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초에 중일이네 학급은 자리 이동을 한다. 자리가 바뀌는 것을 학생들은 무척 좋아한다. 동일한 공간 안에서도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서 온종일 학교 생활하는 데 차이가 큰 모양이다. 랜덤으로 자리가 배치된 후에,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거나 쿵짝이 잘 맞는 친구와 앞뒤로 앉게 되었을 때는, 담임의 직권으로 그 학생들만 간단히 재배치한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교실에는 짝꿍이 없다. 거리 두기 일환으로 한 명씩 앉는다.
중일이네 학급의 자리가 바뀐 날, 수업 시간에 발표 순번은 박창우였다. 그런데 중일이 흰자위가 희번덕거린다.
- 아, 지난 시간에 발표했었는데, 아, 짜증 나.
발표 순서가 순연으로 되다가 자리 이동이 있으면 발표하기로 되어있던 사람부터 순서가 다시 시작된다. 복불복으로 자신의 순서가 그냥 넘어가 버리기도 하고 지난 시간에 했던 사람이 다시 하는 경우가 있다. 하필 중일이가 지난 시간에 발표를 했는데 또 순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일이는 그나마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큰 부담이 없을 것 같은데 약간 오버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발표할 차례인 박창우에게 다가가 보니, 교과서가 아주 깨끗하다. 아무런 필기가 되어있지 않다.
"박창우는 발표 순서가 문제가 아니네. 교과서가 이렇게 깨끗해서야 되겠나? 도대체 수업 시간에 뭘 한 거지?"
- 죄송합니다.
"죄송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오늘까지 영어 책의 빈칸을 다 채우고 왜 그것이 답인지 친구들한테 물어서라도 다 알고 교무실에 와서 검사받도록 해요."
- 알겠습니다.
요즘 창우는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로 달려 나간다. 다른 반의 지경이와 낄낄대며 웃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봤었다. 창우는 온통 마음이 지경이에게 가 있는 게 분명하다. 창우는 파마까지 하고 잔뜩 멋을 부린다. 그러니 영어 수업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 올 턱이 없을 것 같다.
- 오늘 집에 가기 전까지 안 했으면 자성 교실에 넘겨요.
아, 또 중일이가 끼어든다.
"중일아, 잠깐, 니가 선생님이니?"
-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까지 교과서 정리한 것을 검사받으러 오지 않으면, 명보('명심보감' 줄인 말) 펜맨십 쓰기 '반(1/2)' 장이 벌칙이에요. 부모님 확인도 받아와야 하고요. 그것을 깜빡하고 안 해오면, '교사 지시 미이행'으로 '자성 교실' 명단에 올립니다."
깨알보다 작은 글씨로 흐릿하게 되어 있는 '명보' 펜맨십 위에 덧쓰기를 하며 마음의 수양을 쌓는 것이다. 자성 교실에 가면 한 시간 내내 저 명문을 덧쓰며 자기 스스로 반성하는 곳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저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성 교실이 운영되는데 학년별로 몇 명 정도 입실한다. 한 번 다녀온 학생들은 질려서 다시는 그 교실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범사에 노력하게 된다.
아, 교과서가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창우 때문에 잠시 수업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다.
"자, 여기 이 문장(1)과 (2)에 있는 'during'과 'so'의 품사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어요."
- 에이C, 도대체 품사가 뭔데요? 그거나 그거 아닌가요?
창우가 신경질부터 낸다. 난감하다.
"많이 들어보지 않았니? 품사란 말이야."
- 아, 일단 문법은 너무 어려워요, 문법 싫어요.
학생들은 문법을 몹시 싫어한다. 그래서 문법 파트를 수업할 때가 되면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설명을 해야 하고, 문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문법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품사는 그 단어가 어느 갈래에 속하는지 말해주는 거야. 그 단어의 문법적 기능이나 형태, 의미에 따라 나누는데 우리나라에서는 8 품사라고 그래. 명사, 대명사 등등... 다 '사'자로 끝나."
- 그래서요?
창우는 성질이 급한 듯하다.
