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근본으로 돌아가보자
올 상반기동안 열심히 놀고 또 꾸준히 작업을 해왔다. 그렇게 한 두 달 정도 여유를 갖고 쉬다가, 최근에 제안을 받은 그림책 작업은 다름 아닌 "Wordless Picturebook", 즉 "글 없는 그림책"이다! 작년 말,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면서 올해에는 어떤 일을 맡게 될까 많이 궁금했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처음으로 글이 없는 그림책을 그리게 돼서 그림작가로서 꽤나 흥미롭다!
이번 작품은 올해부터 시작해서 내년 중순에 끝마칠 예정으로, 실제로 서점에서는 2025년 경에 볼 수 있다. 대개 작업을 마친 후 1년 정도 후에 출판되기 때문에, 이번 책도 실물을 받아보기 위해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가끔 기억 속에 잊힐 때쯤 출판사로부터 샘플 카피본들이 오는데, 받아 들 때마다 뿌듯함과 함께 1년 전 작업물을 내 눈으로 다시 봐야 하는 괴로움도 같이 존재한다. 대체 언제쯤 인쇄된 내 그림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글 없는 그림책이란?
간혹 가다가 그림책 중에 아예 글이 없이 그림으로만 구성된 책을 보게 된다. 말 그대로 Wordless 이기 때문에, 이런 그림책은 앞뒤 서문이나 출판 정보를 빼면 글자 자체가 없다. 어떻게 보면 "그림책", Picture Book이라는 근본에 더 맞닿아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이 없어도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잘 모르는 영유아 아이들이 보기에도 좋다. 혹은,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책을 펼쳐보면서 페이지마다 어떤 인물과 사물이 있는지 엄마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글이 없는 대신, 일러스트레이션이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찾아볼만한 것들이 일반 그림책에 비해 더 많이 있다! 그만큼 아이와 엄마가 같이 대화하면서 소통할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동안 도서관 문턱을 드나들며 글 없는 그림책들을 여러 권 감상해 보았다. 그중 가장 내 기억에 오래 남았던 재미있는 책들을 몇 권 소개하고 싶다.
1. 여러 번 다시 보게 되는 매력
처음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았을 때 엄청난 크기에 놀라고, 페이지마다의 모든 일러스트레이션의 그 엄청난 세밀함에 두 번 놀랐다. 이 "수잔네" 그림책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많은 분들이 이미 이 책을 알고 있을 듯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네 개의 계절을 통해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하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한 화면에 펼쳐 보이고 있다. 그저 일러스트레이션의 나열이 아닌,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각자의 스토리가 있어서 정말 즐겁다! 시선의 방향은 직선적으로 흘러가지만, 그저 몇몇 마을 인물들의 이야기를 계속 쫒다 보면 못 보고 놓친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결국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기 위해, 페이지가 닳도록 여러 번 처음부터 보게 된다. 작가의 뚜렷한 라인 드로잉 덕분에 각각의 인물을 찾는 것도 어렵지가 않다.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아직도 여러 번 보게 되는 명작 중 명작이다.
글이 없는 이 그림책은, 노란 풍선이 주인공이다. 우리 모두 어릴 적에 풍선을 놓치면, 놓친 풍선이 어디로 가서 어떤 모험을 할지 한 번쯤 궁금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노란 풍선이 마을을 떠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유럽도 지나고 바다와 사막을 건너 멀리멀리 모험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하늘 아래에 동시대의 사람들과 중세, 근대 시대의 사람들이 같이 섞여 시간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노란 풍선뿐만 아니라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는 아저씨, 물건을 나르기 위해 떠나는 파란 차 등등... 페이지마다 같이 찾아낼 만한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이런 모든 스토리들이 작가의 독특하고 세련된 그림체와 어우러져 페이지마다 매우 조화로운 걸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는 이 그림책은, 데청 킹이 만든 "케이크"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동물 이웃들이 살고 있는 한 마을에서 "케이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숨 막히는 사건들을 정말 코믹하게 풀어낸 그림책이다. 역시 아주 간결한 라인 드로잉으로 그려진 인물들 덕분에,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과 특징들을 페이지마다 쉽고 즐겁게 찾아볼 수 있다. 수잔네 시리즈처럼, 이 작품도 각각의 캐릭터마다 강렬한 개성이 넘친다! 그들의 개성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코믹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꼬마 캐릭터들의 악동 같은 모습은 이야기의 감초와도 같다. 이야기 속의 큰 반전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2. 아름다운 자연은 말이 필요 없다
피터 스피어는 여러 번 그림책 수상을 한 저명한 원로 작가 중 하나이다. 글이 없는 그림책을 여러 권 만들었는데, 그중 이 "야호, 비 온다!"는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순수함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른이 된 우리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또 집이 더러워지겠군..." 싶어서 걱정부터 하지만, 어른의 보호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비 오는 날은 큰 즐거움이다. 이 책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지루한 아이들이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밖에 나가 "즐겁고 재미있게 놀다 오는 것". 우리가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순수한 감정을 이 그림책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된다. 이 그림책의 순수함은, 분명 글이 없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글이 없어도 "쏴아아-" 하고 내리는 빗줄기, "풍덩풍덩, 첨벙첨벙" 거리며 내딛는 아이들의 발걸음, "똑- 똑-"거리면서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이런 효과음을 넣었다면, 혹은 아이들의 대화를 하나라도 넣었다면 과연 결과물은 어땠을까? 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 내리는 대자연 속의 다양한 소리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참 즐겁다.
