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그리고 며칠.
나는 단골 카페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앉아있었다. 쓰다 만 원고와 온통 파란색뿐인 주식 차트를 번갈아 보며, 한숨과 함께 카페라떼의 거품이 녹아내리는 걸 지켜봤다.
오후 네 시. 노트북을 덮었다. 굳이 한 시간이나 일찍 집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래도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저 부모라는 이름의 무거운 관성이었을까.
"작은 걸로 사와. 민종이는 케이크를 별로 안 좋아해." 이 한마디가 가슴 한 켠을 무겁게 누른다.
제과점 진열대 앞에 서서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들의 입맛이 이토록 낯설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이 지나갔을까.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우리 사이에 쌓인 시간 만큼이나 두꺼운 벽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까.
작년 이맘때는 케이크의 크기보다는 맛을 고르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생과일, 초코, 치즈, 고구마까지. 그런데 왜 그 날이 이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건 아들의 입맛일까. 아니면 부정하고 싶은 우리 가정의 현실일까.
아마도 둘 다겠지.
가격표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케이크 값이 이렇게나 비싸졌나? 싱그러운 생딸기가 가득한 작은 케이크와 검소하게 장식된 큰 케이크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딸기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작은 걸로 샀어"라고 아들 몰래 중얼거리면 그만이니까. 아차, 딸기 케이크는 내가 좋아하는 건데… 이미 늦었다.
"긴 거 하나랑 작은 거 여섯 개 주세요"
모바일 멤버십 카드를 보여내며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할인받은 금액도 모른 채, 마치 작은 승리라도 거둔 듯 자랑하고 싶어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불과 1년 전, 촛불 빛에 반짝이던 큰 케이크 앞에서 우리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지었던 그 순간이 마치 오래된 필름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의 발소리가 현관에 울린다. 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소리에 가슴이 미세하게 떨린다. 막내는 한때 웃음꽃이었다. 수다스럽고, 시끌벅적하고, 집안을 헤집고 다니던 밝은 눈빛의 아이. 이제는 꿈에서나 보는 옛날 이야기다.
사춘기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웃음소리는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희미해졌다. 요즘 아들은 그때를 '흑역사'라고 부른다. 가끔, 아주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예전처럼 떠들곤 한다. 마치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보는 것처럼, 그립고도 씁쓸하다.
아들의 “다녀왔습니다” 소리에 방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몇 번. 마침내 문을 열고 아침에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낸다.
"민종아, 생일 축하해."
"...어, 고마워요."
짧은 대화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축하의 말이 이토록 무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을까. 지갑 속 5만원권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인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이제는 10만원을 줘야 할까.
숫자로만 표현되는 부모의 마음이 이렇게도 초라하다.
그래서, 케이크는?
냉장고에서 촛불도 켜보지 못한 채 식어가고 있다. 축하 파티라니—그건 아마도 다음 생에나 가능할 일이겠지.
아들은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버렸다.
지금 시간은 밤 열 시 사십구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