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KA Twigs / EUSEXUA 갈퀴생활 I ~ II.
타이틀: EUSEXUA
아티스트: FKA Twigs
발매일: 2025.01.24
레이블: Atlantic/ Young
장르(RYM): EDM / 아트 팝 / 트랜스 / 얼터너티브 알앤비 / 댄스 팝 / 다운템포 / 글리치 팝
리뷰어: Rich Juzwiak
Rating: 9.1
게시일: 2025.01.24
분류: Electronic / Pop/R&B
Twigs’ third album brings club music into her sensual, supernatural world. It’s a masterful pop-star moment for the artist.
트윅스의 3집은 클럽 음악을 그녀의 관능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아티스트에게는 경지에 이른 팝스타의 순간이다.
우선 헤드라인에서 눈에 띄는 두 수식어--'sensual'과 'supernatural'에 대해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이는 eusexua를 기존의 언어체계 하에 그나마 가장 가깝게 맞춰 해석하는 '시늉'이라도 해보기 위함이다.
'sensual'은 일반 감각 경험에 의한 개념과는 구별된다고 하였다.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감각 대신 관능으로 하는 이유일 테다. sense로부터 파생된 단어들, 특히 'pleasure와 관련한다'라는 기본 조건을 공유하는 sensuous와도 구별하기 위해 흔히 'bodily에 한정한다'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즉, 또 다른 역어로 '육욕'을 사용하는 것처럼 욕망(쾌감)과 육체가 반드시 함께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엄격히 보수적인 옛 학자들 사이에서는 관능이 미학과 결부될 수 없는 근거로 해당 조건으로 인한 (주로 도덕적인) 한계를 제시한다. 옛 학자란 적어도 종교에 의한 도덕이 개념화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낭만주의 이전 시대의 학자들은 우세하게 그랬다는 말이다. 그리고 굳이 명시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sensual의 정의에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조건은 그것이 반드시 '인간으로서의 경험(human experience)'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으로서의'라는 전건, '경험에 관함'이라는 후건 모두 충족해야만 한다. 즉 선험적인 어떤 현상과 이에 대한 지각이 있은 후에 사용할 수 있는 단어야 하며, 인간이란 범주 내에서 발생하는 경험이자 인간의 능력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unnatrual, preternatural처럼 공통된 어근의 다른 단어들이 아니라, 어떤 특정 조건 및 상황에 의하여 'supernatural'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이 중 unnatural과 supernatural 간의 관계를 비교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각각 한자로 치환하자면 'un-'은 곧 '부(不)'가 되며, 'super-'는 곧 '초(超)'가 된다.
'부-'는 '일반으로 정의한 기존 질서에 어긋남'이라는 의미로 주로 활용된다. 그러나 '초-'라면 '기존 질서를 정의해 왔던 일반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끔 벗어남(beyond)'이라는 의미로 달리 해석하게 된다. 이는 '자연에 다시 포함시키기 위해 각각 어떤 접근을 취하는지'에 대해 가정하면 훨씬 풀이가 쉬워진다. unnatural한 것의 경우에는 대상을 질서에 맞는 수준으로 교정 및 복구해서 재편입시키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supernatural은 요컨대 대상이 아닌 질서를 확장 및 재정립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즉, 우리가 자연 그 자체에 대해 새롭게 재고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preternatural은 supernatural과 마찬가지로 '어긋남'보다는 '벗어남'에 근접하여 사용된다. 그 탓인지 표준 사전에서는 대부분 동일하게 '초-'라는 접두사로 명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감히 주장하기를 명백한 문제다. 설령 해당 접두사를 사용하더라도 본디 그 뜻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개념이 엄밀히 구별되는 두 단어가 존재한다면 혼용을 막기 위해 어느 한 단어는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단어는 어찌하여 다른 개념일까. 이는 함축적인 문장 하나로 얼추 설명 가능하다.
"A supernatural power assists him to rise; a preternatural power assists him, so to speak, to descend."
(물론 이는 오스테스 브라운의 판타지 소설 중에 나온 권능에 관한 표현이지만, 비유로서 본 논의에 한해 언어학에도 적용해 보려는 것이다.)
preternatural은 자연 내에서 다뤄지되, 자연 중에서도 일반 및 정상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논할 때 사용된다. 즉,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상대적으로나마 기존 질서 내로 끌어내리려는(to descend) 시도가 가능하다고 해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supernatural은 대상이 아닌 우리의 인식 능력이 먼저 기존 질서를 벗어나야 한다. 즉, 초월의 영역으로 우리의 인식이 월등히 고양해야 한다는(to rise) 것이다.
