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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Feb 24. 2022

현재 진행형, 임*양의 스토리

그의 회복을 위해, 그 기적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의 아들, 임*양은 대학교 3학년 때 자전거 사고로 넘어져서 뇌를 크게 다쳤습니다. 한동대학교에서 재학생 간증 수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엄마인 제가 사고 10년 만에 임찬양의 스토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한동으로 이끄심 (2010)

   아들은 말썽을 피우며 사춘기를 보냈다. 학교에서는 틈틈이 용의 검사 단속에 걸려서 전화가 왔다.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기획사에서도 연락이 오기도 했다. 반항하며 멋만 부리던 아들이 공부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다. 졸업쯤에는 교복 바지의 엉덩이가 낡아 다 삭을 정도였지만 기초가 부족했던 탓인지 수능에서 원하는 등급을 받지 못했다. 잠시 좌절하다가, 목회자 자녀에게 특혜가 주어졌던 ‘뉴질랜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했다. 영어 실력도 키우며 재수를 하기로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jYoGvepqY&feature=youtube_gdata_player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접한 뉴질랜드에서 제작하여 보내온 뮤직 비디오

 '뉴질랜드 AEC에서 한동대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한동대학교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임*양 일기 중에서)

한동 라이프, 개혁주의 (2011)

  아들은 캠퍼스 생활을 하면서 아주 영적인 청년으로 성숙해가고 있었다. SFC 운동원이 되어 학우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개혁주의 신앙에 심취해갔다. 목사인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서적들을 챙겨가서 어려움 없이 척척 읽어내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특별한 은사(恩賜)를 지녔었다. 아들은 학교, 교회, 동아리, 교우관계 등으로 일정이 빡빡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중에 네덜란드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무척 기뻐하며 그의 SNS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영학을 공부하는데, HRM과 CSR 트랙이 집중되어 있고, Dutch Company에서 인턴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동대에서 전공을 교양처럼 삼고, 개혁주의 독서    모임과 SFC 그리고 학문과 신앙연구소 활동을 주 전공으로 삼듯이, 네덜란드에서는 리서치를 전공으로 하고 경영학은 재미로 할까 생각 중입니다.’라고 야심 찬 포부를 밝혔다.    

한동에서 넘어지다 (2012)

  2012년 11월 7일 저녁 9시경에, 아들은 학교 셔틀버스를 타려고 나갔다. 급히 자전거로 이동하다가(도보로 5분 미만인 거리) 넘어져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서 가까운 곳에 있던 학우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병원에서는 CT 촬영 결과로는 이상이 없으니 귀가하라 했으나 아들은 머리가 심하게 아프니 한 번 더 촬영해달라고 얘기하는 도중에 동공이 확대되고 의식을 잃었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은 트라우마로 힘들었다. 아버지는 세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들은 중환자실, 아버지는 응급실에 가 있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아들을 병간호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약 3개월 정도는 아들의 이름만 되뇌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냈다.  딸은 동생 사고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학업을 해내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병실에서만 지냈다. 어머니는 밤에 불 끄거나 방문을 닫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면 손이 떨려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만 견디면 고무줄이 팽팽하다가 터지는 것처럼 위험할 수도 있으니 맘껏 울어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몇 차례 이불을 두껍게 덮어쓰고 목놓아 울었다.    

한동 지체들의 이야기 (2013)

  하루도 예외 없이 한동인들이 병문안을 왔다. 병원비가 대신 납부되어있거나 아들이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에 기거할 수 있었던 ‘실로아’라는 게스트 하우스가 익명으로 준비되어있기도 했다. 서울로, 포항으로, 다시 서울로 이동하는 모든 구급차 비용을 미리 누군가 대납해둔 게 아닌가? 한 교수 사모님은, 우리가 포항에서 지냈던 5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거리를 제공하셨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포근히 받아보니, 우리는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한 곳이란 걸 알게 되었다.

급성 흡인성 폐렴 (2014)

  사고 이후에 잃어버린 아들의 의식은 조금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강직으로 깨물려서 입술이 없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연하(삼킴) 마비 때문에 침을 많이 흘려서 키친타월을 한쪽 벽이 가득하도록 쌓아두고 닦아내야 감당이 됐다. 그래도 재활병원에서는 대부분 그런 고통을 안고 지내고 있어서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위로가 되었다.

  옆 병상의 환자들이 응급상황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는 것을 심심찮게 봐오긴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아들이 열이 나기 시작했다. 급하게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다.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텨오던 병상 생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병명은 ‘급성 흡인성 폐렴’이라고 했다. 급하게 응급실로 가느라고 재활병원에서 먹이던 약을 챙겨가지 않았더니 아들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쉼 없이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겁이 났다. 뭔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었던 것은 결국 약의 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절망으로 맘이 무겁게 짓눌렸다.

마켓 빌리지(2015)

  딸은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하고 학교생활을 헤쳐나가고 있었고 특히 본인이 창단한 한동대 응원단이 그 명맥을 잘 이어가고 있었다. 다양한 이벤트를 하며 본인 스스로는 물론, 한동대학을 응원하고 있었다.

