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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Aug 25. 2022

죽어서 좋겠다

애도의 시

죽어서 좋겠다

애도의 시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 시집은 제목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생전의 마지막 시집을 내고 난 후 다음 시집의 제목은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고령이었던 작가는 제목부터 지어 놓은 이 시집을 완성하지 못한 채 작고 했고, '충분하다'는 결국 유고 시집으로 출판됐다.

더구나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표제작 '충분하다'가 없었다. 미완성 원고 중에 짐작이 가는 것은 있지만 완성된 원고로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과연 무엇이 충분하다고 한 것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말한 ‘충분하다’는 살만큼 살았다는 의미였을까?

입원 기간이 길다 보니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좁은 병실에서 원치 않아도 그들의 사생활을 엿들을 수밖에 없다. 암병동에도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다인실에는 20, 30대부터 80대까지 한 병실에 모여 있는 경우도 있다.  

완치율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암은 죽음이 침상 곁에 바짝 붙어서 있는 병이다. 아무래도 젊은 환자들은 더 안타깝고, 젊은 환자를 돌보는 부모나 어린 자식을 둔 환자는 더 눈물겹다.

그렇다면 노인은? 얼마나 오래 살고 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혹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들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호상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이에 따라 누군가의 죽음을 연민하는 데 차등을 두어왔다. 이 또한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의 참 둔감하고 가혹한 잣대가 아닐까.


혹은 그녀의 ‘충분하다’는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삶을 만끽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순간순간의 감각과 느낌과 지적 성취 등을 두루 만족할 만큼 경험했다는  뜻.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이루거나 경험해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몇 주 동안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최악의 ‘충분하다’를 경험하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병마에 시달리며 지쳐서 고통은 이제 충분하다고 내뱉는 그 ‘충분하다’ 말이다.  


그렇게 두렵고 간절할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을 생각한다. 죽으면 그들이 나를 마중 나오고 먼저 간 모든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참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준다. 좀 더 이성적으로 망자가 망자와 해후하는 사후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도 나름의 마지막을 겪어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조금은 의지가 된다.   


아버지, 오빠, 할머니, 시아버지, 이모, 고모, 작은아버지, 외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영화배우 강수연, 노무현 전 대통령, 가수 유재하, 기업인 정주영, 시인 기형도, 화가 이중섭,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사람들, 무너진 삼풍에 깔린 사람들, 성수대교에서 떨어진 사람들,

……



누가 흔들어 깨운 듯 잠이 달아나고 속속들이 두려움이 스며드는 새벽이면 나는 먼저 간 이들의 길고 긴 명단을 떠올린다. 그들 하나하나의 충분치 못 했을 삶과 충분했을 삶을 모두 애도하고 싶다.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문학과 지성사) 참조





 안도 다다오의 본태 박물관(제주)




사별


신호등은 착실하고 가로등은 다정하고 비상등은 친절해.

네 창의 등은 꺼져있구나.

상가 장식등은 피곤하고 갓길 비상등은 숨이 차고 건너 차선 전조등은 화가 났어.

네 창은 아직도 적막하구나.

사연 많은 별빛은 흔들리고 눈물 많은 달빛은 번져버렸고 어제의 햇빛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

네 창엔 여전히 빛이 없구나.


자꾸 눈물이 나와.

세상 모든 빛들이 눈물에 녹아

부둥켜안고 강물로 떨어졌어.

네 창에 등불 하나 끝내 켜지지 않는구나.


이별이구나.

영이별이구나.







팥죽



동짓날 긴긴밤에 팥을 삶았어.

제풀에 으스러지도록 푹푹 삶았어.

동짓날 추운 밤에 팥을 내렸어.

고운 채에 밭쳐서 팥물을 내렸어.


이건 팥죽색이야.

빨강이 죽으면 이런 색깔이 되지.


사산의 밤처럼 아득한 동짓날 밤

허옇게 김을 토해내며 팥죽이 끓어.

애간장이 다 녹도록

부글부글 죽이 끓어.


이건 팥죽색이야.

피가 죽으면 이런 빛깔이 되지.


겨울이 지극해 길고도 깊은 밤

삼 동네 대문마다 팥죽을 칠했어.

삼 동네 골목골목 팥죽을 부었어.


잉태됐다 나지 못한 온갖 목숨들을 위해

맺혔다 피지 못한 온갖 소망들을 위해

하혈 같은 팥죽을 발라줬어.

가라고, 가라고.

아주 가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아주 잊고 다시는 꿈도 꾸지 말라고.

 
 





애통

 

 

잊었습니다.

마지막 축복처럼

당신을 잊었습니다.


두통이 점거한 머릿속에는

어떤 통증도 오래 체류하지 못합니다.

애통은 길고 굽이진 창자를 따라 내려가며

역류하지 않고 배설되지 않고 산개했습니다.


잊었습니다.

당신은 오래된 음모처럼 쉬 잊혔지만

당신이 떠난 뒤로 몸에는 자주 바람이 드나듭니다.  


바람은 언제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어 와

출구를 찾아 헤맵니다.

상향하는 바람은 소리를 갖추지 못합니다.

저항 없는 가슴 한복판에서

바람은 제자리를 맴돕니다.

하향하는 바람 소리는

복병을 일으켜 세우는 휘파람 같습니다.


소리는 짧고 날카롭게 엄폐물을 파고들어

바람이 창자를 훑어 지날 때면

거기 엎드려 있던 애통 하나씩

불현듯 일어나 칼을 부립니다.  


잊었습니다.

잊은 듯 잊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떠나고

애통은 지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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