헤드라인에서의 두 수식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묘사를 위해 쓰였을 뿐이다. Rich Juzwiak도 독자들을 위해 '시늉'을 해준 셈이다. eusexua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각 키워드마다의 의미와 엄밀한 조건까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근거 없이 갖다 붙인 것이 아닌 듯하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인간으로서의 우리이기에 느끼는 어떤 감각이며, 그것이 육체와 성에서 비롯된 관능적 성질이 있고,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하나, 현재 인간의 인식 및 자연에 대해 정의 내린 법칙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존 언어의 논리를 통한 이해가 '시늉'밖에 되지 못하는 것은 마지막의 조건 때문이다. 또한 같은 조건을 공유하더라도 eusexua는 sensual과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며, 복잡함과 불가해함에 있어서 어쩌면 supernatural를 상회할 수도 있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지금껏 상상력으로 어느 정도라도 채워왔던 supernatural과 다르게, 이제 막 창안된 명칭의 eusexua는 그러한 시도조차 없던,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usexua라는 세계에도 규칙이 존재한다. 초월적 영역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기에 마련된 규칙일 텐데, 그것은 eusexua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어째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의 설정이 연상되는 규칙이다. 다만 파이트클럽의 규칙은 결코 이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다. 폐쇄를 지키고 행위만을 인정하며 소통을 금기로 정한 것이다.
반대로 eusexua의 경우에는, 소통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개념의 확장과 우리 인식의 고양을 위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선언되고 행위돼야 할 수행문(performative sentence; J.L. Austin의 언어행동이론 참조)이기 때문이다. 결코 단순 진술문으로서 규정되거나 사후적인 학습에만 가치를 두는 완료형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FKA 트윅스의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단어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물론 그 자체로도 이미 많은 암시적 역할을 해냈지만--새롭게 창안된 단어인지, 창안한 사람이 그녀가 맞는지, 특정 개념을 가리키는 '어휘'인지, 어떤 품사로서 기능하는지, 용법과 목적이 무엇인지(이를테면 진술을 위한 것인지) 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 대문자 그대로 작품의 타이틀이 될 것임을 알고 난 즉시, 우리는 그것이 첫째로 선언문(declarative statement)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됐다. 또한 작품이 정식 발매를 이루기 전까지 계속해서 eusexua의 정의와 암시, 해설 등을 강조해 왔다. 예술로 하여금 개념이 동시에 형성되어 가며, 형성의 과정에 우리의 참여와 실천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트윅스는 eusexua에 대해 예시를 들어가며 친절하게 정의를 내리는(defined) 작업을 수행했다. 일련의 작업들이 '해설'이 아닌 '정의'를 위한 것이며, 그러나 '확정된 규정'을 위한 것이 아님에 주의하라.
(1) eusexua is for the girls who comb their hair at their vanity at night.
(2) eusexua is for the girls who find their true selves under a hard metal silver stiletto on the damp rave floor.
(3) eusexua is for kissing without love and loving without fear.
(4) eusexua is the pinnacle of human experience.
- eusexua girls devour the entire world / TikTok(@fkatiwgs)
소녀들에게 야간에 미용을 하는 일에는 또한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상황을 치밀하게 염두하기보다는, 'at night'이 어디까지나 핵심을 명료히 들여다보기 위한 조건 설정이라고만 간주한 채, 정의문으로서의 주어('eusexua' is ~)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핵심 단서들을 위주로 캐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1): 자, 그렇다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어쨌거나' 밤에 미용을 하는 동안 헤아릴 만한 그녀들의 의식이다. 우스꽝스럽지만 'rituals'로서의 의식과 'consciousness'로서의 의식 중 어느 쪽이든 그럴듯해지는 언어유희적 적용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녀들은 아름다워지는 자신들의 모습과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가꾸는 행위를 아울러, 거울을 통해 계속 마주 본다. 맞은 편의 형체는 나의 감각에 의해 소소하게 점진돼 가는 나의 외관이다. 또한 그곳에서의 시간과 나의 행위는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거나 만족을 찾으려는 과정을 위한 rituals이다. 습관이나 강박에 의해서일지라도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다'라는 대전제 안에는 충분히 포함된다. 만족이란 곧 자기애 및 자아실천으로 말미암은 consciousness의 고양이다. 모두 'who find their true selves'란 관계절에 포함될 수 있는 대상들인 것이다.
