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판사와 에이전시 문화
아트 디렉터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한국 웹툰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
최근에 한국 웹툰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웹툰 계약에 관한 여러 에이전시들이 많이 생겨났다. 10여 년 전, 대부분의 웹툰 작가들은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바로 웹툰 아마추어 연재란으로 데뷔했었다. 당시의 웹툰들은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글과 그림을 같이 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었고, 따로 분업한다 하더라도 모든 계약은 웹툰 포털사이트와 직계약을 했다. 요구되는 그림 수준도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사실, 충분히 혼자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작가가 혼자 웹툰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요구되는 작업량이 워낙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웹소설 코미컬라이징이 흔해지면서 요구되는 계약 방식도 더 복잡해졌다. 드라마나 영화화가 되는 경우도 많아서 이런 경우 법조 전문가들이나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마음 놓고 계약하는 게 참 어려워졌다.
그 이유는, "웹툰"이라는 정말 독특한 방식의 한국 만화구조가 점차 고도화, 산업화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장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너무 커져서, 작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국에 에이전시 문화가 발달된 이유
미국의 출판 에이전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출판사들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대형 출판사 직원들, 특히 아트 디렉터와 편집자와 같은 핵심 인력들은 결코 개인의 힘으로 혼자 연락을 하기가 어렵다. 아트 디렉터와 편집자들은 늘 기본 수십 개의 책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새 작가들을 발굴해야 한다. 주로 새 그림 작가들을 찾기 위해서 아트 디렉터는 여러 북페어나 콘퍼런스에 참여해서 물색한다. 혹은 이렇게 출판계 에이전트에게 부탁해서, 혹은 소개받아서 그림 작가를 접하게 된다.
아직 에이전트에 합류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장점이 참 많다! 무엇보다 좋은 건 에이전시가 큰 출판사의 아트 디렉터들 메일 주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작은 출판사에 비해 큰 프로젝트를 소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꼭 프로젝트를 소개받지 않더라도, 평소에 물밑 작업으로 내 그림을 아트 디렉터에게 자주 소개해준다. 그렇게 하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장래에 내 스타일과 잘 맞을 듯한 작업을 소개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나도 Win 하고 에이전시도 Win 하고, 출판될 책에 딱 맞는 그림을 찾던 아트디렉터도 Win 하고... 서로가 윈-윈 하는 관계, 그게 모든 에이전시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관계이다.
아트 디렉터와 에이전트의 차이
1. 아트 디렉터 Art Director
그럼 아트 디렉터와 에이전트는 대체 뭘까?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 걸까?
먼저 아트 디렉터 Art Director는 회사에 속한 포지션 명칭이다. 아트 디렉터는 상업예술을 다루는 모든 회사에 대부분 다 있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광고 회사, 디자인 회사, 영상 회사, 애니메이션 회사... 능력 있는 아트 디렉터들은 이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일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한 분야에 자리를 잡고 5년, 10년, 20년 넘게 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트 디렉터는 해당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Art, 즉 시각적인 디자인과 레이아웃 등을 모두 담당하고 감독하는 역할이다. 출판사라면 진행하는 책 작업에 참여할 작가를 선별하고, 샘플을 발주하고, 전체적인 레이아웃을 만들어서 작가에게 주고, 또한 적절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책 커버 작업은 경우에 따라 아트 디렉터가 직접 그리거나 디자인하기도 한다! 광고 회사라면 클라이언트에게 어떤 디자인을 원하는지 전달받고 직접 광고를 만드는 역할일 것이다. 영상, 애니메이션 회사의 아트 디렉터는 역시 영상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 배경, 레이아웃 등을 총괄하고 감독하는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Creative Director라는 직함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 포지션은 아트 디렉터보다 더 상위 직함으로 여겨진다! 최소 해당 업계에서 5-10년 이상의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하며 CEO, GCDs(Group Creative Director) 보다는 낮은 직급이다. 해당 회사, 즉 출판사나 영상, 애니메이션 회사일 경우, 해당 회사의 시각 디자인 쪽과 마케팅 사이에서 밸런싱을 유지하면서 가장 최고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 작업이 굉장히 힘들고 권한이 많은 만큼 스트레스가 크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Rasmunssen University 의 칼럼 블로그를 참조하자!)
