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사과와 연가

by 유조


자기 파괴 커맨드에 대해 읽었다. 정확하게는 그것에 대해 다소 불친절하게 서술된 글을 읽었다.


나는 막 여행에서 돌아온 뒤였고, 내내 졸다가 눈을 떴다. 창밖의 풍경이 강원도의 희끗한 산에서 희끗한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도로의 곡선들, 몇 개의 터널들 - 그것들을 거의 하나도 보지 못해서 나는 꼭 순간 이동을 해서 집으로 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투명 인간과 순간 이동 중에서 절대로 순간이동을 고르지 않는 인간. 가능한 몇 번이라도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늦은 밤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버스 정류장에서 누구보다 많이 두리번거리고, 그리고 그런 것은 모두 박동을 고르는 일.

나는 언젠가 소파에 기대 앉아 있던 내 자세를 기억한다. 베개 하나 없었던 작고 좁은 회색 소파 위에서 나는 따뜻하도록 몸을 웅크리며 턱을 괴고 있다. 하루 중 가장 싫어하는 시간, 햇빛은 흐늘하고 희미한 오렌지빛으로 길게 드리우고 있다. 나는 어느 밴드의 음악을 고른다. 긴 손가락으로 기타를 집어든 L이 그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엠티를 갔다가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음악이며 - 한여름의 동아리, 전주의 야시장 길목에서 버스킹을 하던 음악이며 - 낱낱의 단어들과 음들에 잠 못 이루는 바람에 매일 공부하듯이 들여다본 음악이다. 어딘가에 들이받친 열병처럼.

그리고 그 노래가 연주된다. 하루 중 가장 싫어하는 오후에, 단조로운 트릭으로 하는 마술 같은 음계들.

거기서 나는 매일 여름밤 듣던 그 음들을 찾아낸다. 곧 나는 더욱 커다란 익숙함과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가 주는 상상 이상의 이해와 단어들에, 그리고 내가 처음 내뱉어보는 단어가 가진 형형색색의 어둠에. 그런 식으로 L과 함께 보낸 시간은 몇 안 된다. 입김이 나오는 어느 겨울 버스 정류장의 유리와 같이 혼탁하고 짧은 시간이고, 내가 고른 박동은 그런 모양이다. 단조로운 트릭의 마술, 혼탁한 겨울 오후의 햇빛에 들은 여름밤의 음악.

노래는 읽을 때보다 쓸 때 훨씬 많이 듣는다. 책 옆에는 까만 잉크펜, 노트북의 오른쪽 탭에는 음악이 있다. 들인 습관은 잘 바뀌지 않는다. 다만 버스 안에서 곧게 밑줄을 치는 일에 익숙하게 되고, 한 손으로 음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작은 펍에서 처음 들었다. 음악을 들을 때는 늘 그냥 유튜브의 영상을 검색해 듣습니다. 나는 음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늘 영화의 인간이었고, 그래서 날것의 음원은 나에게 별다른 인상을 가지지 못합니다. 처음 듣는 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 듣는 음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몽중인'과 'California Dreamin'을 들을 때는, 반드시 영화 장면이 재생되는 것으로 골라 듣고, 왕페이가 양조위의 집에 있는 장면이 나올 때는 가능한 화면으로부터 눈을 피하려 노력합니다(보면서 욕을 엄청 했던 장면이거든요).

어둑한 바 자리, 스툴에 앉아 나는 생각한다. 집에 돌아갈 때는 애써 지하철을 갈아타는 길로는 가지 않으리라고. 옆에는 푸슬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칼의 B가 앉아 있다. 이 날의 시점은 B와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때이나, 이미 나는 B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술을 몇 잔이나 마시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도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오히려 주사처럼 이렇게 웃으면 (술을 너무 못 마셔서 보통 주사 따위 없이 기절하지만) B의 정신이 느긋해지고 나를 예뻐해주지 않을까 생각을 할 만큼. 아무도 담배를 피고 있지 않지만, 작은 펍에서는 이상스럽게 두텁고 향긋한 냄새가 흐르고 있고, 나는 B의 퇴색한 짙은 빨간색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낡은 과일의 거죽 같은 그것. 담배를 절대 피지 않는 B에게 그곳의 담배 냄새는 묘하게 잘 어울리고, B는 예쁜 손톱으로 큰 유리컵을 톡톡 두드린다. 원을 그린 새하얀 거품이 사라지고 있다. 그는 항상 가장 발칙한 이야기들을 말한다. 그러나 B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는 그 단어들을 거침없이 아름다운 박동으로 듣는다. B에게 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이상하면서도 대단히 당연하게 느끼고)

