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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0. 2021

仁을 도대체 어떻게 완성시킬 수 있는가?

구체적인 仁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仁하다고 할 만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仁을 일삼는데 그치겠는가? 반드시 聖人일 것이다. 堯舜도 이에 있어서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을 것이다. 仁者는 자신이 서고자 함에 남도 서게 하며, 자신이 통달하고자 함에 남도 통달하게 하는 것이다. 가까운 데에서 취해 비유할 수 있으면 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 장은 ‘옹야(雍也)편’의 마지막 장이다. 앞서 여러 번 언급되었고 설명되었지만, 어렵기 그지없는 仁에 대한 총괄 해설편과 같은 느낌을 갖는 장이기도 하다. 仁이 무엇인지를 단순히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운용능력이 뛰어나 실제로 공자 사단의 재정적 지원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했던 자공(子貢)이 실질적인 富의 축적을 통한 직접적인 복지정책이 仁이 될 수 있느냐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질문을 통해 스승에게 확인을 받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스승 공자는, 子貢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질문을 했는지 바로 파악하고 나서 제자가 의도했던 방향에 흐름을 맞춰 대답을 해주는 ‘듯’ 시작한다.

그런데 흐름이 뭔가 꺾이는 듯하더니 한 술 더 떠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이루고자 했던 바이니 맞다고 인정하는 듯하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역으로 지적하며 묘하게 한 발 더 나아간다. 하여 궁극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수양하여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즉, 방점은 질문이나 첫 번째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긍정하는 듯한 앞부분이 아니라, 조금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방법론을 제시하고 지향해야 할 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이 장의 의미를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仁은 이치로써 말한 것이니, 위(聖人) 아래(賢人)에 통하고 聖은 지위로 말하는 것이니, 그 극에 도달한 것의 명칭이다. ‘이는 어찌 仁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聖人이라야 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堯舜같은 聖人이라도 그 마음에 오히려 이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것으로 仁을 구한다면 더욱 어렵고 더욱 멀어질 것이다.”

 

이 해설에서는 마지막 문장에서 보는 것처럼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仁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에 감춰진 행간을 명확하게 일러준다. 원문만 봤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성인들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을 정도라고 했으니, 당연히 긍정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텐데, 주자는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코 仁을 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해설을 통해 이해해보기로 하자.


“자기로써 남에게 미침은 仁者의 마음이니, 여기에서 살펴본다면 天理가 두루 흘러서 간격이 없음을 볼 수 있다. 仁의 본체를 나타낸 것이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설명한 것만큼 仁의 본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마지막 문장인 “가까운 데에서 취해 비유할 수 있으면 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만하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하여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비유하여 그의 소원도 나와 같음을 안 다음, 자기의 소원하는 바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야 하니, 이는 恕의 일이며 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이에 힘쓴다면 人慾의 사사로움을 이겨내어 天理의 公正함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몇 번 다룬 적이 있는데, ‘恕’라는 개념이 나온다. 마지막 문장에서 방법론으로 제시한 仁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에서 빠져있는 개념을 찾아온 것이다. 즉, 恕를 통해서만이 仁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의 수양과 실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仁의 완성은 공감을 통한 전체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가 바뀌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인식이 공유되어야 하고 그 공유된 공감이 올바름을 향해 움직이자는 공감이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 할지 어려워할까 싶어 정자(明道)가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해설해준다.

 

“醫書에 손발이 마비된 것을 不仁이라 하니, 이 말이 仁을 가장 잘 형용한 것이다. 仁者는 天地와 萬物을 한 몸으로 여기니 자기 아닌 것이 없다. 天地萬物이 모두 자기와 一體임을 인식한다면 어느 것인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약 자신에게 소속시키지 않으면 저절로 자기와는 서로 관련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마치 손발이 不仁(마비)해지면 氣가 관통하지 않아 모두 자신에게 소속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聖人의 功用이다. 仁은 지극히 말하기 어려우므로, 다만 말씀하기를 ‘자기가 서고자 함에 남도 서게 하며 자기가 통달하고자 함에 남도 통달하게 하며, 능히 가까운 데에서 취해 비유할 수 있으면 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씀했을 뿐이다. 이는 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仁을 관찰하여 仁의 本體를 터득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시작부터 의학서적에서 ‘不仁’을 ‘마비’라고 한다는 비유가 아닌 구체적인 지적으로 시작한다. 몸이 마비가 된다는 것은 제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仁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며 서두에 꺼낸 것은, 마비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마비가 되는 주체, 즉 지칭하는 전체가 한 사람의 몸인데 그것이 누구를 비유하는가 하는 것이다.