3. 가끔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림책을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은 이 시리즈를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원로 작가 안노 미쯔마사의 "여행 그림책" 시리즈는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다양한 도시들을 매우 세밀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4k 고화질로 편하게 유럽의 소도시들을 감상할 수 있지만, 이 그림책이 만들어졌던 시기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은 정말 큰돈을 들여 겨우 갈 수 있었으며, 그저 외화 드라마나 영화, 티브이의 짤막한 여행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만 살짝 엿볼 수 있는 귀한 곳이었다. 나도 이런 시기를 지냈던 사람으로서, 유럽에 대한 정보는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책이나 "먼 나라 이웃나라" 같은 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여행 그림책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여행을 하는 것 같은 큰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세밀한 그림들 속에 숨겨진 다양한 인물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0여 년 전, 영국에서 태어난 마틴 핸드포드 작가가 그린 이 "월리를 찾아서" 시리즈가 없는 집은 전 세계적으로 정말 드물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 월리를 찾아서 시리즈를 빼놓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집에서 하던 인형놀이도 재미없고, 같이 놀 친구가 없을 때에 엄마가 이 월리 시리즈를 내게 던져주면 몇 시간이고 집중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이 "월리를 찾아서" 첫 책과 "할리우드" 편이었는데, 각각 페이지마다 월리랑 그 친구들, 마법사 아저씨와 월리가 흘리고 다니는 별별 아이템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굳이 월리를 찾지 않더라도, 페이지마다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4. 만화적인 칸 배분 방식과 줌 앤 아웃
이미 글 없는 그림책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한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들은 이미 뛰어난 고전이 되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은 그림책이면서 동시에 코믹북과 같은 다양한 화면 연출로 유명하다. 한 페이지마다 다양한 칸 분할 방식을 채택해서 자칫 장황할 수 있는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상당히 만화적인 연출도 많아서, "글 없는 그림 만화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작가 특유의 매우 사실적이면서 뚜렷한 라인 드로잉 덕분에, 그림이 군더더기가 없고 매 장면마다 정말 깔끔하다. 글이 없는 대신, 일러스트 하나하나마다 재미있는 요소들을 세밀하게 그려 놨으니 그런 요소들을 여러 번 뒤져가며 찾아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마리아키아라 디 조르조는 이탈리아의 그림 작가이며, 다양한 그림책에서 그림작업을 맡아온 중견 작가이다. 손그림으로 그린 감각적이고 정감 있는 일러스트들이 유명한데, 디지털 작업이 보편화된 최근에도 손그림을 주로 그리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이다. 이 두 그림책에서 그녀의 작업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데, 천재적이고 감각적인 색감으로 화려하게 그려진 "쉿, 수상한 놀이공원"을 보면서 난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가고 떠나버린 놀이공원에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파티를, 완벽한 드로잉 감각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악어 씨의 직업"의 주인공인 악어 아저씨는 사람과 동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복잡한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마지막에는 귀여운 반전도 있으니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꼭 일독하길 추천한다. 이 책들 모두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처럼 페이지마다 만화적인 칸 배분을 해서 스토리의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늘 글와 대사가 있는 그림책에 익숙하다 보니, 글 없는 그림책만 골라 감상하며 공부하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인상적인 대사 하나"보다 "인상적인 그림 하나"가 독자의 머릿속에 더 오래 남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책"이라는 책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와닿는 것이 바로 "글 없는 그림책"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