단어들에 비해 표정이 많지 않은 고요한 B. 그는 내게 한 번도 그 노래를 들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 노래뿐이 아니라 어떤 노래도 그랬다. 그러나 그날 서울의 구석, 펍에서 나오던 노래를 들으면서 B는 즐겁게 얼굴을 찡긋하곤 했다. 그럼 나는 그 기꺼운, 찰나의 주름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상상을 했다. 수확하라고 열리는 것이 아닌 영원하라고 열리는 과일의 나무. 그것은 때로 바깥에 존재하는 B의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몸속의 근육처럼 내 안에서 순식간에 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B, 내 공상은 얼마나 능숙하고 소심한지. 길고 섬세한 손가락만을 기다리는 음각된 공상들. 모든 아름다운 글은 그게 전부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그레코의 서술

-자기 파괴 커맨드는 하나의 개인을 파괴하는 어떠한 말. 정신과 마음의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는 한 문장이 개인마다 고유하게 존재하고, 또한 그들 안에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글의 마지막에서 그레코는 어떠한 극점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의 자기 파괴 커맨드를 듣는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따라가기 전에 나는 잠깐 시간을 둔다. 고민한다. 예상한다. 적는다. '너를 사랑해'.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가능한 세밀하게, 누군가 나를 모두 불가능의 불가능까지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상황을. 나의 애정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들에서 나는 종종 내 애정의 방식을 설명하는데, 나는 이야기를 항상 손목뼈로 시작한다. 여러 개의 손목뼈. 물이 돌바닥을 때리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친해진 종업원의 손목. 그는 분무기를 느슨하게 들고 비둘기나 갈매기들에게 간간이 물을 뿌렸다. (그러지 않으면 새들이 테이블 위의 해산물이나 피자를 채갔다.) 그의 손목에 늘 걸려 있던 가죽끈과 손목시계, 질끈 묶은 머리. 멀리서 하는 작별인사.

그리고 또 다른 이의 겨울 같이 가늘고 짧은 머리카락. 절대 가다듬는 일이 없던 옷매무새의 헐렁한 주머니. 누군가의 손톱과 단어들. 형형색색의, 곡선의, 직선의, 동물의, 폭력성의, 산뜻함의, 부드러움의, 구속의. 조금 더 좋아하다 보면 나는 누군가의 단어에서 그의 가느름한 눈가를 읽고, 말을 하는 억양에서 그가 숟가락질 할 때의 습관을 본다. 나의 애정은 그런 것들로 작동했다. 그러나 하나의 자기 파괴 커맨드가 있다면 그건 분명 '너를 사랑해' 일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눈알의 감각을 기꺼워하는 사서의 침착한 다정함이라면, 도서관의 목록을 모두 하나하나 읽는 불가능함 끝에 올 수 있는 문장이 조용하고 후련한, '너를 사랑해' 라면.

여행에서 나는 하나의 절을 두 번 갔었다. 처음 갔을 때 나는 오르막길을 걸어서 흙바닥 위에 탑이 서 있는 절 앞마당까지 갔다. 올라가는 길에는 눈이 쌓여 있었는데, 낮고 뾰족한 초록색 잎들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흰색과 초록색, 돌과 바위의 질감이 햇빛을 반사했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떠한 극점에 와 있다고. 반짝거리는 추위와 오래된 바위. 사라지지 않는 손톱과 단어들, 익숙하게 날카로운 감각들의.

두 번째 날에는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부는 탓에 위쪽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나무들의 움직임보다 회오리치는 나무들의 소리가 더 먼저 들어왔다. 아주 희박한 시야나 공기처럼, 높고 빠르고 빈틈이 없는 소리였다. 밤의 산을 상상하면서 나는 그 안에 꽤 오래 서 있다 돌아왔다. 길 안쪽, 깊숙한 곳에서는 돌로 된 조각상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울퉁불퉁한 돌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지만 읽지 않았다. 그것들은 다만 머리에 소복한 눈을 쓰고 있었고, 눈과 돌 부분 모두가 흐릿하게 얼룩져 희뿌연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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