백수천을 거쳐 재가공되고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쓰레기 매체의 정보를 검증 없이 그저 편리하고 쉬우니까 믿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당당하게 자신이 얻은 정보라며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설파하는 일이 이젠 다반사가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오해나 큰 실수는 그 어느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함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떠벌이고 자기 책임이 아니라 자신도 어디선가 들은 것이라고 손사래를 친들 때는 이미 늦기 마련이다.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수천 년 전의 중국 땅에 있던 공자가 이 장을 통해 미리 경고한 것이다.
당신이 아무런 공부도 수양도 없이, 그저, ‘요즘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요. 그걸 언제 다 확인하고 앉아 있어요?’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며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을 혹세무민 하려는 자들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 이용당하고 속았음에도 속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어이없는 상황을 매일같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스스로의 안목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공부가 쌓이고 수양을 거듭하다 보면 당신의 눈에도 무언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