(2): 이들은 'on the damp rave floor'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주로 'a hard metal silver stiletto'를 신은 채 그곳에 걸맞은 매력을 뽐내며 춤을 춘다. 이때 'rave floor'라는 공간적 조건은 헤드라인의 'brings club music'과 맥락이 일치할 것이다. 전자음과 환각이 주는 향락에 몸을 맡긴 채 무아지경의 희열에 이르는 체험으로부터 자아를 탐색하는 이들에게 eusexua에 관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집단적 에너지의 발산을 통한 개인의 실존적 해방과 자기 탐구를 예상해 볼 수 있을까. 여기에 silver stiletto가 주는 관능적인 카리스마로 하여금 섹슈얼리티나 젠더적 수행과도 연관 지을 수 있을까.
(3): 한편 eusexua는 사랑의 본질 및 사랑에 관한 행위에도 관여한다. 그러나 헌신에 국한된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랑 없는 애무 또한 인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열렬한 애정이나, 열렬하지만 그저 성적 행위일 뿐인 것, 어느 쪽이든 고양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감이란 작용 그 자체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 것일까. 또한 상호적인 교감에 한하는지, 일방적인 것도 허용하는지 문장에서는 별다르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4): 다른 항목은 모두 목적구문인데 반해, 정의문으로 제시된 문장이 하나 있다. 궁극적인 단서로 봐도 좋을까. 인간 경험의 정점이라. 앞서 Sensual의 정의에 부합하기 위한 조건에 적확히 포함된다. 말하자면 sensual의 최상단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supernatural과 연관될 수 있다면, 그 최상단이란 자연적 인간 존재 내지는 능력의 경계선에 걸터 선 상태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마치 3차원으로 번역된 5차원 세계의 경계에 마주 선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조셉 쿠퍼처럼 말이다.
'HAVE YOU EXPERIENCED EUSEXUA'라는 제목의 프로모 비디오에서는 당신의 시각이 스위치 온 됨과 동시에 앞으로의 모든 수행이 eusexua의 정의를 이뤘던 텍스트들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알리며 시작된다. 교란에 가까운 화면 전환이 이뤄지는 사이에 발화로, 혹은 행위로 각자 Eusexua에 관해 해의하고 증언한다. 가령 Juzwiak이 지목했던 조 브룩스의 "eusexua is like a feeling of "I'm that bitch"."도 그러하다. 이들을 동일한 룸에 갖춰진 채 실험의 참여자로서 진술한다. 참여를 위해서는 국가, 인종, 성, 세대 등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또한 혼자일 수도 있고 짝일 수도 있다. 이들의 진술은 때로는 묘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각기 진술을 담당하는 이들의 비주얼과 그것을 담아내는 연출 효과는 매우 개성이 뚜렷하고 감각적으로 강렬하다.
이들의 증언들을 간추리자면 이러하다.
"I'm that bitch" / takes over who you are / (dynamic activity) / rose petals on my skin(maybe ≒ silver stiletto) / also with each other / perfect / before orgasm / finally reached the destination / trust in your body / express myself / oxygen...
여전히 모호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주는 고양감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짜릿하다는 것일 테다. 또한 당신이 이미 경험해 본 사람 중 한명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설명할 표현만큼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나의 육체와 자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to you")는 마치 그들이 얻은 가르침을 하루빨리 전도하려 안달 난 새로운 복음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EUSEXUA에 대한 실질적 정의문은 'Eusexua' 싱글의 오피셜 비디오 엔딩을 장식하는 타이틀 카드에 나타난다. 목적구문이 아니며, 창안자가 직접 제시했다. 그러나 이 역시 복수 정의로 이루어져 있다.
(1) IS A PRACTICE
eusexua는 수행문이라 하였다. 수행문이 적절하기 위해 따르는 여섯 가지 기준(오스틴에 의한 임의적인 분류로서)에 의하면 그것은 발화 주체나 수행의 발동 대상을 비롯해 모든 참여자에게 정확하며 완전한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점은 '집행(execution)'에 있으며, 그것은 곧 다른 말로 실행(practice)에 있다. 즉, 실천된 행위 없이는 그것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체험은 물론 어쩌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고양된 경험과 그 경험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반드시 전제 조건이어야 한다. 또한 practice의 또 다른 번역된 의미가 '관습'인 것처럼 정의를 충족하기 위해선, 인간 사회를 아울러 실천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시적인 eusexua, 혹은 종결된 eusexua란 없는 것이다.
