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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7. 2021

도대체 무엇을 중용이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진리도 공부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이 덕이 지극하구나! 사람들이 (이 덕을) 소유한 이가 적은 지 오래이다.”

이 장(章)에서는 '중용(中庸)'이라는 개념이 <논어>에서 처음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장이다. 중용(中庸)은 <예기(禮記)>의 31편을 구성하는 별도의 한 편(編)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중용(中庸) 3장(章)에서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이라고 이 장의 내용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民鮮久矣.’라고 쓴 것을, ‘民鮮能久矣.’로 바꾸어, ‘중용의 덕이 지극한데, 사람이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라는 뜻으로, 잠시 중용을 취할 수는 있으나,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용(中庸)>이 사마천의 시각처럼, 공자로부터 생성되어 자사(子思)가 정리하고, 후대에까지 이어진 개념인지, 아니면 한대(漢代)에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서, 그 저자를 공자의 손자(孫子)인 자사(子思)의 저술로 둔갑시킨 것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자사(子思)와 그의 제자가 공통으로 쓴 것이라는 설이 현재까지는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책의 가장 주된 사상이 ‘중용’과 ‘성(誠)’이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그것은 이후에 공부로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 장(章)의 내용이 중복되는 것에서만 보더라도 <논어>와 <중용(中庸)>의 상관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처음 나온 개념에 대해 주자가 무어라 해설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中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의 명칭이다. 庸은 平常이다. 至는 극진함이다. 鮮은 적음이니, 사람들이 이 덕을 소유한 이가 적은 지 지금 이미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개념 자체에 대해 설명이 조금 부족하여 배우는 이들이 조금 혼란스러워할 듯하여 정자(伊川)가 다시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준다.

 

“치우치지 않음을 中이라 하고, 변치 않음을 庸이라 한다. 中은 천하의 바른 道이고, 庸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함으로부터 사람들이 中庸의 도를 행하는데, 흥기 하지 않아 이 德을 간직한 이가 적은 지 오래되었다.”

 

<중용(中庸)>에서는 하늘이 생명을 만들면서 명한 바인 성(性)이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현되지 않은 본래의 상태를 ‘中(중)’이라 하고, 이런 감정이 발현되었으나 모두 中(중)의 상태로 조절하는 개념을 ‘和(화)’라 하며, 君子의 中庸(중용)은 때에 맞추어 中和(중화)를 행함이고, 小人의 中庸(중용)은 기탄(忌憚) 없이 행할 뿐이라는 것으로 중용(中庸)을 풀어가고 있다.

중용(中庸)을 분석해 보면,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정자가 설명한 주석에 의하면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데 비하여,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중용의 참된 뜻과 그 실현은 중과 용, 즉, 알맞음과 꾸준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중덕(中德)뿐만 아니라, 꾸준한 용덕(庸德)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결국 중(中)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의(義)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은 객관적 대상 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되는 세계에 맞게 [中] 쓰는 [庸] 것이 곧 중용이라 할 수도 있으므로, 이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맞게 쓰는 것’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가? 

객관이 주관에 맞는 것[中]을 ‘진(眞)’이라 한다면, 주관이 객관을 쓰는 것[庸]은 이(理)라 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중용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진리의 일차적 내용이 인의(仁義)이고, 인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악(禮樂)인 것이다. 따라서, 인의의 이상을 예악으로써 현실에 중정 하도록 쓰는 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은 진리가 있는 곳(所在)이고 용은 진리가 쓰이는 곳(所用)이라면, 진은 중용의 인식이고 이는 중용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의는 중용의 이상이고, 예악은 중용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철학적 논의가 깊어지기 때문에 아침부터 글을 읽다가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나올 여지가 커서 중용에 대한 개론적인 설명은 여기까지만 한다.

다만, 한 가지, 어중간하게 배웠다고 하는 자들이, 중용의 개념을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여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절충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따위의 해석을 하는 것이다. 곡학아세 하지 말라. 


