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살 회의에 걸린 희망

오렌지주스가 흐르는 강

by 심온

"초롱아, 너는 엄마 아빠랑 함께 이 과수원에서 살고 있니?"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초록빛 과수원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물었어요. 요정의 집이 다른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걱정됐거든요. 장난꾸러기 친구들이라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야, 우리 요정들의 집은 저 멀리 다른 곳에 있단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법의 커다란 수정구슬을 통해 이곳을 항상 지켜보고 있지. 하지만 무지개 요정님께서는 구슬로만 보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매일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주신단다."


"무지개 요정이라고?" 아이가 신기한 듯 되물었어요.


"그래, 작년에 뽑힌 우리 요정들의 귀여운 왕님이야. 가끔 하늘에서 비가 그친 뒤에도 무지개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걸 본 적 있지? 그건 바로 무지개 요정님의 기분이 조금 날씨처럼 변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기분이 좋으실 땐 온 세상을 물들일 만큼 크고 예쁜 무지개를 선물해 주신단다."


"그럼 지금도 무지개 요정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는 걸까?"


심온의 말에 초롱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어요.


"글쎄…… 무지개 요정님은 아침마다 이 과수원뿐만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시느라 너무나 바쁘셔서,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실지도 몰라. 걱정하지 마, 우리 친구!"


초롱이는 용감한 목소리로 심온이를 안심시켰지만, 그 작은 목소리에는 살짝 떨림이 묻어있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어요! 초롱이가 깜짝 놀라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며시 둘러보았어요.


"아이고, 큰일이야! 심온아, 엄마가 날 찾고 있어! 무지개 요정님이 우리를 발견하신 것 같아!"


"앗!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음…… 그건 말이야, 우리 요정들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아주 특별한 소리가 있어. 사람들에게는 마치 꿀벌이 하늘을 날 때 내는 윙~ 소리처럼 들릴 거야. 어머나! 심온아, 이제 가봐야겠어. 내일 또 만나자, 약속!"


심온은 이미 지각이었지만, 내일 하루 더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 용기를 내어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그때 마침 멀리서 동생이 깡충깡충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답니다.


"형아! 학교도 안 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동생은 아픈 배가 다 나은 모양이었어요.


심온은 수다쟁이에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하는 동생에게 오늘 있었던 신기한 일들을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어요.


"그냥 다리가 아파서 잠시 앉아서 쉬고 있는 중이었어. 학교 가자, 심청아!"


심온이 동생 심청이의 팔을 잡아끌었어요.


바로 그때, 멀리서 희미한 무지개가 비치는 게 보였답니다. 심온은 무지개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어요. 무지개 요정님은 화가 나지 않으신 것 같았어요!


초롱이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심온의 마음속에 궁금증이 피어났어요.


심온은 학교에서도 과수원에서 만난 초롱이와 무지개 요정님 생각에 푹 빠져있었어요. 수업 시간에도 창 밖을 바라보며 무지개가 떴는지 자꾸만 살펴보았죠.


선생님께서 "심온아, 집중하렴!" 하고 부르실 때마다 깜짝 놀라 "네!" 하고 대답했지만, 곧 다시 초롱이와 나눈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답니다.


"내일도 초롱이를 만날 수 있을까?" 심온은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바라보았어요.


수업 시간이 끝나자 심온은 숙제를 하고 가겠다며 학교에 남았어요. 친구들이 모두 떠난 후에 혼자 과수원을 찾아갈 생각이었지요.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심온이는 과수원으로 달려갔어요. 초롱이와의 약속은 내일 아침이었지만,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역시나 과수원은 조용하기만 했어요.


그때 갑자기 심온의 귀에 '윙~ 윙~' 하는 꿀벌 소리가 들려왔어요. 심온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어요.


혹시나 이게 요정들의 대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네가 심온이니?"


심온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투명한 무언가가 공기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며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초롱이를 닮은 형체가 눈앞에서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어요.


초롱이보다 훨씬 키가 큰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였지만, 든든하고 듬직한 모습이었죠. 반짝이는 초록빛 날개와 하늘빛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작은 은색 왕관을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손에는 작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답니다.


심온이는 처음 초롱이를 만났을 때처럼 입이 쩍 벌어졌어요.


사람 세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거든요. 어른 요정이 든 작은 막대기에서는 반짝이는 별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어요. 그 빛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답니다.


"안녕하니, 귀여운 꼬마야. 나는 초롱이의 아빠란다. 무지개 요정님께서 우리 예쁜 딸아이가 착한 사람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고 알려주셔서, 널 직접 만나보고 싶었단다." 요정은 따스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초롱이가 매일 밤 너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단다. 하지만 말이야…… 우리 과일나라 요정들은 사람과 만나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 무지개 요정님께서 너를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셔서 괜찮았지만, 아빠로서는 아직 조심스럽구나. 그래서…… 내일부터는 우리 초롱이를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마음이 아프겠지만 이해해 주렴."


초롱이 아빠 요정의 말을 듣자 심온이는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어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심온이는 초롱이가 정말 좋았거든요.


“저는 그럼 내일도 모레도 초롱이를 볼 수 없는 건가요?”


"음…… 한 가지 특별한 방법이 있단다. 내일은 아주 신비로운 ‘천살 회의’가 열리는 날이야. 천 살이 넘은 현명한 요정님들이 모여서 소중한 일들을 결정하지. 그곳에서 네가 초롱이와 함께할 수 있을지도 이야기하려고 해. 우리 요정들은 모두의 마음을 듣지만,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리는 건 일곱 명의 지혜로운 천살 회의란다”.


심온은 작은 주먹을 꼭 쥐며 생각했어요. 과연 사람과 요정은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요? 심온의 생각을 읽은 듯 아빠 요정이 말했어요.


"아주 오래전, 반짝이는 별들이 더 가까이 있던 시절에는 우리 요정들이 사람들과 정말 사이좋게 지냈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이 우리의 소중한 나무들을 태우고, 아름다운 산을 망가뜨리기 시작했어. 맑은 물길도 제멋대로 바꾸어 버렸지. 그래서 우리 요정들은 하나 둘 숨을 곳을 잃어갔고, 슬픈 마음에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단다. 심온아, 이제 우리가 다시 한번 사람을 믿을 수 있을지, 특히 네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천살 회의에서 물어보려고 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빠 요정의 몸에서 은빛 가루가 반짝이며 흩날리더니, 그의 모습이 투명하게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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