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떠는 옌 May 10. 2024

여름과 겨울 그 사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어텀(Autumn)'이 될 수도 있다


[500일의 썸머]의 남자 주인공 '톰'은 여자 주인공 '썸머(Summer)'와 뜨거운 사랑을 하고 홀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어텀(Autumn)'을 만난다. 사실 영화는 톰과 어텀은 첫 만남의 인사로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고 차 한잔의 약속만을 남긴 채 영화의 막을 내리는데. 그들이 씽잉 썸원으로 끝날지, 연인으로 발전할지, 발전한다면 500일을 넘기는 연애를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즉, 열린 결말이다.


나는 그 결말을 '어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해 처음 맞이한 새로운 가을, 계절에 맞는 옷을 사 입고 그것들로 옷장을 가득 채워 보려 했다. 하지만, 그 계절은 금방 지나가기 마련. 이미 여름옷들로 가득 채워진 옷장을 보며 가을이 왔다고 해서 곧장 새로운 옷들을 장만하기보단, 일단 있는 옷을 겹겹이 입어 새로운 옷인 마냥 때워 본다. 지난 여름의 옷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지난 계절이 길었던 탓을 하며, 4계절 중 유난히 여름과 겨울에 비해 그 사이의 가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새로운 날씨를 체감할 때쯤이면 그제야 또 새로운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 과정이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에 가장 급격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반팔 위에 얇은 코트 하나 걸쳐 입으면 다른 옷인 것처럼 비출 수 있으니. 그렇게 대체될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다.


사람 중에서도 '가을'의 역할을 해줄 이가 누구나 필요하거늘. 우리는 지난 계절을 어떤 사람과 얼마나 보냈느냐에 따라 다른 옷들이 쌓인다. 처음에 몰랐던 그 계절 나의 스타일을 추천해 준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걸치고 나갔던 옷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말해줬던 누군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 옷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 계절이 지나 또 다른 누군가 나를 보았을 땐 그 옷이 어울리지 않았던 것. 그것이 각 사람의 옷장을 아무리 비교해 보아도 다른 이유이지 않을까. 우리는 이 방식을 거치며 옷장을 바꿔 나간다. 점점 나에게 맞는 것들로.


사람이 가진 모습 중 아쉬우면서도 필연적인 습관은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그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내 모습이 만들어진 것처럼. 하지만, 이 현재 또한 먼 훗날의 과거가 된다는 걸 알고있다. 옷도 여러 벌 입어보며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듯. 새로운 스타일로 나의 옷장을 계속 다시 채우듯. 새로운 사람을 나의 계절로 들이는 과정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매번 새로운 사람을 입어보고 벗어보면서 나 자신을 찾아간다. 그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나만의 스타일, 즉 가치관과 정체성 등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더 맞는 것을 찾아간다. 나는 이 과정을 '가을'이라 부르고 싶다.


감사하게도 1년의 4계절은 반복해서 다시 돌아온다. 지난 옷들을 다시 꺼내들 수 있으니. 반대로, 잔인하게도 지난 여름날 나에게 어울렸다고 생각했던 옷이 지난 1년이 사이, 혹은 다음 계절에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처음 만들었던 옷장을 다시 꺼내 보이자 어딘가 부족해 보일 때. 더 이상 그때의 나와 그 계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모든 게 변해있다. 그제야 지난 계절로 채워진 옷장을 한 칸씩 비우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다른 것들로 채우는 노력을 일삼는다.


처음 맞이한 계절, 처음 입어 본 옷, 처음 만들어 본 나의 옷장, 그리고 그 옆에 있었던 처음의 누군가. 그때의 우리는 모든 게 미성숙했다. 영화 속 '톰'처럼. 그래서 '가을'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계절이다. 가을은 지난 과거의 옷장이 은근슬쩍 내비쳐지는 과정이자 여름과 겨울 사이의 계절로 그것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비록 짧을지라도 '가을'이 필요하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어텀'도 '톰'에게 계절의 '가을' 같은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썸머'와의 지난 500일의 시간이 묻어 있던 그를 만나면서 그녀도 계절의 '가을'처럼 짧게나마 그의 곁에 있었을 것 같다. '톰'은 '어텀'과의 만남을 통해 지나간 '썸머'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과거를 청산하며 처음이라 서툴었던 연애방식을 곱씹고 자신에게 알맞는 연애 가치관을 적립했을 거라 생각해본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되었을 땐, '썸머'가 나쁜 X으로만 남지 않길 소망하며.


우리도 누군가의 톰이자, 썸머였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어텀'이 될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속 시끄러운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