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떠는 옌 Apr 21. 2024

혓바늘이 쏘아 올린 작은 포

“작은 조약돌이 큰 호수를 울리더라”


모든 시즌의 시작 2023년 3월. 대학교 4학년을 맞이한 나는 어느덧 20대 중반을 달려가고 있다. “반이나? 반 밖에?”. 사람마다 체감은 다르니 어느 것이 정확한 시간 흐름의 개념인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빠르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새내기로 대학교에 입학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화석이라 불린다.

그렇게 시작한 새해 3월. 작년의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지내던 나날들을 보내던 무렵. 갑작스럽게 내비치기 시작한 몸속 ‘예민(銳敏)’ 반응이 나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내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있다면, 단연코 웃을 때 예쁘게 씩- 올라가는 입꼬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내가 입꼬리가 사라졌다. 그것도 왼쪽만. 

워낙 웃을 때 입꼬리가 활짝 올라가 눈에 띄던 상이던 터라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에 비해 확실히 쳐지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명 ‘구안와사, 벨마비, 안면마비’라 다양하게도 불리는 병에 걸린 것. 


때는 3월 17일, 처음에는 왼쪽 혀에 작은 통증으로 시작되어 여느 때와 같이 혀 앞부분에 작은 혓바늘이 났구나 싶었다. 최근 사람 만나는 자리도 많았고 다시 시작된 학기 생활에 적응 중이라 조금 피곤했나 보다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여느 혓바늘과는 고통이 남달랐다. 근래 꽤 많이 피곤했나 보다 싶어 진통제와 비타민 몇 알을 챙겨 먹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나을 것이라 믿어봤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날수록 점점 고통이 심해지더니 혓바늘이 왼쪽 입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편도가 붓고 염증까지 생기더니 물만 마셔도 아픈 지경에 이르렀다. 숨을 쉴 때마다 혀에 바람만 닿아도 따가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감기 걸릴 때마다 갔던 근처 ‘이비인후과’에 방문했다.



첫 번째 진단은 단순 구내염으로 판정 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 혀에 검은 약을 시커멓게 발라주셨다. 약으로 인해 입술까지 까매진 나는 바로 집으로 가 간단한 빵조각과 약을 먹고 난 후 휴식을 취했다. 계속 잠에 들었다 깼다 반복하며 약 효과가 나길 기다렸다. 약만 먹으면 금방 나을 줄 알고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을 감아 보았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통증은 지속됐다. 아니 계속해서 더 거세어졌다.


고통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나는 두 번째 병원을 찾아 방문했다. 그렇게 찾아간 두 번째 병원은 버스 타고 30분 넘게 가야 있는 ‘구강 내과’. 

두 번째 진단은 심한 구내염으로 판정. 일주일 후에도 호전되지 않으면 구강작열감으로 판정된다고 하셨다. 진료 끝에 스테로이드 가글과 연고를 처방받았다. 그날 밤, 나는 입안에 연고를 가득 발라 마치 재갈 물린 사람처럼 입 하나 벙긋하지 못하는 채로 잠에 들었다. 그러나, 스테로이드 가글을 하고 입에 연고를 바르고 세 밤을 보내도 통증이 나아지긴커녕 점점 더 심해져 낮에도 제대로 입을 열고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일반 진통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5알 정도 먹었다. 한 번 먹으면 2시간 정돈 버틸만했다. 그렇게 또 2일을 더 버티고 나니 진통제까지 소용이 없었다.


점점 두려움이 몰려온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나 설암은 아니겠지..”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체력관리가 소홀한 내가 젊은 나이에 운 좋지 않게 설암에 걸린 건 아닌지 쓸데없는 잡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걱정을 한 바가지 안고 세 번째 병원으로 향하던 길.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터져 나오는 설움을 참지 못해 길에 주저앉아 꺽꺽거리며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버지의 진심 어린 걱정에 재차 정신을 차리고 다른 이비인후과를 가봤다. 차라리 큰 병이면 빨리 진단받고 치료를 받고 싶었는데 세 번째 진단도 구내염으로 판정받고 빨리 끝났다. 아무 죄도 없는 의사 선생님들까지도 원망스러웠다. 선생님이 진단한 병보다 나는 더 심각하고 아프다고 생각하며 답답했기 때문. 

그 원망이 소용없지 않게 여전히 세 번째 병원에서 준 약을 먹어도 진통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저녁도 울면서 죽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진통에 온몸을 움츠린 채 또 새벽을 버텨야만 했다.


다음날, 일정을 모두 뒤로 한 채 아침 일찍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갔다. 신속하게 하루 입원 절차를 밟고 항생제며 영양제며 수액을 맞으며 당일 낮부터 밤까지 잠을 취했다. 진통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예 혀를 마비시켜 사라지게 한 느낌이 강했지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통증이 좀 가라앉자 당일 날 바로 퇴원했다. 입원 보단 수액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다녀온 것.



일일 병실체험 후, 집에 도착해 화장실 거울을 보며 아픈 곳을 확인하고 보니 약을 너무 많이 투여했나 싶었다. 마비된 기분이 자꾸 사람을 싸하게 만들었기 때문. 나는 이상한 기분을 뒤로한 채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평소처럼 휴대폰 카메라를 켜 얼굴 상태를 확인하며 씩- 미소를 지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좀 어색했다.


나는 마지막 웃음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