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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카라바조 <성 마태와 천사>(1602) 배경과 개요

1. 카라바조, <성 마태와 천사>(1602) - 배경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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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Matthew and the Angle>, 1602, Kaiser Friedrich Museum, Berlin(Destroyed)

원본이 소실되어 흑백 필름(하단)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복원(상단)하였다.     



1600년에 카라바조가 그린 대형 제단화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가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의 콘타렐리 채플의 양쪽 벽면 상단에 나란히 걸렸다. 이 두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카라바조를 일약 로마 미술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게 하였다. 


이 두 개의 작품에 크게 만족했던 성당의 관계자들은 2년 뒤인 1602년, 콘타렐리 채플의 중앙을 장식할 <성 마태와 천사>의 제작을 카라바조에게 다시 의뢰했다. <성 마태와 천사>의 제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짧지만 명료한 지침이 전달되었다.     


성 마태는 책 또는 두루마리를 앞에 두고 앉아서 복음서를 쓰려하고 있고, 천사는 성 마테 옆에서 무엇인가를 설명하거나 설득하려는 태도로 서 있다.      


     

1. <성 마태와 천사> 첫 번째 버전     

지침과 함께 작업을 의뢰받은 카라바조는 약 3개월 반의 제작기간을 거쳐 그림을 완성하였다. 이 그림이 <성 마태와 천사>의 첫 번째 버전이자 성 마태를 주제로 그린 세 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성 마태와 천사>는 콘타렐리 채플의 중앙만이 아니라 채플의 어느 벽면에도 걸리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Kaiser Friedrich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인 1945년, 베를린의 대공 벙커에서 보관 중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현재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카라바조의 <성 마태와 천사> 첫 번째 작품은, 작품이 소실되기 전에 원본을 찍어 둔 흑백 사진을 기반으로 색을 입혀서 복원한 것이다.      


<성 마태와 천사>의 의뢰가 있기 전에 콘타렐리 채플의 중앙 제단에는 카라바조의 다른 두 개의 그림인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가 좌측과 우측의 상단에 나란히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제이콥 코바어트(Jacob Cobaert)의 <성자의 조각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교회는 성 마태가 천사의 영감을 얻어 복음서를 쓰는 모습의 그림으로 중앙 제단을 다시 장식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카라바조에게 <성 마태와 천사>의 제작을 의뢰하였다.      


하지만 교회 측의 의도와는 다르게,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는 천사의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메고 있는 듯한 일개 무식쟁이 사내처럼 묘사되었다. 

결국 <성 마태와 천사> 첫 번째 버전은 ‘성인에 대한 불경스러운(irrelevant) 묘사’를 이유로 성당 측에서 인수를 거부하였고 카라바조는 이에 성 마태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한 <성 마태의 영감>으로 대체하여 이 <성 마태의 영감>이 오늘날까지 채플의 중앙재단에 걸려 있게 되었다. 

즉, 현재 콘타렐리 채플에 걸려 있는 <성 마태의 영감>은 <성 마태와 천사>의 두 번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카라바조에게는 강력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델 몬테 추기경은 콘타렐리 채플의 실내를 장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카라바조가 콘타렐리 채플의 성 마태 시리즈를  의뢰받을 수 있게 해 준 인물이다. 


결국 교회 측에서 인수를 거부한 <성 마태와 천사>은 또 다른 카라바조의 후원자인 마르체세 빈센초 주스티니아니(Marchese Vincenzo Giustiniani, 1564-1637)가 매입하였다. 


마르체세 빈센초 주스티니아니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귀족 은행가이자 미술 수집가이고 당 시대를 대표하는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 오늘날에는 로마의 판테온(the Pantheon) 근처에 있는 주스티니아니 궁전(the Palazzo Giustiniani)에 모아 놓은 주스티니아니 아트 컬렉션과, 바사노(Bassano)에 있는 그와 그의 형 베네데토 추기경(Cardinal Benedetto)의  가족 궁전과 카라바조를 후원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성당 측의 인수 거부로 인해 카라바조가 받았을 충격과 자존심의 상처를 생각해보면 마르체세 빈센초 주스티니아니의 <성 마태와 천사>의 매입은 카라바조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2. <성 마태와 천사>의 인수거부     

앞에서 얘길 한 바와 같이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와 천사> 첫 번째 버전은 작품의 의뢰자인 성당 측에서 인수를 거부하였고 이 사건은 카라바조에게 커다란 수모를 안겼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피에트로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 1613-1696)의 기록을 참고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지오반니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이다. 

그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을 기록한 17세기의 저명한 전기 작가로서, 16세기의 전기 작가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대표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1672년에 출판된 <예술가들, 그들의 삶>(His Lives of the Artists)은 예술에 있어 고전적 이상주의에 대한 이론적 사례를 증진시키고 굳건하게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친 저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지오반니 피에트로 벨로리는 그의 저서에서 <성 마태와 천사> 첫 버전의 인수거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길 하고 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 마태를 그린 그림을 치워버렸다. 그림 속의 성 마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인의 모습이 아니었고 교회에서 제시한 지침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림 속에서 성 마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은 보는 이를 향해서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카라바조가 성인을 이렇게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그림 속 주인공인 성 마태가 <마태복음>을 저술하던 시기가, 그의 노년이었을 거란 정황적인 상황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총 28장으로 된 마태복음은 정경으로 인정받는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 첫 번째 복음서이며, 세 권의 공관 복음서 중에 한 권이다. 

이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태(마태란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은사’이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한 명으로 예수의 승천 이후 그것을 증거 하며 복음을 전파하다가 갖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였다. 

마태복음을 저술했을 당시(A.D. 80-100년)의 성 마태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는 연로한 몸을 이끌고, 침침한 눈과 굳은 손으로 힘겹게 복음서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성 마태와 천사>는 그런 마태를 돕기 위해 천사가 그의 곁에 임하여 그를 대신하거나 그에게 영감을 주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가톨릭 종교화의 단골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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