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는 꿈속에서 周公을 뵙지 못하였다.”
이번 장(章)은 공자가 자신이 설정한 도통(道統)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공(周公) 단(旦)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내용이다. 이전 장들에서도 몇 번 언급되긴 했지만 공자는 道라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고 그 시대를 이끌어온 이들이 있어 그것이 계승된다고 여겼고, 노(魯) 나라의 시조, 주공이 그 적통을 계승했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공자가 그 철학과 사상과 예의 출발점을 그에게 있다고 보고 자신이 그것을 계승한 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장(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꿈에도 그려왔던’ 대상이 바로 주공이라는 점에서 그 따라야 할 대상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설정함과 동시에, 꿈에서조차 이제 만나지 못했다는 강조와 역설로 당대 현실이 혼탁해졌음을 우회적으로 탄식하고 있다.
주공(周公)은, 주 문왕의 아들이자 주 무왕의 동생으로, 주 왕조 초기에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키고, 주나라의 봉건제를 안정화시킨 인물로, 제후국 노(魯)의 시조(始祖)이기도 한 주공(周公) 단(旦)을 말한다. 무왕을 도와 은(殷)의 주(紂)를 치는 군사적 기반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초기 주왕조를 안정시키는 정치제도적 기반은 주공(周公) 단(旦)이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공망은 제나라에, 주공 단은 노나라에 봉해져서 시조로 추앙받아 후손들의 제사를 받게 되는데, 주공 단은 무왕이 아플 때 자신을 대신 제물로 죽게 해 달라는 제문을 올리고, 어린 성왕의 정치가 안정화되게 하고자 자신을 희생하려 노력한 점이 알려지게 되어 다른 제후국과 달리 천자의 예약으로 대우를 받게 되는 특별한 제후국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그런 주공(周公)이 공자의 꿈에서 나타나, 이 대책 없는 현실에 대한 타개책을 공자에게 알려주고는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말년에 된 공자가, 주공을 알현하는 꿈을 더 이상 꿀 수 없으니, 그 지혜를 배울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탄식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공자가 말년이 되어 노쇠해감에도, 계승해야 할 주왕조의 본래의 모습은 고사하고 점점 심하게 무너지는 주 왕조 때의 봉건제도의 질서, 그리고, 약육강식의 패권 분쟁으로 가중되어가는 상황을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 아파한 것이다. 이 춘추시대의 혼란함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에 대해, 주나라 초기, 400여 년 전의 성왕(成王)이 어린 시절에 닥쳤던 위기상황을 해결한 주공(周公) 단(旦)의 지혜에서 얻고 싶었다는 비유로 자신의 절박함을 토로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꿈에 주공이 나타나서 가르침을 주기를 바라고 바랬는데, 이미 노쇠해질 대로 노쇠하여 주공을 꿈에서 볼 수 없으니 스스로의 노쇠함이 안타깝고, 공자 노년의 춘추시대의 무질서를 타개할 묘책을 찾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행간(行間)이 잔뜩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주석을 달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가 젊었을 때에는 周公의 도를 행하려는 뜻을 두었기 때문에 꿈속에서 혹 周公을 뵈었었는데, 늙어서 道를 행할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러한 마음이 없어져 꿈속에서도 다시 周公을 뵙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의 쇠함이 심함을 못내 탄식하신 것이다.
이 주석의 방점은, 늙고 노쇠해서가 아니라 다시 이러한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에 있다. 젊어서 있었던 마음이 늙고 노쇠해서 없어졌다는 것인가? 늙으면 그럴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아는 성인의 자세가 아니지 않은가? 배우는 자들이 당황할까 봐서 정자(伊川)가 다시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공자가 젊었을 때에는 자나 깨나 늘 周公의 道를 행하려는 마음을 두셨는데,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의지가 쇠하여 할 수가 없게 되었다. 道를 두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은 늙음과 어림의 차이가 없거니와, 道를 행하는 것은 몸이니 몸은 늙으면 쇠하는 법이다.”
