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는 샤워랑 잘 어울린다. 샤워를 할 때 홍콩 영화 ost를 듣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의 강의실 / 프로젝터로 재생되는 장면에서는 화장실에서 어스름한 카메라가 흰 옷을 입은 남자의 춤추는 등을 찍고 있었다. 멍처럼 푸르스름한 필름 같은 빛. 화장실에서 낡아진 타일의 흰색이 가장 상큼하게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난닝구를 입고 있을까요? 그게 정말 교수님의 말인지는 알 수 없으면서도 목소리는 그렇게 들린다. 그분은 왜 난닝구라고 했을까? 소설가는 나이 들수록 뛰어나지고, 시인은 나이 들면 폐인이나 천재가 된다, 는 말을 하던 선명한 검은색 뿔테 안경과 작고 긴 눈. 따지고 보면 그게 뭐 다른가요? 하면서도 나는 몰래 화를 내고 있었고, 프로젝터에 나온 다음 영화에서는 달처럼 하늘에 뜬 눈동자가 면도칼로 베이고 있었다. '아방가르드'한 영화 - 아방가르드가 전쟁을 할 때 최전선에 뛰어들어 싸우는 병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때 배웠지만, 아방의 avant 이 'before'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이나 지난 뒤였다. /
그게 그 홍콩 영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유명한 홍콩 영화를 보았다. 밤의 담배 냄새, 유난히 노랗게 보이던 갈색 코트, 도시의 강물을 닮은 영화. 반짝반짝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것들이 새벽에 꾼 꿈처럼 흐리고 유치했다. 나는 깨달은 것을 반복해서 말해대는 습성이 있어서, 몇달 전부터는 꿈의 논리가 좋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하고 또 하곤 했다. 나는 맹랑한 꿈에서 허무를 찾지 않는 인간이고, 해몽이 크면 클수록 좋아하는 인간. 어떤 우연을 설명하지 않고 마음껏 만져보다가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고. 그럼에도 그 홍콩 영화를 다 보고는 욕을 조금 했고, 거기 나온 노래들을 찾아내 매일 듣게 된 것은 적어도 세 달 뒤의 일 / (여전히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제일 좋아하는 천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야. C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C, 너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나였으면 제일 이라고 말했어도 가장 이라고 썼을 테니까) C가 좋아하는 천재는 어느 희곡 작가다. C는 가끔 탁자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예고없이 정말 그렇게 한대도 난 웃어버릴 것이다. C의 폭력적인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그의 검열되지 않은 자유로움은 딱히 무언가를 해치지는 않는다. C는 책을 항상 아무렇게나 쌓아두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게도 정갈하다. C의 방에는 C를 닮은 질서와 무질서가 있다. C의 긴 속눈썹, 부드러운 감자 냄새가 나는 등. 유럽과 일본, 미국을 넘나들며 쌓여있는 책들. 탁자 위에 있는 그 희곡 작가의 중간 두께의 책 사이에는 몇 번을 봐도 무슨 모양이었는지를 까먹는 낡은 책갈피. 침대 발치에 켜둔 검은 무광의 기하학적인 스탠드 같은 것.
연애적인 사랑이 뭔데? 묻던 C는 내가 사랑한 사람도, 나를 사랑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점을 쳐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그건 거짓말이 아니고) C와 내가 포함될 만한 정의를 말하면서도, C와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고 선명하게 느낀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그토록 선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
물으면 아마 네 셔츠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난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같은 대답.
하지만 C는 내게 묻지 않음을 안다. C와 나는 건조하게 사랑에 대한 것들을 말하길 좋아한다. 나는 C의 화려한 셔츠를 볼 때마다 속으로 웃는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칼의 C는 요구하지 않는다. 나더러 뭘 느끼라고, 뭘 하고 싶어해달라고, 뭘 생각해달라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긴 산책 중에 대화가 끊기면 (거의 그런 일은 없지만) C가 묻는 것은 그런 것뿐. /
점심에는 팬을 꺼내 버터를 녹였다. 손으로 버터를 누르고 돌리다 보면 필연적으로 뜨거워진 팬에 손가락 끝이 닿는다. 희멀건 새우가 빨개지고 야채가 탄 것처럼 되면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오일을 한 바퀴 두르고 그릇에 담는다. 맛은 심심한데 버터 냄새가 난다. 그릇을 다 비우고 설거지를 하는 데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
< 여행서적 >
오후에 들른 서점에서는 낯선 초록색 글자 아래를 돌아다녔다. 어딜 가든 나는 문학 쪽에서 두리번거리고, 이쪽으로 향하기 전에 물론 사고 싶은 책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두었다. 두꺼울수록 즐거워지는 SF 소설 하나.
