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Nov 17. 2021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

#1. 나날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작가의 세계

무슨 일이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대학원을 졸업한 후 3년 차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지만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잘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아니, 해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자신감이 붙을 것만 같지만, 오히려 새로운 문 앞에서 걱정이 태산이다. 돌아볼 수 있는 내 작업들이 많아진 만큼, 나의 지난날의 단점과 실수가 더 많이 보여서일까? 해가 갈수록 쉽지 않은데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괜한 걱정만 앞선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자신감이 많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국내와 해외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일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실상은 그 반대다. 더 늦기 전에 조바심을 먹고 공부를 하러 비행기를 타자마자 밀려오는 불안감과 바닥 치는 자신감,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먹히고 싶지 않아서 2년을 버텼고, 그렇게 오자마자 작업실을 구해서 일을 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막연한 불안함 때문이었다. 불안함에 대한 나름의 프로의식이랄까?



그렇다면 지금은 좀 덜 불안하냐 싶으면 아니, 정 반대다. 더 불안하면 불안했지,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 시작된지도 이제 3년이 넘어간다. 일러스트레이터는 혼자 작업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개인적인 것과 일에 대한 모든 고민을 혼자 떠안으며 일하기 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디오를 틀어도, 뉴스를 틀어도 그저 듣기만 할 뿐 거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림만 그리는 날이 다반사다 보니, 가끔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림이든 글이든 무엇이 되었든지, 예술가는 혼자 작업해야 하는 고독한 직업이라는 걸.



내가 내 직업의 성격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실제적인 내 일에 대한 어려운 점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해보니, 창작이라는 작업이 본래부터 쉽지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림책, 그 길고 긴 마라톤
통일성 있게 40페이지의 그림들을 그리는 방법은?


그림책은 호흡이 긴 프로젝트이다.



길게는 1년, 짧게는 최한 4개월 이상은 걸리는 중장기 프로젝트이면서 출판물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초반부터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잘 모르면 아주 세부적으로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포맷으로 출판사에 제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  가로세로의 길이와 해상도는 얼마나 되는지, CMYK모드라면 특별히 요구하는 CMYK 모드 종류가 있는지, 각 페이지의 여백이 얼마나 되며 커버 이미지의 크기는 또 어떻게 다른지... 초반부터 적어놓고 붙여서 계속 확인해야 할 정보들이 많이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독자 규격인 Inch(인치)를 기준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포토샵에서 Inch로 세팅해서 파일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US Letter라는 것이 있어 우리와 같은 A4용지에 작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잘 모르면 인치를 센티미터로 변환해서 적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밀리미터 단위로 틀린 경우가 많아서 그냥 인치를 기본으로 작업하는 게 좋다.


나는 주로 글작가의 글을 받아서 그림만 그리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지만, 글을 안 써서 더 쉽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주로 워드로 작성된 스크립트를 받고 아주 세부적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모르는 용어가 있으면 찾아보고 주석을 달고 그래도 잘 모르면 많이 질문을 해야 한다. 또한 스토리보드 작업은 전체 작업의 50%가 넘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오지 않으면 그 느낌이 다음 파이널 작업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북미나 유럽은 한국처럼 그림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는 포맷이기 때문에,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흐름을 의식하며 구도를 짜고 인물을 넣어야 하기에 매우 머리를 많이 쓰는 골치 아픈 작업이다.



여러 수정작업을 거치다 보면 프린트물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뿐만 아니다. 인물이 페이지의 중간에 끼지 않도록 조정해야 하며, 비네트 vignette (작은 삽화 형식의 일러스트)  그림과 풀 페이지 full-page 일러스트를 적절히 섞으면서 구도가 지루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스토리보드 작업은 건축의 설계 작업이며 이 설계가 제대로 안되면 마무리 작업이 예쁘게 되지 않기에, 이 단계에서 아트 디렉터와 많은 조율을 하게 된다. 스토리보드는 주로 2,3회 정도의 수정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세부적인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구도를 디렉터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러프하게 단색, 혹은 제한된 색상으로 보여주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된다. 또한 눈을 여러 번 쉬면서 같은 스토리보드를 여러 번 봐야 더 개선할 점이 보이기에, 스토리 보드 작업은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가지는 게 좋다.



이렇게 머리 아픈 스토리보드 작업이 끝나면 드디어 본격적인 컬러 작업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스토리 보드를 지도삼아 그림을 완성시키는 아주 지루한 과정이 시작된다. 나는 이미 스토리 보드에서 머릿속에 모든 완성작을 다 그려놓은 것 같은데, 그걸 다 손으로 구현해야 한다니!!! 게다가 남은 시간도 별로 없다. 이쯤 하면 남은 날짜들을 주 단위, 일단위로 쪼개서 한주에 몇 개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계산이 된다. 이미 내가 보내준 샘플 일러스트레이션 -대부분 출판사들은 본 작업 전에 작가에게 일부 페이지의 완성본을 1-2장 정도 요구한다-의 퀄리티만큼 다른 그림들도 잘 그려야 할 텐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름 먼 곳에 있는 한국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구태여 일을 맡긴 건데, 그만큼 잘할 수 없으면 실망하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안고 파이널 데드라인까지 꾸준히 자신을 컨트롤하면서 하다 보면 겨우겨우 끝을 맺게 된다. 물론 그 후에 수많은 수정사항이 적힌 메일을 곧 받게 되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연속성이 중요하기에 페이지마다 그림 스타일이 너무 다르면 곤란해져서, 최대한 모든 그림들의 톤을 통일성 있게 맞춰야 한다. 인물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는 옷이 달라지지만 주인공의 경우 전체적인 인상이 달랐지만 안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염두하고 작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초반 캐릭터 디자인 시트를 앞의 보드에 붙이고 계속 확인하면서 그리는 편이다.



이러다 보니, 그림책 프로젝트 제안을 받을 때마다 일이 들어와서 너무나 기쁘지만, 이제 또 시작이구나... 하는 걱정과 불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심지어 제안받는 그림책 내용들은 모두 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니, 또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자 도전인 셈이다.



난 언제쯤에야 이 일에 익숙해질까? 글쎄,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전 07화 작가는 SNS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