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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Nov 24. 2021

좋은 그림이란 무엇일까?

잘 그려진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다

최근에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것은, 좋은 그림의 정의가 참 다양하다는 것이다. 



상업 일러스트를 그리다 보면 그림책, TV 타이틀 일러스트, 웹용 일러스트, 패키지 디자인 등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생계를 위해 다양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의 영역이 넓어짐과 동시에, 그림이 어떤 용도로 누구에게 보일지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을 타깃으로 한 그림을 그림책의 유아용 스타일로 그릴 순 없으니, 한 분야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선 그 분야에 대한 리서치와 분석을 해야 하는 건 이제 기본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분야를 아우르든 간에, "좋은 그림"에 대한 나의 해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좋은 작품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기억되어, 내가 내 그림에서 방향을 잃을 때에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 작품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잘 그려진 그림
-좋은 관찰력, 그리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개성



우리가 좋은 그림, 혹은 디자인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개성을 드러내기 이전에 좋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다. 좋은 그림 이전에 "잘" 그려진 그림, 예리한 관찰력으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잘 강조해낸 그림. 원하는 의도를 잘 표현하기 위해 적재적소로 효과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만들어진 그림.


이렇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잘 그렸네!" 하는 정도의 그림들은 이제 미술대학을 졸업한 모든 예비작가들이 다 해낼 수 있는 평균점이 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나라의 미술 입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살인적이라, 사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세계 평균적으로도 정말, 정말 정말 그림을 잘 그린다고 늘 생각한다. 감탄한다! 어떻게 저렇게 잘 그릴 수 있지?



난 여기에 더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색깔로 덮어버리는 "개성"을 더 추가하고 싶다. 



나의 경험으로는, 기술적으로 잘 그리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걸 목표로 삼다 보면 자신의 색깔을 점차 지우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들이 넘쳐나고 당장 클래스 101 같은 창작자 공유 콘텐츠에 들어가 보면 저렴한 값에 좋은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개성"을 이끌어내 주는 맞춤식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AI 소프트웨어 조차도 유명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인공지능이 고도화되었지만 기계는 자신의 "스타일"을 가질 순 없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 결국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작가는 고도화된 기계조차 이길 수 있을 정도로의 강렬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초현실주의의 대가 호안 미로의 작품. 아이와 같은 단순한 선과 형태가 인상적이다.
샤갈의 Lovers over Paris.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사실 이렇게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나로서도, 실무에서는 나의 개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안고 산다. 자신의 것을 갖고 깎는 과정이 몇 년간 지속되면 패기에 찼던 지난날의 나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만 맞추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그림
-타인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그림이 과연 좋은 걸까?




누군가로부터 그림 좀 그려달라는 의뢰가 없으면 단 한 장도 완성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게으른 상업작가인 나로서는, 결국 일을 통해 그리는 그림이 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 수단 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늘 이런 돈이 개입된 게임에서는 이런저런 요구사항 때문에 늘 돈을 받는 입장인 내가 더 아쉬울 때가 많다. 이런 제안은 정말 별로로군,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그냥 내가 했던 대로 해주면 안 되나? 아 정말 짜증 나는군.... 오늘도 이 그림 그리는 기계는 불평을 구시렁 늘어놓으며 심장이 졸리는 마음으로 마감을 향해 달린다.


나의 경험상, 들어오는 돈이 많은 프로젝트는 그만큼 나의 표현적 제약이 많은 편이다. 얹어지는 돈이 많아지는 만큼 그들이 내게 수용하길 원하는 요구사항 + 타이트한 데드라인이 포함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적은 돈으로 일하는 경우엔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많아지고 시간도 더 느슨한 경우가 많다. 둘 다 장단점은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와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나는 전자를 조금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 제한적인 자유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먼저 논리적으로 제시해서,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많이 제시해주면 더 좋지 않을까?