평대의 도독한 나라들 틈에서는 내가 여행했던 곳들을 더듬어 찾았다. 웬만한 나라들이 다 있었는데 내가 살았던 곳만 없었다. 그나마 표지에 실린 그곳의 사진을 보고 불안 같은 반가움에 집어들었다가 정작 그 나라는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묘하게 가벼운 외로움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라, 막상 숨에 닿아보니 형형색색보다 바람이 아름다운 나라 ㅡ 도착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부모를 고르듯 이곳을 골랐다고 생각했고, 그곳을 떠날 때 즈음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니 용감한 거였어. 아무것도 몰랐단 건 모든 것을 새로 알고 사랑하게 될 거였단 뜻이었는데. 모든 걸 담을 무지가 충분하단 뜻이었고, 직접 만진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될 거였단 뜻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이곳이 그리워서 죽고 싶어질 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조용히 함께 별을 보던 친구 하나는 별자리 이름을 기억하는 데 골몰해 있었고, 다른 친구 하나와는 웃음과 맥주와 담배만이 가득했다. 영어로 die 라고 말하려니 어쩐지 연극처럼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냥 '너무 그리워질 것(miss here and feel sad)' 이라고 말했다. 별을 읽던 친구는 노래하듯이 그럼 여기로 대학원을 오라고 말했다. Then do a master's program here. 영어가 가진 정렬된 선명함은 서글프다. 그리움은 절대 번역될 수 없고 시의 단어들은 그냥 조금 더 아름다울 뿐이다. C, 너의 화려한 셔츠에서 나는 냄새는 어디서 왔어? 나의 어디에서 그 나라가 맡아져? 내 눈에는 여전히 회색인지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 없는 빛이 여전히 있어? /
처음은 어느 날 한밤중, 소파 위에서였다.
집에는 나 혼자다. 동생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작게 줄인 소리가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아마도 예능이었던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 나는 늘 소파 뒤쪽에 개어두는 긴 담요를 덮고 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는데, 손이 이상하게 움직인다. 깊이 잠들지 않았고, 정신은 바로 들었기 때문에 잠이 덜 깨서가 아니다.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다. 눈앞에 보이는 소파의 모양이 이상하다. 저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발이 움직인다. 현관으로 가 누군가 앞에 선다. 안 자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천천히 정신이 돌아온다. 돌아오는 게 아니라 가까워진다. 다시 정신이 몸에 가까이 맞물린다. 내 손이 이상해지지 않고 소파가 익숙해지고 나 잔다, 말하는 동생을 인식할 만큼. 빈틈없이.
두 번째는 좀 더 짧았다.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양팔을 들어올려 휘적거렸다. 내 손가락과 손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 아, 또 여기야. 빠지려고 하는 이빨이 잇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몸과 정신이 먼 게 아니라 몸과 정신이 멀지만 붙어 있다 고 생각했다. 묘하고 우스운 절망감. 아침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뿐. /
C, 나의 천재를 찾았어. 나의 천재가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임에, 그것도 전혀 읽지 않던 SF임에 미약한 불안을 느껴. 그러나 해가 바뀌고 나서부터 머릿속을 내내 지배한 것은 어떠한 사랑. C, 내가 몇백 몇십 번을 본 영화 중 하나에 공포는 기꺼이 이성의 논리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와. 그리고 사십 분 뒤에 같은 목소리가 말해. 사랑은 기꺼이 이성의 논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한국은 나에게 안온한 곳이고, 특히 A가 그렇다. A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고, 내가 사랑스럽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그 말대로, 모든 이성과 논리를 포기할 수 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 어린애처럼. 당연히 A의 세계의 모든 것들은 진실이었고, 그럴 만한 것이었고, 선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C, 나는 A를 무척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나는 그렇게 행동한다는 걸 A를 떠나온 다음에야 알았어. A는 내 곁에 있지만, 이제 나는 A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A는 나를 사랑할까? 무게 없이 궁금하다. 그러나 가끔 손이 녹아내리는 감각처럼 포기하려는 나를 느낀다. 그것이 이렇게나 강하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음이 신기하다. 앵무새처럼 또 입버릇이 조금 바뀌었다. 난 인간을 진짜 좋아하나봐. 여러 번 포기가 되려고 해. /
한동안 서점에 가지 않았고, 며칠 전에야 겨우 짧은 일기를 썼다. 너를 사랑하지는 않는데 당장 죽는다고만 생각하면 너를 따라가고만 싶어. C. 난 점점 더 너를 닮아가. '좋아하는 천재' 라는 게 얼마나 찾기 어려운 거였는지 이제 알겠어. 책장에는 잉크펜으로 쓴 글씨가 적히고 나는 자주 손가락으로 매만진다. 거대한 역사를 보는 마음을 로맨틱한 애인의 단어로 생각한다. 당신이 있다니, 당신을 읽을 수 있다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네가 물으면 (분명 그렇게 물을 것이고) 난 사랑이라고 할 거야. 나의 천재의 사랑은 네 속눈썹 같아. 선명하고 단정한 검은색. 헷갈리지 않지만 부드러운 것. 나의 천재는 발그레한 뺨보다는 그 아래 흐르는 핏줄 같은 거, 은은한 등보다는 새까맣게 가득한 어둠 같은 거. 반짝한 바닷가로 뛰어드는 웃음보다는 어두워진 바다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소금기 같은 것. /
달이 눕는다. 이곳이 아닌 어느 추운 나라, 멍처럼 푸르스름하고 짙은 공기 위에 떴던 것처럼. 달이 모양이 저럴 수가 있어? 하지만 사실은 뜨고 질 때 달은 눕는다 - 그걸 안 것 역시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추운 나라에 대한 꿈을 꾸는 날이면 외로워야 할지 그리워야 할지 알 수 없다. A와 C 사이의 B ㅡ 언젠가는 어떤 달을 볼지 선택하게 되겠지만, 모든 거대함과 자유함에서 뒤로하고
C, 너의 방에 가고 싶다. 너의 진한 색깔 셔츠와 나의 짧은 머리를 가끔 서로 흘깃 보고, 어디에 희곡이, 질문이, 영화가 새겨져 있는지 찾고 싶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샤워를 한 다음 이 노래를 들었다고 네게 말하고 싶어. 아주 진지하게. 세상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