"저게, 각각 품사가 뭐냐고?"
- 모르겠어요.
"그러면 다음 순서로 넘어가고, 너의 순서는 skip 했으니 다시 돌아올 거야. 긴장하고 있어."
다음 순서인 다현이가 웃기만 한다.
"그러면 다현아, 전치사와 접속사 중에서 하나씩 골라 볼래?"
그래도 다현이는 웃기만 한다.
"다현이도 일단 skip 하고 다음은 수민이 차례네."
- during은 전치사, so는 접속사예요
"어, 대단한데? 수민이~"
그러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수민이를 칭찬한다.
"수민아, 혹시 왜 during은 전치사이고, so는 접속사라고 하는지 알아?"
수민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다음은 정준이 차례다.
- 선생님, 걔는 아무것도 몰라요.
또 중일이가 끼어든다.
"그건 모를 일이지. 정준아, 네가 이걸 대학 심층 면접에서 문제로 받았다고 생각해봐. 네가 이걸 잘 설명하면, 넌 이제부터 '영어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수도 있어. 자, 어느 대학 입시 문제라고 할까? 서울 대학이라 하자. 정준 학생, 전치사와 접속사를 구별하는 법에 대하여 설명해보시겠어요?"
나는 마치 대학 면접관인 것처럼 다소 거만한 어투로 정준에게 질문을 했다.
- 그거 있잖아요, 전치사는 명사나 대명사 앞에 놓여 있는 거니까, 저기, 저거, game이라는 명사 앞에 있으니까 전치사고요.
찬찬히 보니, 정준이에게 귀여운 데가 있다.
"어어, 너무 잘하는데? 정준이 영어 달인이네."
- 접속사는 단어와 단어 또는 구와 구를 연결해주는 거잖아요. 서로 붙여주니까요.
정준이가 엄지와 검지로 브이자를 만든 후에 자신의 턱을 괴며 말을 이어간다. 그러더니 나에게 삿대질하듯 큰 소리로,
-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주기도 하고요.
그 순간 나는 큰 소리로,
"맞지. 바로 그거야. 제대로 설명했어."
그러자,
- 와아~~
중일이네 급우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잠시 기다렸다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 뒤에 문장이 오잖아요. 저거, people wear (주어+동사) 말이에요. 그러니까 so가 앞 문장과 뒷 문장을 연결하니까 접속사지요.
거기까지 듣고, 나는 세 번의 손뼉을 딱딱딱 치면서,
"그냥 넌, 서울대 입학인데? 그때 나 만나면 모르는 척하지 마."
라고 정준이를 한껏 치켜세웠다. 중일이가 또 한마디 한다.
- 그러면 정준이 별명을 오늘부터 '서울대 정준이'라고 하죠 뭐.
중일이도 더 이상은 정준이를 무시하지 않는 눈치다.
"정준이의 대답에서 좀 더 설명하자면 접속사는 딱풀이야. 앞에 문장 있는데 뒤에 문장이 오지? 앞 문장과 뒷 문장을 연결시켜주는 거지. 그러므로 그 품사 뒤에 문장이 있다면 그것은 백발백중 접속사야. 전치사 일 턱이 없다는 얘기야."
에휴, 오늘 문법 수업은 정준이 덕택에 쉽게 지나갔고 정준이는 좋은 별명 하나 얻었다. 결국 창우는 그날 교과서 검사받으러 오지 않았다. 그토록 싫어하는 명보 펜맨십 쓰는 벌칙이 부과되었다. 자성 교실에는 가기 싫은 지 명보 깜지를 깔끔하게 덧써왔다. 그리고 학부모 확인 사인도 받아왔다.
"어, 어머님이 확인 사인해주셨네?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어?"
- 다시는 이런 거 받아오지 말래요.
"그러셨구나?"
어깨가 축 처져서 교무실 밖으로 나가는 창우에게 씽긋 웃어주었다.
'창우 한동안 맘이 붕붕 떠서 공부 제대로 못할 텐데...'
[계속]
[사진 일부: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