(2) IS A STATE OF BEING
또한 eusexua는 어느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 한다. 어느 조건이 충족됐을 때, 그것의 대상이 되는 존재(being)가 기존으로부터 변화돼 이르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의 상태 변화가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존재는 분명 이전과 확실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앞선 정의의 첫 번째 전제에 의해 변화를 '성취'하기 위해선, 분명하고 의식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능동성이 갖추어질 때 그것은 감각의 체험이란 수준을 넘어서,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나와 인간의 새로운 형태이자 본질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3) IS THE PINNACLE OF HUMAN EXPERIENCE
세 번째는 앞서 우리가 이미 본 적이 있다. 아마도 (1)과 (2)가 그 자체로 정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3)의 정의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자 부연으로 작용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등장함으로써 트윅스가 궁극적으로 강조하고픈 정의인 것일 테다. 그렇다면 정점으로서의 eusexua라는 것은 인간 경험으로서 수행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형태마저 뒤바꿀 정도의 어느 경지를 일컫는 말인 것인가. 그것이 juziwak이 엇비슷하게 묘사하려 했던 초자연의 세계인 것일까? 그는 자신이 탐구 및 발견한 정의론적 관점에 아직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인다.
Juzwiak은 영국 보그지의 The Run-Podcast의 트윅스 편 인터뷰 중 발언을 인용했다. eusexua가 일종의 플로스테이트(flow state)라고 했다. 스포츠 심리학에 쓰이는 용어로,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특정 활동에 고도로 집중할 때 나오는 최적의 심리 상태를 뜻한다. 어쨌거나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신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분(feeling) 중 하나가 될 것이며, 이는 당신이 어느 것에 시간 감각마저 잃을 정도의 몰입 및 도취에 있는 상황일 때 생겨난다. 이때의 '최적'이라는 것은 앞서 탐구했던 감각상의 극단 및 경험상의 정점과 맥락적으로 일치하겠으나, 이번에는 감정과 정신의 영역에 관한 것임을 구별하여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It’s like when you’ve been kissing a lover for hours and turn into an amoeba with that person. You’re not human anymore, you’re just a feeling.
그중 기분에 관해서 같은 날에 게재된 타블로이드 인터뷰를 추가적으로 인용하려 한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저 feeling 그 자체가 되는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인간으로서 있던 감각, 자아, 인식, 정신, 나아가 육체와 본질마저 벗어나 심리적인 것 외에, 형이상학적인 어느 것에까지 완전히 융화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이를 트윅스는 교감을 나누는 서로에 의해 아메바가 되는 것으로 직유 한다. 아마도 I-3-(3)에서의 진술에 따라 전념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든, 사랑을 배제한 교미에 관한 것이든 상관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얼마나 몰입해 있는지에 있다.
정신적 상태에 관한 방금의 묘사를 이번에는 개인적 사례, 즉 그녀 자신의 경우("for me")에 적용해 보는 수행을 거친다. 그녀는 이렇게 발언한다.
For me, it's also the moment before I get a really good idea of pure clarity.
그것은 아이디어에 관해 있다. 그녀의 첨언은 개념을 통해 겪을 수 있는 어느 상태가 단지 '어느 경험에 관한 고도의 몰입'자체에 관한 것, 다시 말해 행하거나 처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얻게 되는' 사유(thoughts)적 영역에서의 어느 것에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서로를 일종의 동의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감(inspiration)을 일컬을 수도 있을 테다. '정말로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으로 보아, 그 사유란 명백히 긍정적인 것이며, I-5-(1)을 따른다면 성취 및 보상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다.
'순수한 명확성'이란 어구도 눈에 띈다. 그녀가 받았을 실질적인 인상을 떠올려 본다면 짧게 '명징함'으로 받아들여도 그다지 틀리진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clarity란 사전적 정의에 따라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상세하게, 정연하게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진리의 모습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 정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 직관적인 형태에 관한 완전한 인지에 비로소 가닿게 되는 우리의 통찰을 설명하는 단어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오해나 부조화를 일으킬 불순물 따윈 자리할 수 없다. 그 경지로부터 발현되는 지적 창조성을 더불어 체득하는 것에 의해 우리의 정신이 고양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경험할 수 있는 전조적인 쾌락 상태가 eusexua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절정 단계인 셈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일종의 '오르가슴'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이번에는 a big surge라는 목적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얻게 될 것들이 보통 크고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물밀듯이 밀려 나온다는 뜻이다. 어쩌면 제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속격 전치사 of로 하여금 그 쇄도 안에 무엇이 포함돼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로 전단락에서 예로 들었던 일부 추측이 맞았다. 영감(inspiration)이 포함돼 있다. 사랑이란 관점에 대해 전술하면서 쓰였던 열렬함(≒열정; passion)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의 영감과 열정은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영감이 예술을 통해서만 얻어지거나, 열정이 성애를 통해서만 얻어지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삶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는 명사들임에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예술에 포커스를 두어 의미를 분석해보고 싶다. 바로 집합에 대해 등위적 관계에 포함돼 있는 creativity를 위해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요소가 등위를 형성하는 것은 집합 안에 포함돼 있는 것들의 단순 열거에 의해서가 아닐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인 요소들이 아닌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발생은 개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순서 및 타이밍으로 마구 이뤄질 수 있지만, 어느 지점에서라도 그것들이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쇄도적 현상에 더욱 기하급수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그 형성의 지점에서 열정과 영감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창의성의 확장에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때의 창의성이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관계를 맺고, 몰입(플로스테이트)하며, 가까워지는 일종의 현상학적 성질을 가리킨다. 서로 연결된 상태의 이것들은 경이로운 압도감과 광기를 만들어내고, 이로써 어쩌면 예술의 원리가 된다.