맞다. 바로 사회 전체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仁者는 우리 사회가 자신의 몸이라고 느껴 병들고 좀 먹어가는 것을 자신의 몸이 마비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구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 공자가 그 모든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恕’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풀어,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을 미루어 남에게 확장시켜 ‘스며들게’하여 교화시킨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仁의 本體가 사회에 스며들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장에서 언급된 堯舜도 ‘부족하다고 여겼다’는 말에 대한 목적어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論語>에 ‘堯舜도 부족하게 여겼다.’고 말씀한 것이 두 군데이니, 널리 은혜를 베풂이 어찌 성인께서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50세가 되어야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70세가 되어야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 聖人의 마음에 젊은 자 역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그 봉양함에 부족한 바가 있기 때문이니, 이는 그 은혜를 베풂이 넓지 못함을 부족하게 여기신 것이다.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어찌 성인께서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스림이 九州를 지나치지 못하였으니, 성인께서 四海 밖까지 함께 구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그 다스림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니, 이는 그 구제함이 많지 못함을 부족하게 여기신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찾아보면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성인이 부족하게 여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정치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곧 성인이 아니다.”

 

‘부족하다’라고 쓴 표현의 목적어는 정치를 하는 이가 자신의 선정(善政)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바른 도로 돌아가게 하려는 노력을 통해 天理萬物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부족함을 아쉬워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기본을 이루기에도 역량이나 시간적인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선정(善政) 이 돌아가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늘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끊임없이 노력했던 성인들을 가리키며 후학들을 권계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아, 이제 자공이 들었던 대답의 내용이 자공의 의도에 맞춰 칭찬해주거나 그의 생각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왜 생각이 그 정도밖에 못 미치는가를 에둘러 눈에 보이지 않는 핵펀치로 정신이 번쩍 들도록 날렸는지 언뜻이라도 보이는가?


그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학생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여씨(呂氏)가 이 장의 가 르침이 주는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子貢은 仁에 뜻을 두었으나 한갓 높고 원대한 것을 일삼아 그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자신에게서 취하는 것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니, 행여 가까워서 들어갈 수 있을까 기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仁을 하는 방법이니, 비록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라도 또한 이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뛰어나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던 자공도 제대로 인을 어떻게 완성시켜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그래도 자신이 뛰어난 분야인 재부(財富)를 가지고 복지를 하는 것으로 仁을 이룰 수 있느냐고 물은 제자를 꾸짖지 않고 그 비유로부터 좀 더 확장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전달해준다. 바로 곁에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급선무인 것은 맞으나 궁극적으로 그 목적은 나와 함께 있는 모두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수양을 하는 목적이자 자연스러운 방법임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토요일에 다소 충격적인(내 표현이 아닌 읽으신 분들의 평이다) 글을 한 편 올렸었다. 보는 이들의 수준이나 각도에 따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판이하게 갈리는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브런치의 가장 큰 특장점은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사례를 설명하면서 브런치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이들의 ‘민낯’이라는 자극적인 용어까지 쓰면서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것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읽는가?’로 확장하여 생각할 화두를 던졌다.

 

그 글에도 밝혔고, 내 작가 소개에도 지금도 버젓이 나와 있듯이, 내가 아침마다 일반인들이 잘 보지도 않을 논어강독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다시 외쳤다. 내가 논어강독의 뒷부분에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원문의 가르침에 빗대어 읽는 것은, 단순한 고문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닌 모두가 공감을 통해 옳고 그름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아 가자는 공감대를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정치꾼들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여의도에서 움직이는 가짜 정치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를 바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내가 배운 정치의 의미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두 번째 댓글에 바로 다른 생각이라는 의견이 들어왔다.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대단한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럴 능력도 없으며, (어떤 의미인지는 언급하지 않으나) 브런치 작가 이력란에 이력서급의 경력을 쓰고 자신의 회사를 구체적으로 썼더라도 브런치는 그저 글을 쓰는 공간이니 그가 일하는 회사와는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이었어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라는 변호 아닌 변호 의견이었다.(실제로 당사자는 이것을 자신을 위한 실드로 받아들인 듯 감사해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자신은 글을 쓰면서 세상을 좀 더 꼼꼼히 보게 되고, 글로 생각이 정리되는 과정이 좋아서 글을 쓰는 것 같다고 의견을 남겼다.

 

논어를 꾸준히 공부해온 당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만약 그렇게 행간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면 논어강독의 1장부터 다시 돌아가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무슨 소리냐구?


