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의식화, 운명의 결정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하더라도, 원래부터 있어 왔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간적 시야에서의 해석일 뿐이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또는 “어떤 것을 알아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뇌의 영역에 있던 것 또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것을 ‘어떤 계기’를 통해 알아차린 것이거나 발견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그런 활동을 통해 쌓은 지식에 대해 “그것은 이것이다.”라거나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는 식의 정의를 하며 그것을 객관화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오직 초자연적인 존재만이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 경우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그것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헤아려보는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학문적으로 보자면 증명을 통해 정리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운명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으로 태어난 누군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정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인간의 운명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온전히 과학적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즈음에서 운명에 대한 칼 융의 견해를 소환해 보자.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인간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이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문장을 통해 칼 융은 ‘운명이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 정신분석학자로서의 정의(그것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밝힌 것)를 내렸지만 이것을 학문적으로는 공리(자명한 진리)라거나 정리(증명된 일반 명제)라고 하지는 않고 있다.
*정의(定義, definition):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또는 그 뜻.
*공리(公理, axiom): 수학이나 논리학 따위에서 증명이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 자명한 이치.
*정리(定理, theorem, proposition): 이미 진리라고 증명된 일반 명제.
어쨌든 무의식과 의식, 운명에 대한 칼 융의 견해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운명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해도 혹시 눈인사 정도는 설핏 건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칼 융식의 주문을 주절거려도 좋겠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라. 그것은 무의식이 자신의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걸어가게 된 인생의 길을 언젠가 ‘그것이 운명’이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무의식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던 행위나 사고를 의식의 공간으로 끌고 나올 수 있다면, 비록 '누가', '왜'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아낼 순 없다고 하더라도 일상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조금 더 넓고 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게도 미약하나마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란 게 대체 어떤 것들일까.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무의식(無意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란 ‘자신의 언동이나 상태 따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일체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좀 더 구체화하게 되면 무의식이란 ‘자각이 없는 의식의 상태. 정신 분석에서는 의식되면 불안을 일으키게 되는 억압된 원시적 충동이나 욕구, 기억, 원망 따위를 포함하는 정신 영역’이란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무의식(unconscious, unconsciousness)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감각함을 뜻하는 무의식(insensibility)과는 다르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무의식에 대한 설명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지만 후천적 요인의 작용에 따라서는 그 차이를 아예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고, 알아차린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상당한 시간적 편차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식 없이 행해지고 있는 인간의 행위란 게 무엇일까에 대한 고찰이 필요해진다.
원래 하나의 생각은 무수한 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혹시 의식은 하되 그 정도가 경미한 의식이나, 의식의 영역에서 밀려난 비의식(非意識)이나 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초의식(超을意識), 또는 무감각(無感覺)을 무의식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짧은 문구에서조차 한 걸음 제대로 나아가기 어려우니, 오늘도 ‘생각하기’의 걸음은 길을 잃는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생각하기를 끊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