따라서, 세 가지가 원리로써 작용함에 따라 생성된 쇄도가 곧 예술에 직결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 순간이 만개하기 직전에 이루어진다는 nothingless의 순간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Juzwiak의 리뷰에서는 이보다 전에 서술됐지만─미처 다루지 않았던 코멘트와 비교하면서 다뤄볼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적어도 eusexua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그 어느 것도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 이를 때 우리가 좇던 nothingless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순수한 상태가 돼야 한다. 전술했던 대로 순수는 명확성에도 가닿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nothingless는 최상의 플로스테이트이자 가장 명확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당신의 정신에 있던 모든 것들은 완전히 공(空;blank)으로 변한다. 만약 이것이 불교적 관점과 연관이 된다면, 이전까지 나를 nothingless에 이르지 못하게 했던 것은 고(苦), 혹은 번뇌로 하여금 대부분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에 따르면 여기에는 자아를 향한 어리숙한 집착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트윅스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더 구체적인 예시를 몇 가지 더 들자면, 그간 그녀가 겪어왔던 억압이나 피학(여기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그녀의 진술에' 의거한 언급임을 분명히 밝힌다. 특정 사건과 연관을 지으려거든, 아직 소송이 진행 중에 있으며, 원칙적으로 사실여부에 대한 입증을 마친 뒤에 공공연한 발언이 가능해질 테니까), 혼란과 좌절 등을 아우르는 현실에서의 경험들이다. 그러나 수준 이상의 몰입과 관능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밀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공의 상태에 이르게 됨과 함께, 비로소 고양(be elevated)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행복감에 가닿는 명백한 상승을 일컫는 것이므로, 이것은 가장 진보적이며 유포리아적인, 요컨대 무아지경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 I get a really good idea of pure clarity, " "a big surge of inspiration or creativity or passion", 그이는 결국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감각적 경험(Orgasm)에 대한 다른 설명들일 수 있다. 물론 부연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Eusexua로 하여금 획득할 수 있는 다중적인 정점들 중 동등한 각각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 문장들 중에서도 우리를 본능적으로 이끄는 마법의 단어는 오르가슴에 있을 것이다. 비교적 추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문장들과 달리, 오르가슴에 대해선 바로 우리 육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영역이지 않은가. 살면서 가장 귀한 순간 중 하나이면서도 말이다.
반면 만약에 이것이 good idea of와 a big surge of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라면, 이때의 오르가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급하는 성생활 및 신체상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그러므로 훨씬 광의로서의 절정을 다루는 것일 수도 있다. 단지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닌, 예술과 통찰, 자아와 정신, 형태와 존재 등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의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만에 하나 찾게 되거나, 구태여 다시 찾으려는 것에 버금갈 정도로 난감하면서도, 인류사적 관점을 동반할 만큼 고등하며 특별하고, 희귀하면서 획기적이고, 궁극적이면서 이상적인 단 한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될 테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just feeling이 되는 것", 혹은 "나와 인간의 새로운 본질이 되는 것" 등의 진술은 그런 의미에서 타당성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moment들의 특이한 점은 바로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됐을 때가 아닌 before, 즉 그로부터 앞선 시점들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왜 최고의 정점에 관한 경험은 성취 (이후)가 아닌 이전이어야만 할까. 수행의 과정 및 수행이라는 것 자체에 더 유효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Juzwiak은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그럴듯한 사례들이 떠올랐나 보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사례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재치 있고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갈퀴를 위한 감상(갈퀴생활)은 피치포크에 기고된 리뷰를 바탕으로 한 칼럼을 묶는 카테고리로서,
'리뷰를 리뷰하는 글'로 이해해주셔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