道를 행하려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道를 행하는 것은 결국 몸이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의미에 방점을 두는 이유는 ‘道를 행하는 것이 육체노동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라는 단순한 의문 때문이 아니다. 道를 행하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알아먹으라는 강조에 다름 아니다. 道를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 놈들도 문제지만 무엇이 옳은지 안다면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 더 나쁠 수 있다는 지적을 담고 있는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는 이들은 언제나 정의롭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롭게는 보인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어 선택에는 문제가 없다. 그 용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부모가 모두 서울대를 나와 대학 교수를 하며 자식 둘은 어느 한 명도 서울대를 들어가지 못한 것이 창피할 일은 아니다. 창피한 일은 그 자식들을 현대판 음서제라는 로스쿨이나 의전원에 넣겠다고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 서울대 출신의 교수 부모들 모두가 하는 짓인지는 알지도 못했었거니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처럼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이들이 그따위 짓을 한다고 듣고 보기는 했었다. 그렇게 자식을 진학률이 좋은 외고에 보내고 그래도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서울대를 못 들어간다고 다시 부모 찬스를 꺼내 어떻게 해서는 로스쿨이나 의전원이나 치전원을 보내려고 했던 아주 적은 몇몇 못난 부모들이 대표로 철퇴를 맞았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의 딸을 서울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저 이름뿐인 모 여대에 넣겠다던 최순실을 욕하고 그녀의 딸을 황급히 퇴학시켜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이 최순실보다 더 욕을 많이 먹고 지금 재판정에 선 것보다 더 심한 국민들의 지탄과 조롱을 받는 이유이다.
학력을 위조해서 소위 상류층들에게 잘 보여 고위 공직자와 불륜을 뜨거운 연애처럼 했던 여자를 온통 까발려 희대의 마녀로 만드는 검찰 수사를 담당했던 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후보로 나와 오십이 넘어 결혼한 자신의 아내가 더 심한 학력 위조와 부풀리기를 했는데, 그게 뭐 대단한 거짓말이나 문제가 될 것이 있느냐며 당당하게 카메라에 대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선거에서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말이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에서 할 말을 잃었다. 무식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압박하고 윽박지르며 갑의 입장에 있던 자여서였을까? 그는 누가 봐도 자신이 감옥에 집어넣었던 여자보다 더 심한 짓을 한 아내를 두둔하고 앉아 있었다.
심지어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지 대통령의 아내를 보고 대통령을 뽑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보좌진의 누군가 작성해준 정신 나간 원고의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다시 반복하였다.
공자는 젊었을 때 세상을 한번 바로잡아보겠다고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노력은 계속 수포로 돌아갔고, 세상은 오히려 더 혼탁해져 갔다. 제자들을 양성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자신이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적다는 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분통하고 아쉬웠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이루어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인생이 저물어감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누워서 세치 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현장에 나가 지휘를 해야 하고 토론장에서 호통을 쳐야 하며, 무엇보다 그것들 위해 현장과 민심을 알려면 늘 열려있는 눈과 귀로 소통을 해야 했기에 노쇠해져 가는 자신의 육체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그릇된 것을 ‘공정과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할 때는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제대로 하라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도 위배되고 공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깨끗해야만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지적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장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본다면 이것은 실천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행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안다.’라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성격 때문에 바른 소리를 잘 못하는 이들이 그런 변명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목소리가 잘못된 부분을 어차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목소리 자체를 내지 않는다는 이들의 비겁한 핑계가 그러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향해 ‘내가 뒤에서 응원할게. 나도 그게 옳은 건 알아.’라고 말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안다면 그러지 않으면 된다. 결국 그들의 같잖은 변명은 ‘살찌는 건 싫어. 그런데 저녁에 먹는 야식이 가장 맛있어.’와 같은 것이고, ‘남의 자식이 뭔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것으로 좋은 대학을 가거나 기득권을 얻는 것은 내 배가 아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지만, 내 아이가 능력이 안되면 내 능력이든 사돈의 팔촌의 능력이든 십분 활용해서 올려줄 수 있으면 그걸 왜 안 해?’라고 하는 심보와 똑같은 것이다.
‘검사가 덮으면 범죄이어도 죄가 안되고 검사가 파면 아무것도 아닌 것도 죄가 된다.’라는 법조계의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검사가 할 수 있는 능력치를 한 문장으로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죄가 안 되는 걸 자신의 입장에서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따져가며 죄를 만들고, 죄가 없는 사람을 탈탈 영혼까지 털어 재판에 세우고 감옥까지 밀어 넣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후진국이던가? 그들만 보면 필리핀 경찰들이 멀쩡한 한국인에게 돈 뜯어내려고 세팅 범죄를 만들던 상황을 우리가 비웃고 욕할 수 있을까 싶다.
‘공정과 상식’?
풉~ 그 단어가 온전하게 힘을 받기 위해서는 ‘실천’이 감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 먹어 노쇠하여 실천할 수 없음을 저리도 탄식하는 공자를 보고 느끼는 바가 없으면 당신은 사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