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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May 11. 2022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쓸모없고 하찮아도 나는 소중하다

나름대로 공들여 쓴 긴 들을 한 편 한 편 다듬어 발행해보려고 다시 살펴보았다. 웬걸, 세상에 내놓을 만한 글이 아니다. 몽땅 묻어두기로 했다. 이렇게 못써먹을 글 따위에 그 긴 시간을 허비한 나 자신이 한심하다. 애쓰고 공들여봤자 이 정도의 결과물이라니 참으로 쓸데없이 산다 싶다.


경제적으로 생산성 제로에다 언제나 비실비실하여 집안일도 최소한으로만 겨우 때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는 상태로 사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커녕 얹혀진 채 살고 있는 생활이다. 학교에서 샤프심 부러뜨리며 칠판과 책상을 번갈아 보기를 분주히 하던 그 시절에 가장 두려워했던 미래가 바로 지금이라니. 게다가 글도 더럽게 못쓰다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그게 바로 지금의 나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나는 써먹을 데가 없는 인간이다. 사회적인 역할도 없다. 교류하며 살뜰히 마음을 살피는 집단도 없다. 포동포동 귀여워서 보기만 해도 귀여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기도 아니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 싱그러움을 전해받는 젊은이도 아니다. 가끔 신랑을 웃겨주는 걸 빼자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생활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세 시간 정도 울적하게 보냈다.


세 시간 만에, 이런 생각에 계속 빠져 있으면 우울감에 젖은 인간이 되어 바로 곁의 신랑에게 더 폐가 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주워 담았다.


사람이 꼭 어디 쓸모가 있어야 되나?


대학시절, 사라진 운동권 마지막 끄트머리를 잡을까 놓을까 하던 동아리에서 한 선배는 '사람은 항상 목적이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 선배가 지어낸 말은 아니고 더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을 따라 하는 사람을 본 그 선배가 따라 쓴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따라 쓰고 싶다. 그때의 의미와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쓸모를 따지는 건 수단에 대해서다. 스스로 쓸모가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를 고하는 건, 자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쓰이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대체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나는 나에게 목적이어야 한다. 생물로서 존재하는 내가 그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생산하고 싶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지, 생산하고 쓰이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쓸모의 앞에 생명체인 '나'가 존재한다.


조금 더 가보자. '나'라는 존재는 무인도에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별일 없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별일이 생길까 걱정 끼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모자람들이 잔소리를 불러들이더라도, 그들에게 타인을 챙기며 돕는 자로서의 만족감을 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나와 비교하며 '그래도 내 인생에 쟤보단 낫네'하며 안심하는 미세한 행복감을 줄 수도 있겠다. 숨만 쉬고 있어도 누군가에게 1g 정도는 도움이 되고 있는 셈이다.

 

충분할 정도의 뻔뻔함을 채워 넣으니 좀 살만해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잠시 잊고 있던 반려 사막쥐에게 먹이를 준다. 사막쥐는 4년이나 같이 살아놓고도 사람 손을 싫어한다. 만지며 교감하기는커녕 자칫 물리면 손에 구멍이 난다. 그저 매일매일 먹고 싸고 쳇바퀴를 뛰며 노는 것뿐인 조그맣고 하찮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아찔할 정도로 귀여운 생물이다. 밥 주는 소리에 은신처를 꼭꼭 채워 막아 둔 둥지를 헤치고 빼꼼히 내미는 머리가 반갑다. 오늘도 잘 지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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