이미 상대방에서 짜인 맵을 따라가다 보면 수월하지만 결국 지루함에 의욕을 잃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것을 어떻게든 녹여내지 않으면 아무리 그것이 내가 원해왔던 일이라도 쉽게 의욕이 꺾여버리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결국 누군가의 심부름이라고 생각되면 받는 돈이 얼마가 되든 간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좋은 대안점을 먼저 대신 찾아주는 건, 그만큼 나를 작품에 녹여내는 아주 능동적인 행위이다. 좋은 그림을 그린 다는 건 잘 그린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매우 논리적인 행위가 아닐까? 심리적인 협상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기개와 패기를 가진 사람은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버리고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런 자세가 사실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닐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걸작 유디트. 완벽한 인체 묘사와 함께 다른 작가들이 그린 유순한 유디트와는 다른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탈리아 역사상 피렌체 미술아카데미의 첫 회원이 되었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여성이 그렸다고 하기엔 너무나 잔인해서, 심지어 완성을 하고도 대금을 받지 못할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본인의 개인적 아픔과 경험을 녹여낸 이 작품은 그 어떤 피렌체 예술품보다 독보적인 개성을 가진 강렬함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그저 표면적인 여성적 아름다움만을 드러내어 클라이언트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려고 한 여타 다른 남성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이 작품은, 특히 여성 작가로서의 다사다난한 인생이 함께 담겨져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슬픔,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정수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 뮤지컬의 라스트 송인 "Dance My Esmeralda"는 언제나 들어도 나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갖고 있다. 성의 종지기로 평생을 자라온 추한 콰지모도와 그런 그를 거둬서 키웠지만 집시인 에스메랄다에 대한 금지된 욕망에 사로잡힌 신부 프롤로, 난봉꾼 페뷔스, 그리고 이 모든 스토리의 중심에 있는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 자고로 이 욕망의 사각관계에서 늘 희생당하는 건 언제나 가장 힘이 없는 사람, 이방인 여성이다.


https://youtu.be/Xn1U87rr1EA

콰지모도의 라스트 송 "Dance My Esmeralda"


그 누구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추한 얼굴의 콰지모도를 유일하게 키워준 프롤로. 그런 신부 프롤로의 추한 욕망을 두고 보지 못하고, 그를 성당에서 밀어 떨어트린 콰지모도가 신부의 모함으로 죽은 에스메랄다를 끌어안고 부르는 노래가 "Dance My Esmeralda"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나 다름없는 신부를 죽여야만 했던 콰지모도를, 그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서 팡틴이 부르는 "I dreamed a dream" 은 미혼모인 팡틴이 생계로 인해 사회의 마지막까지 내몰려진 이유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사랑". 그녀는 철새처럼 여름에 자신 옆에 머물렀다가 사라져 버린 남자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끔찍한 현실이 꿈이길, 아직도 달콤한 꿈속을 헤매는 중이기를 처절하게 바라는, 분명 당시에 수없이 많았을 버림받은 미혼모들의 절망을 노래로 승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 노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는 미혼모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기 때문이고 전 세계적으로 정상 사회의 테두리 밖에 사는 이들에 대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https://youtu.be/ulJXiB5i_q0

앤 해서웨이의 "I dreamed a dream" 



난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이 좋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가장 약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내몰려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이하는 과정을 당시 사회 상속에서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림, 음악,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하게 변주되어 예술이 예술을 낳듯이 20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많은 이에게 영감을 준다. 그 이유는, 삶의 근본이 "슬픔"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나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가족과 집, 재능을 물려받지만 우리는 살면서 하나씩 그것들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원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불행해지기도 하고,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혹은 아예 가지지 못한 것이 많아 괴롭기도 하다. 좋은 작품들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태어날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운명 같은 삶의 괴로움들을 잘 승화시켜 보여준다. 가끔 찰나 같은 행복은 그런 끔찍함을 잊게 해 줄 뿐, 인생의 근본이 슬픔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슬픔이 잘 정제되어 엮이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고, 그 작품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죽는 건 너무나 쉽지만 살아낸 다는 건 너무나 어렵다. 삶의 행복이 달콤한 이유는 인생이 본디 이렇게 어렵고 슬픈 여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슬픔 속에서 행복을 본다. 에스메랄다를 끌어안고 노래 부르는 콰지모도의 표정이 꿈결처럼 슬프지만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나도 감히 언젠가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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