간단히 비유해주마. 당신이 눈이 안 좋아서 안경을 맞추고 사용하면 안 보이던 사물들이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위의 댓글이 지금의 이 비유와 똑같다는 것은 알겠는가? 눈이 잘 안 보여, 안경을 맞춰야만 눈이 잘 보이니 안경을 맞춰 낀다지 않은가? 자아, 뭐가 이상한지 발견했나?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맞춰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과정의 목적은 잘 보기 위함에서 그치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게 안경을 끼고 또렷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또렷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란 말이다.


사물을 명확하게 보고, 사람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칠판의 글을 명확하게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임을 왜 놓치냔 말이다.

 

글을 써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좋을 수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만 좋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책을 읽는 것이 좋은 것은 그저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음으로써 그 안의 지식을 습득하고, 그 글을 쓴 사람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류할 수 있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고양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마치 '옹야편'의 마지막 장에 이런 내용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내가 토요일에 문제의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운명적으로  내용이 나온 김에, 앞서 설명한 ‘서(恕)’라는 방법론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자. ‘서(恕)’란, 내 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에게 투영하는 서양철학에서의 개념으로 환치하면 ‘공감(sympathy 또는 empathy)’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장의 핵심은 “恕를 통해 仁을 행하고 仁을 극대화하면 博施濟衆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이제 일기 수준의 글을 쓰는 이들에게, 글을 쓰려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움직일 글을 쓰라고 강요하는 무식한 스승은 없다. 다른 매거진의 글에서 윤동주의 생을 다루며 왜 윤동주가 독립투사인지에 대해 피력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마치 이전에 배운 내용을 기억이라도 하듯, 토요일 글을 읽고 자연스럽게 윤동주를 떠올리는 이가 있어 참으로 반가웠다. 내가 <논어 읽기>에서 늘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이들은 지금 감방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이나 지금도 부와 명예를 쟁취하겠다며 여의도에서 개싸움을 하는 이들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욕하며 브런치 작가 입네 세상 사는 소소한 이야기가 어떻고 내 자녀가 어떻고 하는 글을 쓰면서 정작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거나 자신의 이익이 달려 있거나 혹은 내가 피해를 입을 상황이 되었을 때, 정색을 하며 안면을 몰수하는, 당신과 같이 차 마시고 밥 먹고 늘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바로 그들이고 당신들이란 말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서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 일이 아니고, 내가 담당이 아니며, 내 위치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발을 빼는 암묵적 사회 살인 공범인 당신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남은 양심을 일깨우려고 함께 논어를 아침부터 읽고 공부하는 것이란 말이다.

 

몸에 알이 배기지 않고 근육통이 생기지 않으면서 건강한 몸을 만들 방법은 없다.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에 땀 흘리지 않고서 가을에 열매를 거저 거둘 수는 없다.

이것은 지극한 자연의 진리이자 섭리이다.


정작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당신의 일이 되었을 때, 당신이 아무리 울고불고 외쳐도 당신 주변에는 이전의 당신과 똑같은 가면을 쓴 사람들만이 서 있을 뿐이다. 그때 가서 나도 그랬었으니 그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웃으며 당신이 넘길 수 있을까?


도둑놈이 갑자기 달려들어 내 핸드백을 빼앗고, 묻지 마 폭행을 할 때, 당신이 살려달라고 주변에 도와달라고 외치는 이유는 당신이 그저 위급해서인가? 아니면 정말로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 이를 발 벗고 나서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인가?


누군가의 핑계처럼 이라면, 그 일은 경찰이 해야 하는 일이고, 그나마 요즘 경찰은 그 상황에서 다른 경찰 부른답시고 비명 지르며 먼저 도망갈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사회인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고 나를 바꾸는 마음으로 주변이 함께 변화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이다.

논어 ‘옹야(雍也) 편’이 이 장을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스무고개 중에서 벌써 여섯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혹은 아침 일과의 시작을 열며 커피 한잔 하면서 논어를 함께 공부해주신 여러분들이 있어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문을 공부하지 않은 초심자들에게 최대한 쉽고 간명하게 설명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고 느끼실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럼에도 하루에 한 장씩 논어를 읽다 보니 봄에 시작한 공부가 여름을 지나 벌써 한해의 마지막 달까지 왔습니다.


​아직 절반 이상 남아 있긴 하지만, 벌써 3분의 1 가까이 왔으니 좋은 공부습관이 몸에 배어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일부터는 새로운 편의 이야기를 들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배우고 익혀 그것을 생각하고 수양하여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 가져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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