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향기와찬양Lim Mar 05. 2022

자전거에 얽힌 기억 몇 조각

-  '자전거'(류지남)라는 시(詩)를 읽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게 되는 교직원(여) 화장실 문 안쪽에 '자전거'라는 시가 부착되어 있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 나는 그 시를 꼼짝없이 읽게 된다. 내게는 자전거에 얽힌 몇 가지 기억이 있어서 화장실 안에서 나 홀로 만감이 교차할 때가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마구 내달리기만 해서도 안 되는,

세상 살아가는 그런 이치를 이제 일곱 살인 네가 하마 알랴마는

호동그런 눈망울 가득 푸른 하늘을 담고

낑낑거리면서도 신바람이 난 네 뒤를 밀다가

세상 사는 일에 턱없이 뒤뚱거리기만 하는 애비는

쓸데없이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자전거’(류지남) 중에서]

  

   아버지     

  아버지는 항상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다. 첫 차에서 신문 꾸러미를 챙겨 받은 후에 구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셨다. 그 일은 오전이면 다 끝이 나지만 아버지는 장터에서 머무르셨다. 몇 차례 술자리를 가지고 때로는 기생집에 들리며 하루를 보내셨다. 남들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을 아버지께 퍼붓곤 하셨다. 그 욕은 화나고 짜증 나는 당신의 삶에 대한 분노였을 듯하다. 어머니의 닦달이 심해질수록 아버지는 더욱더 가정사에 무관심해지셨다. 아버지는 만취하여 윗마을에 있던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부터 자전거 벨 소리를 울리며 귀가하셨다. 우리는 따르릉, 따르릉 그 소리가 들리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서로 눈짓을 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우리 5남매는 마루 끝에 일렬로 서서 함석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인사를 했다.  마치 군인들이 구령을 외치는 격이었다.  “아버지 잘 댕겨 오셨습니꺼?”     

 아버지의 눈은 다 풀리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코를 골며 주무시기 시작하면 그때야 우리는 다시 본인들이 하던 일을 하곤 했다. 숨 막히던 그 시절에 나는 별스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아버지는 어쩌면 히틀러의 나치당에서 낙오된 당원일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그런 아버지와는 맘속으로 화해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신 지 오래됐지만 그리우면서도 독재자 같았던 아버지가 싫다. 양가감정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여자들이 자전거를 거의 타지 않던 시절에 여성용 자전거를 애용하셨다. 집은 윗마을에 있고 사업장은 장터에 있었으니 자전거야말로 어머니에게는 애마와 같은 거였다. 어머니는 농사일도 하셨고, 할머니를 수발드는 일도 하셨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라며 늘 동동거리셨다.  

 여성용 자전거 앞에 걸려있던 바구니는 어머니께는 가방 대용이었다. 신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연탄 대리점을 하신 어머니는 그야말로 여장부셨다. 대형 트럭으로 연탄이 몇 차 들어오면, 어머니는 자전거 바구니에 배달용 연탄집게를 담고 연탄 배달을 주문받은 곳으로 페달을 밟으며 부리나케 달리시곤 했다. 어머니가 여유와 낭만을 모르며 사시도록 내몬 장본인은 바로 '바구니 달린 여성용 자전거'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도 그 자전거를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      

 자매 셋이서 동시에 어머니께 자전거를 배운 적이 있다. 여동생 둘은 금방 배워서 자전거를 잘 탔다. 자전거 타는 것과 운전 실력과 상관이 있을까? 두 동생은 대형면허를 가지고 있으며 운전에는 달인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운전을 거의 못하고 있다. 자전거를 배울 때, 동생들보다 못한 내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매사에 조심성이 많아서 그렇다. 겁이 많아서 그렇다. 빨리 배운다고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다 탄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맏딸인 나를 두둔하셨다. 어머니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나를 편애하실 때는 늘 동생들한테 미안한 맘이 든다.  

   

아들과 자전거

  아들은 자전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었다. 누가 자기 자전거에 펑크를 냈다고 했었다.  

“캠퍼스 내에서 자전거가 뭐 필요하다고? 차라리 자전거 없이 살아.”라고 내가 말한 적이 있다.

  아들은 대학교 내에서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사용했던 모양이다. 그날도 3분이면 당도할, 학교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이었단다. 그 정도이니 속도를 냈다면 얼마나 냈을까? 무엇을 놔두고 와서 되찾으러 가려고 유턴을 하다가 넘어졌을 것 같다. 아들은 두개골이 깨지면서 뇌혈관이 파열되는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 겨우 생명만 건진 정도다.  


 “아이고 나한테 매달 보내던 용돈 한 달만 안 보내고 그놈 헬멧 사서 씌웠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내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생때같은 손주를 그 모양으로 해놓고.”     

 어머니는 섬망 증세가 있어도 손주가 그 지경이 된 것에 대해서는 맘이 상하시는 모양이다. 헬멧을 살 돈이 없어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신다. 잠깐 자전거 탈 때는 헬멧을 쓰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자전거가 이동 수단이셨던 부모님의 빛바랜 약혼 사진

나는 오늘도 교직원 화장실(여)에서 ‘자전거’라는 시를 읽고 있다. 그걸 읽고 또 읽어도 싫지 않은 것은 아마도 핏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앞을 향해 열심히 내닫는 자전거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법이란다

이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자전거’(류지남) 중에서]     

         

이전 07화 현재 진행형, 임*양의 스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