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잃었고, 친구들은 새로운 만남에 달떠 있던 그 무렵...나만 공허했던 그 무렵...
그런 시간이었다. 고등학교때부터 도서관의 책 냄새를 좋아했던 나는 그 무렵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 서가 어딘가를 헤매곤 했었다.
여행 방식은 이렇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빼든다. 이때 마음에 든다는 건, 제목이나 작가가 마음에 들 수도, 책 모양이 이쁠 수도 있는 그런 거였다. 계획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그저 그날 꽂히는 걸 뽑아 든다. 그리고 무작정 책을 읽는다. 이 여행에서 중요한 건 "메모"
책에서 언급하는 책을 메모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내 스타일이다 싶은 작가라면 작가 이름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메모한 책들을 다시 찾아 읽거나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연달아 읽는다. 어떤 꼬리를 물든 연쇄적으로 읽어 가야 한다. 책 속의 책을, 책 속의 작가를 찾아 다니는 여행.
가끔은 한 작가에 꽂혀 프랑스 문학 서가의 한 칸을 마구 읽어가다 바로 옆에 꽂혀 있었던 다른 작가로 갈아 타기도 했다.단순한 방식이다. 정해진 룰은 없다.자유롭게 내 눈과 손이 가는 대로 읽는 것!그것이 유일한 룰이라면 룰.
그 해 그 여행에서 나는 파트릭 모디아노를, 미시마 유키오를, 에밀 아자르를, 잉게보르크 바하만과 쿤데라를 만났고, 그들과의 만남은 나의 이후, 가령 순간순간의 선택 같은 것에 숱한 영향을 미쳤었다.
그런데 그런 여행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발견의 기쁨이 함께 하던 즐거웠던 여행을 잊고 살았다.
책 읽기를 업으로 삼아야 했던 시간 동안 책은 점점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고 책이 늘어갈수록 숨이 막힐 뿐이었다.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임무이자 숙제였으며, 어떤 압박감 같은 것일 뿐이었다.
더이상 숨도 쉴 수 없을 무렵, 책을 버렸다.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기도 했고, 무슨퍼포먼스마냥 폐지로 분류해 고물상에 팔아 버리기도 했다.
학교를 빠져나온 후 6개월 동안 책을 아예 보지 않았다.눈을 쉬게 하고 나눔까지 마치고 나니 홀가분한 내 책장에는 정말 나의 책들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 읽어볼 용기도 났다.단촐해진 책장을 뒤적거리다 전공서적 및 각종 이론서 읽기에 밀려 읽혀지지 못하고 있었던 책들을 보니 조금 신이 나기도 했다.
그 중 <책여행책>을 골라 내고는 긴 일기를 썼다. 잊고 살았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마냥 , "책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그저 반가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