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명함, 남은 인연

쉼표, 그리고 며칠.

by 심온

조만간. 언제 한번. 곧.


희미한 약속들은 결국 '영원히 만나지 말자'는 말의 부드러운 동의어일 뿐이다. 나도 한때는 그런 달콤한 거짓말을 건넸다.


휴대폰은 점점 조용해졌다. 깜빡이던 메신저의 노란 불빛도 어느새 희미해졌다. 그 고요함이 주는 해방감에 취했다. 휴대폰은 무음모드로 돌렸고, 나는 평화로웠다.


끊임없이 울리던 전화벨과 메신저 알림, 이메일로 가득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멈췄다. 마치 시끄러운 관현악단이 갑자기 침묵하듯이.


친밀함을 가장한 유도질문들, '부탁'이란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는 계열사 임원들, 그리고 회전목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타 부서 팀장들의 수정 요청들.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같은 공기를 마시며 들려오는 동료들과의 불협화음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퇴근 후에도 귓가를 맴돌았고, 밤이면 베갯속으로 스며들어 악몽이 되어 나의 잠을 방해했다.


"부탁 좀 드릴게요", "제목이라도 한번 봐주세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이런 애원 섞인 말들이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빠듯한 예산 속에서 맺어야 했던 식사 약속들, 형식적인 티미팅들, 의무적인 술자리들. 취기 속에서 피어나는 가식적인 친밀감,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의 후회 섞인 숙취까지. 끊어진 기억의 조각들은 영원히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쉼표를 그린 며칠 후 캘린더 앱을 열었다. 차갑게 빛나는 화면 속에서 두 달치 약속들이 나를 노려본다.


"아시다시피 제가..." 말끝을 흐린다. 사직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형식적인 인사로 마무리한다.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지워간다. 마치 오래된 낙서를 지우듯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모든 게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클릭 한 번에 약속도, 관계도.


그러다 문득 마우스 커서가 멈칫했다. 몇몇 이름들 앞에서. 그들은 내 명함이 아닌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다. 휴지통 아이콘이 깜빡이는데, 손가락이 차마 클릭하지 못한다.


지우지 못한 약속이 다가온 하루 전, 먼저 메시지를 남겨 본다.


"내일 시간 되시는지요?"


"당연하지. 맛있는 거 먹자고." 단순한 답장이 왠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침묵도 어색해져서, 그동안 피하던 전화들을 받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그럼요, 잘 지내고 있죠." "살이 좀 쪘습니다." "그냥 뭐...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가끔 취업사이트도 둘러보고..."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반쯤은 거짓말 같았다.


"시간 많습니다. 언제든 괜찮아요."


시간이 많다는 말도 반은 거짓이었고, 반은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주는 자유로움과,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이 공존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꾸중을 듣는다.


"팀장님, 너무하시네요. 전화도 안 받고... 지금 뭐해요? 어디예요?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아니, 맞다. 좀 쉬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어디예요?" 취기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온다. 애정과 걱정이 뒤섞인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며칠 뒤, 우리는 브레이크타임도 없는 허름한 호프집에 모였다. 시계가 자정을 넘길 때까지, 우리는 진심과 거짓말 사이 어딘가에 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조언이란 게 또 이렇게 찾아온다. 마치 의도적으로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업종을 바꿔보는 것도 방법이야. 나도 말이야, 은퇴하면 전혀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이야." 커피 잔을 들던 손이 멈칫했다. "소설책이라고? 흠... 왜 또 새드엔딩인가. 그리고 다음 주 모임에 꼭 나오게." 목소리에 따스함이 묻어났다. "도망가지 말게. 이럴 때일수록 얼굴을 비춰야 해.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네."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든다. 지웠던 일정들을 하나씩 복구한다. 때론 도망가지 않는 것도 용기라던가.


정직함이 때론 잔인하게 느껴진다.


"야, 혼자서 소설가 꿈꾸지 말고 현실을 봐. 네가 지금 필요한 건 명함이지, 펜네임이 아니라고."


쓰디쓴 조언들이 귓가를 맴돈다. 그들의 진심 어린 걱정이, 내 가슴 한편에 작은 멍을 남긴다. 하지만 이런 친절한 현실 조언들이, 왜 이리 견디기 힘든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 모습이 우스워진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전화벨. 텅 비어있던 캘린더에 드문드문 약속이 채워진다. 따뜻한 점심, 저녁의 수다, 그리고 가끔은 서툰 위로가 담긴 술 한 잔. 법인카드는 사라졌지만, 그들은 먼저 손을 내밀어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따뜻한 손길 앞에서 미안함조차 느끼지 않는다.


휴대폰이 진동하며 익숙한 이름이 뜬다. 통화를 마무리할 즈음, 귀에 익숙한 말들이 들린다.


"날 풀리면 봅시다."

"조만간 보자고."

"형님 곧 연락드릴게요."


나는 그들과 날이 풀리면, 조만간, 곧 보게 될 거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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