                                                          https://youtu.be/u0DD0GL6ngk

[폭풍감동 주의] 팀 교수님을 위한 이벤트

  ‘나는 한동대학교 응원단 활동을 하면서 '모든 한동인을 응원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었다. 실기수 때에는 여유가 없어서 못 했던 것들을 OB가 되어 할 수 있어 뜻깊었던 이 이벤트였다.' (딸의 SNS 중에서)


  그 해는 중동 호흡기 증후군이라 불리는 메르스(MERS)가 창궐했다. 그래서 병문안이 금지되어 보름 정도 아들을 보지 못하고 간병인이 보내오는 사진과 영상으로 아들을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울하고 쓸쓸한 나날에 또 한 번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일이 있었다.

마켓 빌리지 프로젝트

  M이라는 아들의 후배는, 사고 났을 때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찬*이 형은 제가 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찬*이 형은 살려야 합니다.”


라고 그의 부모님께 말했고 자신이 받은 장학금 전액을 아들의 병원비로 후원하고 입대를 했었다. 아들이 병상에 있는 동안에 군 복무를 마치고 그 해, 제대를 했다. M은 제대하는 날,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아들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왔다. 군에서 내내 생각한 일이 '마켓 빌리지' 프로였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선물로 카네이션, 카네이션 브로치, 부토니에 등을 온, 오프라인으로 판매하여 수익금 일부를 아들의 치료비에 후원하는 것이었다. 온라인은 단시간에 완판 되고 M과 학우들은 전국의 대학을 찾아다니며 5월의 카네이션과 아프리카 주민들이 손수 수를 놓고 제작한 지갑이나 주머니 같은 것을 홍보하며 판매했다.    

초막절 같은 나날들(2016~2018)

   아들은 눈에 띄게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이 좀 더 나아지는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어느 날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쭈었다. ‘이 긴 세월 동안에 어쩌면 이 정도의 차도밖에 없나요?’라고. 그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은, ‘찬*이의 상태가 ‘–99’였는데 지금 ‘0’이니 많이 좋아진 거지!’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딸은 2016년에 결혼을 했다. 딸의 결혼식에는 자신이 창단했던 한동 응원단이 축하 무대 펼쳤다. 달은 트라우마를 거의 극복하고 지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즉 요즘 핫하다고 일컫는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24시간제 간병인 도움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보러 병원에 갔고 어머니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금요일마다 병원으로 퇴근했다. 어머니는 녹초가 된 몸으로 주 1회 간병인에게 휴가를 주고 대신에 병실 보호자 의자에서 밤을 새웠다. 이스라엘 민족이 초막절을 지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했던 초막절이 떠오르곤 했다. 병원에서 매주 불면의 밤을 보내며 칠흑 같은 절망의 터널에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이웃들의 사랑에 감사가 넘쳤다.

홈 커밍(2019)

  아들의 병상 생활이 만 7년이 되니 의료보험 공단으로부터 제공되는 운동 치료가 모두  사라졌다. 그냥 병원에서 누워 지내야만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오롯이 간병인 비용과 병원비를 지출할 수만은 없었다. 자택에서 지내면 활동 보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중병환자를 의료기관에서 집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한 달 지출되는 간병, 병원비만으로도 집안에 운동기구 등은 세팅할 수 있었다.

  활동 보조사 L을 만난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그분은 헬렌 켈러를 잘 보살피는 ‘설리반’ 같은 자다. 영적, 정신적, 육신적으로 아들을 돌봐주는 전인적인 활동 보조사다.      

24시간 활동보조 지원 대상자로 선정 (2020~2022 현재까지)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아버지는 밤 시간 동안의 간호를 도맡았고 낮에도 아들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원래도 강한 체질이 아니었는데 마음은 무너지고 육체는 지쳐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부병, 통풍, 잔기침, 근육통 등으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아들의 활동 보조 지원 포인트가 추가되어 아버지가 병간호에서 조금이라도 물러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의 신청 만에 시(市) 추가 대상자로 선정되어 (2020년 10월) 야간에도 활동 보조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일단 밤에 잠을 제대로 자려고 따로 방을 얻어서 나갔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좋은 조건이 되었다. 아들이 독거 장애인이 되어 수급자가 되고 ‘24시간’ 활동 보조 지원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2021년 3월)

  지금은 매일 24시간 내내 활동 보조사들이 아들을 돌보고 있다. 그래도 아버지는 온종일 그곳에서 아들의 운동을 돕고, 어머니는 필요한 물품을 구비해대고 드레싱과 뒤치다꺼리로 바쁘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잘 수 있고 아들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돌보니 우리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아들이 10년간 병상에 있을 동안에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10년이 마치 긴 하루 같습니다.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등산을 하면 미리 지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끝이 어디일지도 모르는 그 어느 곳을 쳐다보면 러질 지 모릅니다. 한 걸음씩 천천히 가렵니다. 걸어왔던 지난날처럼 이웃들과 동행하며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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