아무리 ‘아’ 다르고 ‘어’ 다르다며 트집을 잡네 뭐하네 죽는소리를 하더라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적당주의에 해당한다. 중용이 단어가 비슷하다고 하여 적당하다는 절충선이 어쩌고 하는 따위의 네고의 개념이 아니란 말이다. 중용은 양 극단의 사람들이 만나 협상을 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고 통찰하고 조절하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쉽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것만큼 쉬운 개념이 없다. 운동이 지나치면 몸이 상한다. 그런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역시 몸이 허약해진다.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그 밸런스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적당한’이라는 한국어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적당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말일뿐더러,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적당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매일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이 들 수 있는 중량과 처음 운동을 하는 사람이 드는 중량이 같을 수 없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용(中庸)을 두 개의 개별적인 개념으로 나눠서 중(中)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의(義)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庸)이라 설명한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밸런스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운동을 예로 들었으니 계속 운동을 살펴보자. 운동을 해보지 않은 이는 자신이 얼마만큼을 들 수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조금 운동을 하기 시작한 이는 우쭐하기 시작하여 더더군다나 자신이 얼마의 중량을 들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버페이스가 나오고 바에 목이나 가슴을 눌리는 일을 당하곤 한다. 


반대로 자신의 능력치나 기준에 못 미친 중량을 계속해서 드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를 더 높여 극복하지 못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파고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게를 들어보지 않고 중량을 알 수 없고, 횟수를 채워보지 않고서 자신의 한계치를 측정할 수 없다.

자신의 깜냥을 아는 것부터 하수를 벗어난다고들 한다. 검도에서 죽도를 맞댔을 때, 유도에서 옷섶을 잡고 잡혔을 때, 팔씨름에서 손을 막 잡았을 때, 제대로 된 글을 읽었을 때, 상대의 내공을 순식간에 읽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련을 통한 내공이 어느 정도 쌓여야 ‘아! 내가 범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이에게는 가르침을 주기조차 어렵다.


요리에서 부족한 몇 가지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몇 단계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음식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둥, 내가 만든 음식이 내 입맛에는 가장 맛있다는 둥 하고 떠드는 이에게는 무엇을 알려주는 것조차 조심스럽기 그지없기 마련이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자신이 정점에 서고 싶어 하는 분야에서 정점에 있는 자만의 껍데기만을 보고 우와! 하면서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자신이 어느 정도로 부족한지조차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목이 빠져라 위만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당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정점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처음 그 분야에 발을 들이고 나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중용을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조금씩 익히고 공부하게 되면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분야의 정점에 있는 자의 진면모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즉, 허명만을 가지고 있는 껍데기가 정점에 서 있는 냥 요란을 떠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으면, 첫출발을 뗀 것이다.

바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의 형세판단을 명확하게 해내는 것이다. 좀 더 미세하게 들어가면 몇 집 차이로 이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까지의 수준의 차이를 보이곤 하지만, 자신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의 형세판단을 할 수 있으면 이미 하수를 넘어선 것으로 본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내가 지고 있으면 공세를 취해야 하고, 내가 이기고 있으면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둑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전쟁의 기본에서 출발한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중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고 그 단계로 가고 싶다면 그것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일단 당신의 빈 머리를 채워야만 한다. 무엇을 알아야 시비를 가리고 당신을 아는 공부에까지 갈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 진리를 깨닫는데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가지 한 가지 너무도 당연했던 진리를 당신만의 것으로 하여 깨닫게 되면, 당신의 안목이 좀 더 높아지고 넓어질 것이며,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도 될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겉멋이 들려 부화뇌동할 때가 아닌, 진중하게 당신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위해 넓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할 때이다. 자신을 알기 위한 준비를 위해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이들이 많아져, 후안무치한 자신의 과거 행동에 흠칫 놀라, 어떻게 이전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가를 통렬하게 반성할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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