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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5. 2021

어떻게, 무엇을, 배우고 실행할 것인가?

구체적 박약(博約)에 대한 방향과 지침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文에 널리 배우고 禮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른바 ‘박(博)’이라고 하여 지평의 확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과 ‘약(約)’으로 대표되는 어떻게 무엇을 집중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에 대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가르침, 되시겠다.


학문에 대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는 점은 초심자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까지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집중을 예에 한다고 한 부분이 초심자에게는 걸릴 것이다. 왜 예로 집중을 한다는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일단 주자가 이 장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정리하였는지 살펴보자.

 

約은 요약함이요, 畔은 위배됨이다. 군자는 배움에 있어 널리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文에 대하여 고찰하지 않음이 없고, 지킴에 있어서는 요약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 행동을 반드시 禮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道에 위반되지 않을 것이다.

 

이 해설을 통해 중간에 빠져 있던 논리의 고리가 채워졌다. 넓게 두루 배워서 익힌 다음에는 당연히 실천으로 옮겨 수양을 거듭해야 한다고 우리는 계속해서 읽고 배운 바 있다. 그런데 그 수양의 과정을, 현실에서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의 제시 기준으로 언급한 것이 바로 개념어 ‘禮’이고, 그 ‘禮’로서 자신의 행동을 제어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를 겸하여 이루게 되면 결코 正道에서 벗어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明道)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널리 文을 배우고 禮로 요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만(汗漫)함에 이를 것이다. 널리 배우고 또 능히 예를 지켜 법도[規矩]를 따르면 또한 道에 위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경위(經緯), 즉 씨줄과 날줄처럼 동시에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 편향되어 치중하게 되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도 행간에 담고 있다. 그래서 배우는 자들이 그 두 가지를 하되, 뒤의 예(禮)를 조금 더 강조한 듯한 문장 구조로 설명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한만함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원시 유학에서 예(禮)란 천지의 경위(經緯)를 압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천지의 질서를 압축하여 인간 세상에 효칙(效則)하여 놓은 것이라는 설명이 <좌전> 소공 25년조에 보인다.


이 장의 해석에 대해 위의 설명과 같이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박약(博約)의 방향으로 읽고 그것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을, 마지막 결론에서 틀어서 두 가지도 하고, ‘군자라서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따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현대 해석서를 몇 권 보았는데, 그런 작지만 치명적인 오역들이 원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해석서를 읽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오독하게 만드는 지뢰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그대로 배우는 자들이 살얼음을 걷는 자세로 그런 지뢰를 골라내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장(章)의 내용은 ‘안연(顏淵)편’의 15장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이처럼 같은 내용이 중복해서 나오는 경우는 <논어>에서 처음이 아니다. 의미가 똑같은 것까지 포함하면 6개, 글자가 아예 같은 것은 4개 정도가 나온다. 물론 편찬과정이 공자의 사후에 제자들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공자의 어록을 편집하여 찬정(撰定)한 것이라는 점에서, 내용이 중복될 수는 있다. 이러한 중출(重出)은 단순한 편집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대(唐代)의 성리학자인 한유(韓愈)는 <논어필해(論語必解)>에서 ‘夫今削去此段可也.’라고 하여 삭제하여 없애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반면, 송대(宋代)의 유학자인 주희(朱熹)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헌문(憲問)편’ 주해를 하면서 “모든 장에서 뜻이 같으면서 글이 같지 않은 하나의 말씀이 중복하여 나온 것이다. 글이 조금 다르고, 거듭한 말이 각기 나온 것이니, 이 장은 무릇 네 번을 볼 수 있는데, 글자가 모두 다름이 있는 것은, 성인(공자)이 이 한 가지 일을 거듭 말씀하신 것이니 그 정녕(간곡)한 뜻을 또한 볼 수 있다.”고 하여, 실수가 아니고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가르침이라고 새기고 있다.

 

<논어>에 여러 번 강조해서 부족한 문구와 내용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복해서 나온 이야기를 보게 되면 다시 한번 언급하게 되니 당연히 기억에 더 남게 된다. 뜻을 잘못 새기는 경우가 문제가 될 수 있는 있어도, 여러 번 그 뜻을 새기는 것이 잘못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이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지향해야 할 행동지침으로까지 소개되어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사자성어로 집대성된다.


이이(李珥)는 박문약례(博文約禮)를 수기(修己)의 근본으로 삼아 <성학집요>의 첫머리에서 언급하고 있고, 이현익(李顯益)은 “약례 없는 박학은 잡학이며, 박학 없는 약례는 사도(邪道)”라 하여 박문과 약례의 일관을 역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끔 특강을 하고 나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냐는 우문(愚問)을 받는 경우가 많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인지 꼼꼼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읽고 나서 그 책의 좋아하는 구절을 밑줄 긋거나 필사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감상문을 쓰면 더 좋은지 등의 우문(愚問)이 그것이다.


내가 ‘우문(愚問)’이라 칭한 것에서 눈치챘겠지만, 그 질문을 한 이들은 아직 그 질문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좋은 스승이 있어 처음부터 방법론적인 것들을 일러주면 조금은 빨리 요령을 익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빠를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아도 되니 훨씬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거나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 많이 읽고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박학(博學)을 이루는 자는 없다.

공사를 하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없는,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마법을 원한다. 대한민국에 시험이 있어 온 이래도 ‘족집게 강사’라는 것은 늘 있어왔다.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보던 시대에서 학력고사를 거쳐 지금의 수능에 오기까지 그 족집게 강사들은 자신의 몸값을 학생들의 SKY 진학률로 증명해 왔다. 