여하튼 아트 디렉터가 되고자 하면 대개 Art에 관한 학위- 순수 예술이나 시각 디자인, 영상 디자인 등의 학위를 가지는 게 좋다. 좋은 그림이나 디자인을 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심미안이 필요하다. 그림책 작업을 이들과 주로 함께한다. 그 무엇보다 물밑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림책 표지에 결코 이름이 실리지 않는, 모든 출판 작업의 숨어있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2. 에이전트 Agent
에이전트 Agent는 해당 에이전시에 속한 프로젝트 중개인이다. 하지만 여타 다른 아트 디렉터와는 다르게 더 독자적으로 일하며, 프리랜스 일로 분류가 된다. 한국에서도 법무법인의 대표 변호사가 따로 있지만 소속된 변호사들이 따로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에이전시의 에이전트들을 서로 느슨하게 움직인다. 비교적 재량권이 많은 것이다! 아예 혼자 이름을 걸고 에이전트로 일하기도 한다.
보통 이 출판 쪽 에이전트들은 해당 출판업계에서 5-10년 정도 아트 디렉터, 혹은 에디터 일을 하다가 독립해서 일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내 에이전시 The Cat Agency의 에이전트 Chad는 중견 출판사 ABRAMS에서 오랫동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다가 독립하여 에이전트가 되었다. 에이전트들끼리 중요한 출판계 동향을 서로 공유하면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아트 디렉터들의 정보를 같이 주고받는다. 같이 출판 콘퍼런스에 참여해서 자기가 관리하는 작가들을 홍보하고, 최근에 계획 중인 프로젝트 정보도 공유하고, 그렇게 출판계의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게 된다.
에이전트는 자신이 소개해서 계약한 계약금의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대개 여러 작가를 동시에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작가를 관리해서 각각 계약을 해줘야 수수료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를 할 때 한 주식에 몰빵 하는 게 위험한 것처럼, 마치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우고 고기를 낚듯이 에이전트도 눈독여 둔 작가들을 주식처럼(?) 관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서로 겹치지 않는 여러 스타일의 다양한 작가들을 섭외하는 게 좋다! 그래픽 노블에 특화된 작가, 보드북을 특히 잘 그리는 작가, 디자인적인 그림에 강한 작가, 서정적인 그림을 좋아하는 작가... 그렇게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섭외하고, 그들이 의욕적으로 꾸준히 그림을 그리도록 기운을 북돋아주고 또 새 그림들을 소개해준다.
혹은 작가로 하여금 글/그림 작가로서 데뷔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한다. 직접 출판사에 작업물을 갖고 투고하기 전에, 에이전트에게 피드백을 요청하면 대개 기쁘게 받아들여준다. 에디터나 아트 디렉터에게 와닿기 전에 좀 더 균형 잡힌 시선으로 내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그렇게 하면 에디터에게 수천번의 개정을 요구받기 전에, 좀 더 준비된 자세와 작품으로 덜 부담감을 가지고 작업을 논할 수 있다.
에이전트,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아트 디렉터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당분간 지속적으로 교류할 일이 없다. 그들은 늘 다른 작가들과 일하느라 바쁘고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고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에이전트에 속한 작가들은 에이전트와 더 긴밀한 관계를 갖기 마련이다.
감히 이야기한다면, 좋은 에이전트를 만나는 건 결혼과 같다고 본다. 서로가 좋은 결혼이 되려면 서로가 서로를 잘 배려해 줘야 한다. 기브 앤 테이크, 테이크 앤 리턴이 잘 돼야 한다. 나는 좋은데 상대방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을 선물로 내놓아도 별로고, 그걸 받아달라고 하는 것도 참 부담이다. 마찬가지로 에이전트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작가 쪽에서 영 마음에 안 들어한다면, 과감하게 철회하거나 다른 작가에게 넘기는 게 더 좋다. 서로가 "널 만나서 다행이야!"라는 마음에 들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서로의 발전을 지지하고 서로가 잘 되도록 북돋아 줄 수 있는 관계. 에이전트와 작가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에이전트에게 "좋은 작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에이전트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주로 출판계 인사들인데,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면 참 면목없는 것이다. 신경 써서 여러 mock-up cover 나 개인 작업들을 올리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내가 상대로부터 좋은 덕을 보려면 나도 좋은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5월 연휴 내내 늘어지게 쉬면서 지냈는데, 나도 오랜만에 다시 날을 세우고 열심히 그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