그럴 수 있다. 왜? 그것은 시험이기 때문에 요령으로 점수를 얻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이 살아보니 인생이 시험 같던가? 시험에서 요령을 얻어 좋은 대학에 간 아이들이 나중에도 그 요령대로 모두 잘 살던가? 물론 확률적으로 족집게 강사를 찾을 정도로 정보에 민감하고, 그 정도 과한 비용을 투자할 수 있으며, 그런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의 지원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살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내 질문의 요지가 그것이 아님을 당신은 이미 눈치채고 있지 않은가?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요령을 익혀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르고 일가를 이루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낸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말이다.


심지어 이 장에서 말하는 박학(博學)은 책에서 익히는 단순한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문에서 학(學)은 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옛 문화와 문물을 통틀어 의미한다. 그것은 문학, 사학, 철학,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을 총망라하여 지칭한 것이고, 뒤에 실천에서 의미하는 예(禮)와는 달리 여러 가지 예의범절과 교양도 두루 공부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학문의 총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총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함께 매일 아침 <논어>를 그간 읽으며 배워왔던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정보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그 삶의 지식을 모두 총괄하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시대가 변해오며, 특히 인터넷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세상은 정보의 바다가 되어 버렸고, 그것은 비유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보의 바다’는 그저 정보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바다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이 부유하고 다니는 곳이다. 인터넷 이전의 시대가 KNOWHOW의 시대였다면 인터넷이 나오고 나서는 KNOWHERE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모든 정보를 담고 살 수 없기에, 제대로 된 정보가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제대로 된 정보가 어디 있는지 알려면 그것을 아는 족집게 강사에게 가면 되는가?


 아니다. 옥석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그것은 인터넷 시대에 맞게 속도전이 되어버렸다. 즉,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어 쓰레기 정보들 중에서 정작 정보가 되는 것들을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과 높은 안목을 갖춰야만 한다는 뫼비우스의 띠를 걷게 된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카더라’식으로 던지고 ‘아님 말고’라는 식의 대한민국 기레기 언론들이 주는 정보는 아예 백안시하면 되니 큰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 시비의 판단까지 지평이 확장된다면 어떨까?

검찰이 본래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경찰이 수사한 사안을 혹은 직접 의문이 가는 사안을 충분히 조사하고 파악하고 분석하여 누가 죄가 있는지 혹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조사하지 않거나 조사한 것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쪽으로 사안을 판단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정의고 나발이고를 떠나 사람이 해서는 안될 짓으로 타락하고 말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판단 때문에 누군가는 억울한 옥살이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아 또 그런 짓을 반복하여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사람들이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흔들린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과 구차한 변명이다. 돈을 먹고 이른바 손이 탄 사건을 만든 경찰들은 나중에 추궁을 받으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내린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검찰에서 분명히 바로잡아줄 겁니다. 그러라고 검찰이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검찰로 토스되고 나면 검찰에도 물론 검찰 수사관이 있고 검사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제대로 된 수사를 하여 경찰을 바로잡았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왜 듣기 힘들까? 오히려 기소해야 할 사건이라고 경찰이 올린 것을 검찰에서 뭉갰다는 뉴스만 한 보따리 들었던 것은 우리의 착시인가? 왜 그랬냐고? 그들이 먹고살려고 그런다. 그런 그들이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면 그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내 기소가 잘못된 것이라면, 법원에서 판사가 바로 잡아주겠지요. 법정에서 다퉈보세요.”


혹은 사건을 덮으면서는 나중에 그 사건이 재수사가 되어 버젓이 유죄가 인정되는 사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뻔뻔하게 이렇게 말한다.


“검사는 한 명의 독립수사기관입니다. 당시의 제 판단은 그랬고, 제 판단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옷을 벗은 사건에 대해서는 밖에 나와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게 뚫린 입이라고 할 말인가?

법원에 가면, 지엄하신 척하는 판사들은 제대로 그 일을 바로잡고 꼼꼼히 본다고 생각하는가? 법전에 나와 있는 내용조차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여 빈번한 실수를 내놓고서도 그 실수를 추궁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대한민국 판사를 감히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이들은 없다. 설사 판사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추궁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사법정의가 흔들리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과 대한민국의 사법정의를 일체화하는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차린 지 오래이다. 그들의 교리는 일제 강점기 일제의 앞잡이를 하던 가장 많이 배우고 판사직을 했던 이들에게서 그대로 답습되어 온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의구현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의 형제나 당신의 아빠나 당신의 친척이나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정말로 그러한지 자세히 보라.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밝혀지면 제발 그들의 얼굴일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부끄럽게 그러지 말라고, 제발 사람답게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라고 이야기해주란 말이다.

아니라고 우기는 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들에게 묻는다.


억울한 누명으로 경찰 조사 때부터 기소 과정을 거쳐 법원에서 3심까지 가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상황에서 경찰을 했던 자부터 검사, 판사에 이르기까지 지금 어느 누구 한 명이라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행동으로 망쳤으니 정말로 죄송하다며 사죄의 눈물을 쏟는 자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그래 놓고 그런 자들이 정치판에 매달려서 일본이 한국에게 뻔뻔하게 사죄하지 않네 뭐네 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뱉는 꼴을 속이 울렁거리지 않은 상태로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알아야 하는 것이며, 예로 제어하면 그릇될 일이 없다 한 것인데, 지금 어느 누가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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